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92화
라비의 기운이 뇌력천주를 향해 스멀스멀 흘러들어 갔다.
뇌력천주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게 무슨 재롱이람?’, 뭐 이런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직후.
놈의 표정이 새하얗게 물들 때까지 촌각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뭣……! 네놈! 대체 이게 무어냐!”
촤르륵.
감각적으로 느껴진다. 라비를 통해 흘러들어 오는 감각. 뇌력천주의 존재가 라비에게 제압당한 것을 느꼈다.
‘역시.’
성공했다.
놈의 능력이 번개란 것을 알았던 때부터 성공을 예감하고 있었다. 프시케는 스스로가 가장 높은 서열의 악마라 했고 그런 프시케조차 라비에게 매여 버렸다.
그렇다면 만약 라비가 묶을 수 없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프시케가 모르는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놈은 그런 존재는 아니었다.
프시케에게 들은 갖가지 이름 있는 악마들의 이름들. 그중에 벼락을 다루는 천둥의 뿔을 가진 오우거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이름이 바로 뇌력천주.
사시사철 비바람이 내리는 폭풍산에서 벼락과 먹구름을 벗 삼아 노닌다는 정신 나간 ―프시케의 표현으로― 오우거.
프시케나 마룡왕과 같은 군주급은 아니라고 했으나 나름대로 이름 있는 상급의 악마라고 들었다.
“네 녀석……!”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입 다물고 얌전히 있어.”
“읍……!”
시안이 놈의 귓가에 속삭이자 뇌력천주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쓸데없는 얘기를 하게 할 수는 없지. 이 자리엔 자신만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얌전히 있으라는 명령에 따라 헥토르가 펼쳐두었던 뇌기가 놈에게 회수되기 시작했다.
어느새 지하 감옥 방엔 아까와 같은 한적한 공기가 돌아왔다.
“도, 도련님…….”
앤디가 몸이 성치 않은 클로드를 데리고 구석에서 검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클로드를 지키면서 그 역시 시안의 전투를 목격했다. 그러곤 자신이 본 것이 꿈인지 아닌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 중인 상태였다.
수고했다는 뜻으로 그의 어깨를 툭 치니 앤디가 크게 움찔거리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공자…….”
시안이 클로드의 상세를 보았다. 그의 가슴에 박혀 있는 검은 보석검.
“적당히 뽑으면 안 된다고 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잠깐, 기다려 주게.”
클로드가 심호흡을 하더니 검을 잡았다. 파직! 파지직! 그 손과 검 사이에서 벼락이 몇 번이나 맞부딪혔다.
그렇게 잠시 지난 후 클로드가 천천히, 아주 조금씩 칼을 뽑았다.
그리고 뚫린 가슴의 구멍에 치유 마법을 퍼부었다.
“허억, 허억…… 이제 되었네. 그나저나 자네, 정말 대단하구먼.”
“말하지 말고 치료나 마저 하십쇼.”
“제레흐에게 들었다네. 아카데미에서도 범상치 않은 흑마법사를 상대하곤 훌륭하게 격퇴했다고 하더만.”
“총장님에게?”
“나도 맹의 사람이거든.”
시안이 납득했다. 그때 제레흐가 맹의 사람에게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해둔다고 했었지.
비틀거리는 그를 앤디에게 맡기고 시안은 헥토르를 챙겼다.
그렇게 네 사람이 계단을 올랐다.
아까까지만 해도 위층에서 들려오던 진동 소리는 이미 멈춘 후였다.
얼추 싸움이 마무리되었단 뜻일 것이다. 위쪽엔 빌프리트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클로드가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헥토르의 목에 단검을 겨누곤 걷고 있는 시안과 분한 듯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헥토르가 있었다.
옆에서 보면 누가 봐도 헥토르가 시안에게 굴복한 모양새였다.
실제로 그 안에 든 것은 헥토르가 아닌 뇌력천주였지만.
물론 시안의 명령으로 뿔도 진작 감춘 후였다.
“뭡니까?”
“그 아이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죄송하지만 이대로 성에 데려갈 겁니다. 제자분이라 하니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사로잡은 흑마법사를 놓아줄 순 없습니다.”
“아, 아니. 아닐세.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클로드가 헥토르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분명 이전까지는 사랑하던 제자였다. 하지만 이렇게 명백하게 배신을 당한 지금까지도 그를 제자라 생각할 수는 없었다.
마음의 정리는 감옥 안에서 진작 끝났다.
그가 보는 헥토르는 그저 흑마법사 나부랭이에 불과했다.
“녀석을 심문할 생각이겠지?”
“예.”
“혹시 괜찮다면 맹과 정보를 공유해줄 수 있나? 원한다면 심문을 도와줄 수도 있네.”
“도와준다니 어떻게요?”
“녀석들한테 정보를 잘 뽑아내는 일원이 있거든.”
시안이 슬쩍 고민하는 티를 내었다.
그러나 사실 마음속으론 이미 결정을 내린 후였다.
심문을 도와준다는 제안 따위 전혀 쓸모없는 것이었다.
뇌력천주는 이미 라비의 지배하에 있었으니.
“한번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거절하겠단 뜻으로 들리네만.”
“글쎄요.”
거절의 뜻을 담아 말한 것이긴 하지만 그렇게 강한 거절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 그는 얼마든지 뇌력천주에게 뽑아낸 정보를 천도맹과 공유할 생각이 있었다.
예를 들어 그쪽에서 가치가 있는 다른 정보를 내민다든가 한다면.
그렇게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1층까지 올라왔다.
그곳엔 쓰러진 마법사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병사들이 어디로 갔나 했더니 모두 위층으로 올라간 모양이었다.
이윽고 잠시 후.
“도련님!”
빌프리트가 달려오더니 시안의 몸을 살피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소 싸움이 있었던 듯 옷은 해져 있었지만 몸에는 상처가 거의 없었다.
사실 라비의 능력으로 모두 회복한 것이었지만 빌프리트가 그 사실을 알 수는 없었다.
“위쪽은 전부 제압이 끝났습니다. 도련님께서 이렇게…… 탑주도 무사히 데리고 왔으니, 이제 탑의 일은 일단락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 잘했군. 탑주를 데려가 쉬시게 도와드리도록. 치유사도 붙이고.”
“예. 그 녀석은 어찌하시겠습니까?”
빌프리트가 완전히 제압된 헥토르를 보며 얘기했다. 클로드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헥토르에게서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다.
“일단 내가 데려가지.”
그리 얘기한 시안이 뇌력천주만 데리곤 단둘이 바깥으로 나왔다.
갑갑한 실내에서 나와 탁 트인 밖으로 나오니 새벽의 공기가 폐부 가득히 씻어주었다.
한편 정리를 위해 탑에 남 아있던 빌프리트는.
“앤디 경. 잘했어. 도련님을 잘 지켜주었네.”
“저는……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걸요…….”
“응?”
아직도 꿈인지 생신지 모를 눈빛으로 멍하게 얘기하는 앤디를 보며 빌프리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든 사정을 아는 클로드만이 그 옆에서 피식 웃을 뿐이었다.
* * *
“이제야 좀 얘기를 나눌 수 있겠군.”
“…….”
뇌력천주가 단단히 다문 입으로 시안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시안이 이제야 눈치챘다는 듯이 얘기했다.
“이제 말해도 돼.”
“프하―! 너, 너 이놈, 대체 뭐 하는 놈이냐!”
녀석의 머리에서 다시 작은 뿔이 돋아났다. 두 뿔 사이로 푸른 전격이 파파팟! 스파크를 튀었다.
“웅!”
“크윽…….”
뇌력천주가 시안을 위협하니 당장에 라비가 나타나 쌍심지를 켜며 주의를 주었다.
그러자 뇌력천주의 험악한 눈초리가 강제로 내려앉으며 뿔 사이로 튀던 스파크도 사라졌다.
거세된 망아지마냥 얌전해진 녀석이었다.
시안을 꼬나보는 눈빛만은 여전했지만.
“너에게 듣고 싶은 말은 많다만 일단은 이거겠지. 헥토르가 뭘 꾸미고 있던 거지?”
“……검왕이란 자에게 강탈당한 신물을 되찾으라는 명령이 내려왔다더군. 이 이상은 나도 몰라.”
추측이 얼추 맞았군.
시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신물이라니, 뭐 하는 물건인데?”
“몰라.”
“명령이 내려왔다면 칠흑마탑과 연결된 창구가 있단 얘기겠군. 그건 어디지?”
“헹, 그것도 모른다. 안됐구나, 인간아. 내가 아는 게 없어서.”
뇌력천주가 시안을 보며 꼴좋다는 듯이 킥킥 웃었다.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무척이나 짜증이 나는 모양새였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이 정도밖에 녀석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단 얘기겠지.
그래도 덕분에 칠흑마탑이나 지옥에 대해 묻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네 이름이 뇌력천주가 맞나?”
“……맞다. 그걸 어디서 들었지? 네놈은 대체 누구냐?”
“네 궁금증은 알 거 없고, 먼저 몇 가지 당부해 두지.”
시안이 팔짱을 끼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지옥계의 섭리에 따라 라비에게 묶인 녀석. 한마디로 말해 노예란 말이다.
노예에겐 그에 맞는 교육이 필요한 법이지.
“날 해하지 말고 내 명령 없이 내 주변인을 해하지 마라. 아무 이유 없이 관계없는 사람을 죽이지도 말고.”
“쯧…… 알았다.”
뇌력천주가 혀를 차며 내키지 않는 듯 대답했다.
그러나 시안의 말은 끝이 아니었다.
“우리의 관계를 무덤까지 가져갈 것이며, 이 명령들을 위반하지 않는 선에서 스스로를 지켜라. 자결하지 말란 말이다. 물론 멋대로 도망가는 것도 안 돼.”
“큭……!”
뇌력천주가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놈이 안 보는 사이에 이 몸뚱이를 죽여 버리고 그사이 명령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도망가려 했는데.
“꿍꿍이가 아주 많았나 보군.”
“흥…… 꿍꿍이라니 무슨.”
“제법 머리를 굴리는 것 같으니 몇 가지 더 얘기해 놓을까.”
시안이 녀석을 보며 조금 더 명령을 세분화하여 내리기 시작했다. 갖가지 상황에 대한 예시와 그에 따른 행동방침.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그것이 어찌나 자세한지 몇 가지 정도로 끝나지 않고 어느새 두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제약이 많아지고 있었다.
시안이 내거는 제약이 두 자릿수로 늘어나고도 한참을 더 불어나니 뇌력천주의 표정이 점점 새파랗게 질려왔다.
시안이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점점 그의 자유가 없어지고 있었다.
“그만! 그만 좀 해, 제발! 다 알아들었으니까!”
이윽고 녀석이 귀를 막고 고개를 저었다.
“손 내려.”
“힉!”
그 손을 내리게 하고 시안은 생각나는 제약들을 마저 얘기했다. 그 후에야 시안은 그를 풀어주었다.
뇌력천주가 털썩 무릎을 꿇고 땅을 짚었다.
앞으로 자신은 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냥 잠깐 색다른 구경거리가 하고 싶어 지상에 내려왔을 뿐인데…….
“뭐 너무 걱정하지 마라. 지금 얘기한 것들만 잘 지키면 돼. 지킬 것만 지키면 나는 터치하지 않는 주의니까.”
“그, 그런가?”
“그래. 이참에 지상 구경이나 하다 간다고 생각해.”
뇌력천주의 얼굴에 조금씩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래 뭐,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지상 생활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나쁠 것도 아닌가.
벼락이 조금 적게 치는 것이 단점이긴 하지만 지상은 나름대로의 풍류가 있는 곳이었으니.
거기에 이 녀석은 인간이다. 앞으로 잘해봐야 50년쯤 지나면 죽겠지. 칼쟁이인 걸 보면 더 일찍 죽을지도 모르고.
그 정도 시간은 자신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럼…… 칠흑마탑이나 지옥에 대한 질문은 진정이 좀 되면 다시 하는 걸로 하고.”
뇌력천주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도 악마인 만큼 다른 악마에게 서열정리를 당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아직 어리고 미숙할 땐 많이 휘둘리고 다녔었지.
그때 겪었던 다른 악마들에 비하면 시안의 경우는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일단 처음 할 일은 이거군.”
그런 뇌력천주를 내려다보며 시안이 손을 들었다. 어느새 그 손에는 묵빛의 검이 들려 있었다.
뇌력천주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 칼은 왜…….”
“네 기운 좀 내놔봐. 조금이면 되니까.”
시안이 검을 치켜들었다. 문득 뇌력천주는 이 새벽의 어둠 속에서 시안의 눈이 무척이나 반짝인다고 느꼈다.
그러곤.
“으아아아악! 역시 똑같잖아!”
다른 악마들과 다를 바 없는 새 주인의 만행에 크게 비명을 질렀다.
[흑정령이 새로운 능력에 기뻐합니다.]
울려 퍼지는 녀석의 비명을 들으며 시안과 라비는 싱글벙글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