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69화
뎅~ 뎅~
“자, 그만. 시험지는 내가 걷을 테니 책상 위에 손 올려놓지 말고.”
종이 울림과 동시에 교관이 목소리를 내었다.
교관이 한 장씩 시험지를 걷어가는 사이 학생들이 펜을 내려놓곤 기지개를 켰다.
이윽고 시험지를 모두 걷은 교관이 강의실을 나간 후, 막혀 있던 둑이라도 터지듯 학생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끄응~”
“끝났다!”
“잘 봤냐?”
“잘 보긴. 겁나 어렵더만.”
“아아! 난 기사 지망인데 이런 것까지 배워야 되냐고! 칼만 잘 휘두르면 되는 거 아니냐고!”
“야, 답이나 맞춰보자.”
“이제 와서 맞춰보면 뭐하냐? 시험지는 이미 떠나갔는데.”
“그래도 궁금하잖아.”
중구난방 떠드는 학생들 사이에서 시안이 필기구를 정리했다.
그런 시안을 향해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시안, 고마워. 덕분에 유급은 안 당할 거 같아!”
에르제가 그에게 오더니 지난주에 공부를 봐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날 시안이 짚어준 부분을 위주로 달달 암기를 했더니, 시험에서도 제법 문제를 풀 수 있었다.
무려 4문제 중 하나는 정확히 답을 알고 맞춘 것이다!
“잘했네. 4개 중 하나는 조금 아슬아슬해 보이지만 찍은 것 중에서도 몇 개는 맞았을 테니.”
“나 이렇게 많이 맞아본 건 처음이야……. 아 맞다. 헷갈리는 문제가 몇 개 있었는데 이거 말야…….”
지나간 시험에 대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두 사람.
그런 두 사람을 란이 힐끔 흘겨보았다.
‘쟤네 언제 저렇게 친했지?’
강의실의 가장 뒷자리.
그곳에 앉아 있는 란의 눈에는 반 아이들이 떠드는 모습이 훤히 들어왔다.
물론 시안과 에르제의 모습도.
‘흐음.’
즐거운 듯 재잘대는 에르제와 적당히 대꾸하며 받아주는 시안.
가만 생각해 보면 이전부터 뭔가가 있었던 것 같기는 했다.
‘그레이트 힐에서부터 무슨 낌새가 있긴 하더만.’
그레이트 힐에서의 첫 실전 수업을 치르고, 비고에서 마주쳤을 때.
그때도 저런 느낌이 있긴 했었지.
뭔가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콧바람을 뀌며 애써 창밖으로 눈을 돌려도, 저도 모르게 힐끔거리는 자신이 있었다.
“쳇.”
그녀가 혀를 찼다.
내가 뭔 상관이래. 그냥 수련장에나 가자.
그녀가 잡념을 접곤 책과 필기구를 챙겼다.
“란~ 시험 잘 봤어?”
“야야, 당연히 잘 봤겠지. 란이 입학 성적은 2위였잖아.”
“하긴 그렇네. 2위면 머리도 엄청 좋다는 얘기잖아!”
지금은 292위지만, 이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고 그녀가 일어나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아, 란. 오늘은 이제 뭐 할 거야? 모처럼 수업도 없는데.”
“수련장.”
재잘대며 따라붙는 학우들을 데리고 란이 강의실을 떠나갔다.
당장 내일모레, 주말만 지나면 실기시험을 치르는 날.
‘이번에는 안 진다.’
강의실의 문턱을 넘으며, 그녀가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에르제와 담소를 나누는 시안의 모습.
그의 상이 그녀의 금빛 눈동자에 또렷이 맺혔다.
* * *
주말이 지나고, 실기시험의 날이 밝았다.
거인들의 무덤에서 치르는 본래의 시험 대신에 교내 대회로 대체하겠다던 이번 시험.
많은 학생들이 ‘간단히 치르고 지나가려나’라고 예상한 것과 달리, 상당히 대대적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와우 이거 진짜야?”
“사람이 꽉꽉 들어찼는데?”
“이 정도면 여기 사는 시민들 다 몰려온 거 아냐?”
아카데미의 부지를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수련동이지만, 그 안에서도 가장 큰 부지를 차지하고 있는 건물이 있다.
아카데미에 세워져 있는 그 어떤 건물보다도 커다란 건물.
콜로세움.
강철마탑에 의뢰하여 콜로세움 마법을 개발하기 전까지,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주로 대련을 펼쳤던 장소다.
대련을 위한 널찍한 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그 주위로 원형으로 관객석까지 마련된, 그야말로 행사를 위한 건물.
그 커다란 건물에 빽빽이 시민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학생들의 경기라! 재밌겠는데 이거!”
“웬일이지, 아카데미가 이런 이벤트도 다 해주고? 포도주에 음식도 원껏 나눠준다니 돈깨나 들었을 텐데.”
“이유가 뭐든 우리가 무슨 상관인가. 그냥 먹고 마시고 즐기면 되지. 하하하!”
시민들이 저마다 밝은 얼굴로 콜로세움 건물에 들어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구경이 뭔가.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 아니겠는가?
그 싸움 구경을, 무려 식사와 음료를 제공하면서까지 보여주겠단 소식에 많은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뿐만 아니라 아직 머물러 있던 캐러밴의 상인들도 발 빠르게 행동했다.
아카데미에서 이런 행사를 한다는 것을 알고 재빨리 콜로세움 인근에 노점을 펼친 것이다.
심지어 개중에는 남몰래 도박판을 벌이려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당신들! 아이들 싸움에 돈을 걸고 싶습니까? 이 신성한 배움의 터전에서?”
“아니, 그것이 말이오…….”
“말이 깁니다! 한마디로만 대답하세요! 할 겁니까 안 할 겁니까?”
“아, 안 하겠소!”
물론 순찰을 돌던 교관에게 적발되어 꾸중을 듣게 되었지만 말이다.
다른 곳이면 몰라도 학교에서 학생들의 경기를 상대로 도박이라니, 도저히 용납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멀찍이서 꾸지람을 듣는 도박꾼들을 보며 시안이 혀를 내둘렀다.
‘뭔가 특별한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은 했었다만.’
설마 이렇게 크게 벌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냥 참관인 격의 교관들과 학생들만 모여서 치르는 작은 무투회 같은 느낌일 거라 생각했는데.
“야! 봐봐! 총장님도 와 있어!”
“어, 진짜네! 평소엔 얼굴도 잘 안 보이시는 분이.”
“아~ 이제 알겠다. 총장님 때문에 교내 대회로 바꿨나 봐. 밖으로 나가면 총장님이 견학하기는 힘들 거잖아.”
“그러네. 그게 맞는 것 같다.”
콜로세움 내에서도 가장 높은 귀빈석.
경기장은 물론 도시의 모습까지 내려다보이는 그 높은 자리에 총장 제레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보는 시안의 눈이 한껏 가늘어졌다.
‘제레흐 폰 베르그하이젤.’
대륙에 열 있는 하이마스터 중 하나.
삼강 오중 이약 중에서 오중에 속하는 이.
과거 아직 젊었을 때는 당당히 삼강에 속하는 이였으나 나이를 먹고 노쇠함에 따라 검왕 베르페드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고 한 단계 내려왔다고.
나이를 먹고 내려왔다는 게 고작 한 단계라는 사실이 그의 저력을 짐작게 했다.
수십 년 전에는 당당히 천하제일을 노래하던 남자.
그 남자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눈빛으로 사람들을 좌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녀석과의 협상은 결렬되었네. 아마 무슨 일을 해온다고 하면 오늘이겠지.”
제레흐가 옆에 있는 수비대장 켈른에게 얘기했다.
켈른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바깥으로 나갈 일정을 교내 대회로 바꾸고 이렇게 사람들을 모은 겁니까?”
“그런 놈이 설치고 있는데 어떻게 학생들을 내보내겠나. 그리고 놈이 일을 저지르면 시민들이 휘말릴 가능성도 높으니, 가능한 한 내 눈에 닿는 곳에 모아 놓은 게지.”
에버웨일 아카데미가 위치한 동명의 도시 에버웨일.
성벽에 둘러싸인 요새와 다름없는 도시였지만 그 성벽보다도 더욱 안전한 곳이 있다.
바로 검노 제레흐가 눈을 번뜩이고 있는 이 아카데미 안.
도시에서 이보다 안전한 장소는 없었다.
“그렇군요……. 도시에는 일단 제 부하들이 빠짐없이 순찰을 돌고 있습니다.”
“수고하는군. 아직 도시에 남아 있는 시민도 많을 테니……. 만에 하나의 사태가 터지면 이쪽으로 잘 대피를 유도해 주게. 대피소의 위치는 알고 있겠지?”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본관의 지하에 있지 않습니까.”
아카데미의 본관의 지하.
깊숙이 비고가 위치해 있는 이 지하에는 대피소 역시 마련되어 있었다.
전쟁이 터졌을 때 민간인들이 대피할 장소로, 어지간한 고위 마법이 떨어져도 무너지지 않을 굳건한 장소다.
이걸로 대비는 만전이었다.
사고가 터질 때를 대비해 많은 교관과 교수들에게도 미리미리 언질을 두었으니.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건, 녀석이 펼친 마법진이 뭔지 모른다는 겁니다만…….”
“괜찮네. 그럴 때를 위해 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제레흐가 저 너머 성벽을 보았다.
놈의 마법진이 뭔지는 모르지만, 성벽을 거쳐야 하는 것이라면 제레흐가 혼자서라도 단숨에 대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병력 따위를 소환해 성벽을 넘으려 한다든가.
그런 것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성벽 하나 제대로 넘지 못할 적들이 제레흐를 넘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
문제는 이미 도시에 들어와 있는 놈들이 행패를 부릴 경우.
그때를 대비하여 이렇게 시민들을 최대한 제레흐의 눈에 닿는 곳에 모아 놓은 것이었다.
“일단은 지켜보도록 하지.”
“예…….”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이 아래쪽의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첫 번째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마침 딱 알맞게도, 학생들의 시합이 시작되고 있었다.
* * *
이번 대련은 무투회처럼 열리기는 하였으나 학생들끼리의 대련은 아니다.
점수를 매겨야 하는 학생들 사이에 싸움을 붙여서 어떻게 객관적인 점수를 매기겠는가.
이번 실기시험의 내용은 정확히는 골렘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2단계까지는 이미 치르고 왔고.’
그리고 어제 이미 한 번은 걸러져 나왔다.
1학년 300명의 학생들이 1~2단계 골렘을 상대하며 거기서 이미 200명은 점수가 매겨졌다.
오늘은 남은 100명가량의 학생들이 3단계 이상의 골렘을 상대하는 날이다.
그렇게 3단계 골렘을 거치고, 거기서도 살아남은 학생들은 4단계 골렘에 도전하고.
그런 식으로 모든 학생들이 걸러질 때까지 끝없이 골렘의 단계가 올라간다.
“다음 도전자! 준비해 주세요!”
―쿠오오오오오!
3단계 골렘을 이용한 시험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단계별로 골렘에 마나를 주입하는 마법사의 숫자가 다르다.
1단계에서 2명이었고 2단계에선 4명이었다.
그리고 오늘 3단계 골렘에 마나를 주입하는 마법사는 무려 9명.
기본 스펙 자체가 엄청나게 펌핑이 되었기 때문에 2단계를 가뿐히 통과한 학생들도 빠르게 리타이어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쿠웅!
‘역시 잘하는군.’
란이나 유설, 알렌은 무리 없이 골렘을 쓰러뜨려 나갔다.
1학년 학생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축에 속하는 애들이다. 3단계 정도로 나가떨어질 리가 없었다.
“아자!”
“잘했어, 이안!”
덧붙여 이안도 크게 힘들이는 기색 없이 3단계 골렘을 쓰러뜨렸다.
경기장 아래에서 그런 그를 응원하는 레이나. 그녀는 방금 골렘한테 지고 온 참이다.
‘둘이 꽤 친해졌나 본데.’
하이파이브를 하는 모습을 보니 꽤나 가까워 보인다.
그때 겪은 사건을 계기로 친해진 것일까.
“다음 도전자!”
그렇게 차례차례 아는 얼굴들이 통과해 나갔다.
그중에서도 그나마 걱정이 되던 것이 에르제였다. 에르제는 레이나처럼 여기서 탈락할 가능성이 높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쿠웅!
“…….”
“와…….”
“대, 대단합니다! 지금까지 중 가장 빠른 기록입니다!”
“이렇게 빨리? 쟤 300위잖아!”
순식간에 넘어진 골렘을 보며 좌중들이 조용해졌다.
시안 역시 꽤나 놀라고 있었다.
힘들 거라 생각했던 에르제는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3단계 골렘을 쓰러뜨렸다.
시작한 순간 경기장에서 모습을 감추더니 골렘의 뒤에서 튀어나온 그녀.
그리고 등을 밟고 빠르게 위로 올라 골렘의 목덜미를 갈라버렸다.
깔끔하고 정확한, 흠잡을 곳 하나 없는 일격.
“…….”
좌중들의 함성 속에서, 그녀가 평소와는 다른 무표정한 모습으로 단상을 내려갔다.
그런 그녀의 점수를 채점관들이 사각사각 열심히 기록했다.
가장 빨리 쓰러뜨린다고 최고 점수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적지 않게 추가 점수가 매겨졌을 터.
‘다들 많이 성장했군.’
시안이 아는 학생들 중에선 에르제가 마지막이었다.
그들이 골렘을 쓰러뜨리는 모습을 떠올리며 시안이 천천히 손을 풀었다.
입학 초창기 때와 달리 많이 강해진 그들을 보니 자신 역시 몸이 달기 시작했다.
“다음 도전자! 준비해 주세요!”
그렇게 몇 사람이 더 지나가고, 이윽고 그의 차례가 왔다.
시안이 각인에서 검을 뽑아 들고 경기장 위로 올라갔다.
그러곤 골렘과 대치하며, 당장에라도 튀어 나갈 수 있도록 마나를 아낌없이 끌어 올렸다.
그런데 그때.
―왜 이래요?
―어디 아픈 거 아냐?
―괜찮아요, 아저씨?
관객석이 술렁거렸다.
한 관객이 상태가 안 좋은 듯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카데미 직원이 빠르게 그에게 다가갔다.
상태가 이상한 관객이 입을 벌리더니.
“커헉!”
“꺅!”
“괜찮습니까!?”
피를 토했다.
괜히 가만히 있다가 토혈을 뒤집어쓴 앞자리의 관객이 비명을 지르고, 직원이 다급히 그 사람을 부축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컥! 커허어어어―!”
사내의 입에서, 마치 폭포수처럼 피가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절대로 한 사람의 몸에서 나올 만한 양이 아니었다.
“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방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비명이 울려 퍼지는 와중.
피를 토하는 사내의 팔이 으슬으슬 떨리더니 무언가가 돋아났다.
비늘이었다.
“끄어어어어―”
이미 흰자밖에 남지 않은 눈으로, 사내가 비늘이 가득 돋아난 징그러운 팔을 옆에 있던 직원에게 뻗었다.
“으헉!”
직원이 다급히 도망치려다 의자에 걸려 넘어졌다.
사내가 직원에게 다가가 비늘이 돋아난 팔을 휘둘렀다.
직원이 잔뜩 겁을 집어먹고 눈을 감았다.
카앙!
“어, 어?”
그러나 얼마가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직원이 감았던 눈을 떴다.
그 눈에 제복의 옷자락이 펄럭이는 광경이 비쳐왔다.
익숙한 아카데미의 제복, 바로 방금까지 한창 마나를 끌어 올리고 있던 학생.
“하, 학생?”
시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