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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06화 (106/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06화

유연이 불평불만을 쏟아내었지만 유설은 한 번 내린 결정을 바꾸진 않았다.

언니를 어려워하는 듯 보이더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본인이 스스로 결정한 일에 대해선 양보가 없었다.

“지고 나서 후회하지 말라고!”

그런 말을 남겨놓고 유연은 떠나갔다.

시안은 유설과 에르제를 데리고 적당히 빈 강의실에 들어갔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간단히 대화나 나눌 생각이었다.

먼저 접점이 별로 없던 에르제와 유설이 악수를 나눴다.

“에르제야. 반가워.”

“유설.”

“잘 부탁해. 순위는 300위긴 하지만 열심히 할게!”

“시안이 선택했으니까 이유가 있겠지.”

“……시안이랑 많이 친한가 봐?”

300위가 팀이란 것에 유설은 아무 불만도 표하지 않았다.

다행인 일이다. 괜히 설명하고 설득할 시간이 줄어들었으니까.

한편 에르제는 유설을 보며 갓 입학했을 때를 떠올렸다.

식당에서 나오며 2위의 반지를 가지고 대련을 하는 유설을 멀찍이서 바라봤던 일.

그때만 해도 2위인 그녀는 하늘 위에 있는 존재로 보였다. 신분도 그만큼 차이가 나기도 했고.

그런데 지금은, 비록 순위는 그때처럼 2위와 300위 그대로였지만, 그때만큼의 차이가 느껴지진 않았다.

딱히 실력에 엄청 자신이 붙었다거나 자부심이 생겼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그때보다 타인과의 격차 같은 것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그녀가 변한 것은 그 부분이었다.

“유설은 나랑 같이 적의 정면을 치면 되고, 에르제는 상대의 후열을 맡아줄 거야.”

“다 목을 따버리면 된단 말이지?”

“표현이 흉흉하긴 하지만, 그렇게만 해주면 더할 나위 없지. 만약 방비가 잘되어 있으면 적의 신경만 끄는 정도여도 상관없어.”

“그것만으로 괜찮아?”

“그 정도만 해도 1인분이야.”

상대가 암살자의 존재조차 모른다면 그대로 후열을 탈락시킬 수 있다. 반대로 상대가 암살자의 존재를 눈치챈다면, 그래도 상관없다.

뒤에 숨어있는 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시선이 분산될 것이다.

시안은 스스로의 실력에 나름 자신이 있었고 유설의 실력도 믿고 있다.

이 둘이라면 집중 못 하는 3인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만했다.

“잘해볼게!”

“그래.”

힘차게 대답하는 그녀를 보며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만났을 때 덜덜 떨기만 하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지금의 그녀는 훨씬 더 자신감이 있어 보였다.

“나는 그럼 평범하게 싸우면 돼?”

“어. 다음 주까지 나랑 합이나 좀 맞춰보자.”

“나, 나도! 나도 같이할래!”

“-? 넌 뒤쪽에서 개인행동이니까 합을 맞출 건 없지 않아?”

“그래도 나도 팀이니까!”

“그래, 그럼.”

적당히 대답한 후 시안이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보았다. 슬슬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었다.

“일단 지금은 여기까지하고 이따 다시 만나지.”

“응.”

“알았어!”

그리 얘기한 후 세 사람이 각자 수업을 들으러 헤어졌다.

다만 유설과 헤어지기 전, 시안이 잠시 그녀를 붙잡았다.

“왜?”

“혹시 뇌력천주란 이름을 알고 있나?”

[겨울의 뱀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아는데, 그 녀석이 왜?]

그 이름에 대답한 것은 유설의 안에 있는 프시케였다.

유설에게 그 사념을 전해 듣고 시안이 얘기했다.

“어쩌다가 강림한 녀석이랑 만나서 말야. 그놈도 프시케처럼 라비가 목걸이를 채웠거든.”

[…….]

그 말에 프시케가 대답 없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뇌력천주란 놈과 딱히 친했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같은 처지란 것에 동병상련이 느껴졌다.

분명 녀석도 시안 같은 놈이 지상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강림했었겠지.

말은 없었지만 그 감정은 유설에게 충분히 전해지고 있었다.

“그냥 아는 사인가 해서 물어봤다. 녀석도 여기 사용인 숙소에 묵고 있거든.”

“아는 사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고, 이름만 아는 정도라고 하네.”

그 정도 사이라면 더 물어볼 것은 없다.

시안이 고개를 끄덕이곤 유설과 헤어져 강의실로 향했다.

* * *

일주일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 시간 동안 학생들은 수업과 병행하여 대회 준비를 착실히 이어나갔다.

물론 대회가 있다고 해서 모든 학생들이 준비를 하는 건 아니다. 참가할 학생들. 상위권의 반지를 가진 학생들이 주로 참가했다.

그리고 대회 당일.

시안은 팀원들과 함께 교관의 안내를 받아 대회장으로 향했다.

‘숲이라.’

대회가 치러지는 곳은 숲이었다.

충분한 넓이가 되는 곳으로 한 경기당 네 팀이 들어가 시합을 한다고.

넷 중에서 마지막에 살아남은 팀이 다음 경기에 진출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그런 경기장이 하나가 아니라 몇 개씩 있었다.

“하긴 두 팀씩 했다간 언제 끝날지 모르겠네.”

“……그런가 봐.”

교관의 설명을 들으며 에르제와 유설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대충 3번 정도 이기면 우승인가?’

이곳에 모인 학생들은 참가자만 따져서 대략 150명 정도였다. 50팀 언저리라고 생각하면 3번 이기면 우승이다.

아카데미 측에서 마련해 놓은 경기장이 몇 개씩이나 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시안. 아우야.”

그때 이 많은 사람들 중 용케 시안을 발견하곤 데미안이 찾아왔다.

뒤에는 그와 한 팀인 것으로 보이는 줄리오와 다른 3학년 하나가 있었다.

당연한 것처럼 셋 모두 제국의 사람이었다.

“1학년들만으로 팀을 꾸린 것이냐? 병아리 같은 것이 제법 귀엽구나.”

데미안이 피식 웃으며 시안을 바라봤다. 그러나 유설을 보고는 그 표정이 굳어왔다.

“쯧쯧.”

그가 혀를 차더니 시안의 어깨를 툭툭 치곤 지나갔다. 그러곤 지나가며 시안에게 작게 속삭였다.

“이종과 친하게 지내는 건 네 자유라고 하지만, 너무 정을 붙이면 나중에 힘들어지지 않겠느냐?”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반요정과 친하게 지내면 나중에 힘들어진다고?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가자.”

“예.”

“알겠습니다, 공자님.”

그러나 더 얘기해 줄 생각은 없는지 데미안이 그대로 떠나갔다. 도중에 줄리오가 한번 돌아보며 시안을 찌릿 째려보았고, 다른 3학년 역시도 시안을 힐긋 쳐다보았다.

시안이 그 3학년의 손을 보았다.

<1>이 새겨진 백색으로 빛나는 반지.

3학년 1위의 학생이었다.

“시안 공자. 데미안 공자님을 너무 심려케 하지 마십시오.”

흥미롭게 그를 보는 시안과 달리 녀석은 눈엣가시를 보는 것마냥 시안을 쳐다보았다.

하.

시안이 작게 헛웃음을 토했다.

“선배님은 제국연 소속입니까?”

“물론입니다, 공자.”

알 만하다.

데미안과 그를 따르는 제국연의 이미지는 옛날부터 그렇게 좋지는 않았지만 최근 들어선 더 나빠졌다.

이 학생도 다른 제국연의 학생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데미안의 사상에 심취해 그를 따르는.

녀석은 그 말을 끝으로 데미안을 뒤따라 사라졌다.

가는 길 유설을 한번 째려보고 가는 걸 잊지 않는 녀석이었다.

“……재수 없어.”

유설이 찡그리며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시안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잠시 후.

경기가 시작되고 시안의 팀이 경기장으로 진입했다.

경기장 곳곳에 배치된 사역마를 통해 숲 안쪽 광경이 모두 바깥에 표시되었다.

총장과 교관들, 그리고 다른 학생들이 그것을 보며 구경하고 있을 테지.

“가자.”

시안이 숲 위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청, 적, 흑, 백의 빛의 기둥 4개가 보이고 있었다.

각 팀의 거점에 꽂혀 있는 깃발. 그 깃발이 발하고 있는 기둥이다.

룰은 간단. 상대의 깃발을 모두 빼앗는 팀이 승리.

시안의 팀은 흑색 기둥이었다.

“공격할 거지?”

“어.”

시안이 우리 쪽 거점에 있는 깃발을 챙겨선 바로 출발했다.

이대로 거점에 버티면서 찾아오는 상대를 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지금은 그보단 공격하는 쪽이 상책이다.

에르제를 팀으로 들인 이상 상대방을 최대한 휘둘러야 한다.

그러자면 수비보단 공격이다.

‘청, 백팀은 가만히 있고, 적팀은 우리처럼 움직이는 중이군.’

시안의 흑팀과 적팀이 수비를 택한 팀을 향해 이동한다.

그런데 도중에 적팀이 이동을 멈추었다. 그러곤 아닌 척 슬그머니 이쪽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시안.”

유설이 경고했다. 놈들의 꿍꿍이가 훤히 보인 탓이다.

“뒤를 치려고 하는군.”

“어떡할 거야?”

양쪽에 적이 있을 때의 행동요령은 간단하다. 좌우지간 모든 힘을 모아서 한쪽부터 쳐내는 것.

그렇지만…….

“에르제. 잠깐 와봐.”

“응? 왜?”

모처럼 에르제라는 큰 변수를 데려왔다. 활용해 보지 않을 수 없지.

시안이 간단하게 작전을 설명했다.

* * *

“드론드, 잘 펼치고 있지?”

“네, 네 선배. 제 실드는 단단하기로는 손에 꼽을 정도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믿는다.”

3학년 8위의 학생, 릭. 그가 청색의 빛을 발하는 깃발을 만지작거리며 숲을 노려보았다.

그는 이번 대항전의 룰을 들은 직후 한 가지 작전을 떠올렸다.

이 경기의 핵심은 깃발을 사수하며 적의 깃발을 빼앗는 것. 단 한 경기에 참가하는 팀은 네 팀씩.

이 룰을 듣고는 그는, 절대 거점에서 움직이지 않는 완전히 수비에 전념하는 작전을 내었다.

‘우리 팀 하나를 뚫는 데 체력과 마력을 낭비하긴 싫겠지.’

1:1이었다면 그다지 효용이 없겠지만 1:1:1:1인 경기이기 때문에 상당히 훌륭한 전술이 될 수 있었다.

완벽히 방어해 내는 팀을 공략하기 위해 많은 힘을 쏟았다간 다른 팀에게 당해버린다.

그렇게 건드리기 까다로울 정도로 완벽히 수비를 해낸다면, 결국 경기는 이쪽을 빼놓고 나머지 세 팀이 치고 박는 양상이 될 것이다.

‘그렇게 세 팀 중에서 하나가 남게 되면 그 한 팀만 우리는 상대하면 돼.’

셋이서 싸우느라 잔뜩 힘이 빠져 있을 최후의 팀을 정리하고 깃발을 모조리 쓸어온다.

그게 릭의 작전이었다.

본인이 방패술에 상당한 소양이 있는 전사였기에 떠올릴 수 있던 계책.

이걸 위해서 똑같이 방어에 일가견이 있는 멤버들만 모아왔다.

드론드도 그중 하나였다. 1학년이라곤 하지만 그의 지원 마법은 학교 전체를 따져봐도 손가락에 꼽을 만했으니까.

‘애초에 지원 전문 마법사가 적으니.’

나머지 한 명은 언제나 자신과 합을 맞췄던 친구다.

녀석도 검과 방패를 쓰는 검사로 검보다도 방패에 오러를 씌우는 쪽을 좋아하는 녀석이다.

“선배, 이쪽으로 오는데요.”

“칫. 멍청한 녀석인가 본데.”

릭이 저 멀리 보이는 빛의 기둥을 보며 혀를 찼다.

백팀은 자신들과 같이 수비를 하는 듯하고, 흑과 적팀은 공격을 위해 이동했다.

그러던 중 적팀이 마음을 돌려 흑팀의 뒤를 잡았다. 흑팀은 자신들과 적팀에 의해 싸이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이 경우 한쪽을 뚫고 지나가야 한다만.

“처음부터 수비에 만전을 기하는 우리가 아니라 적팀을 노렸어야지.”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는 일 아닌가.

멍청한 녀석 때문에 힘을 빼겠단 생각을 하며 릭이 방패를 들었다.

흑색의 빛기둥은 금방이라도 이쪽과 조우할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그런데.

“뭐지?”

뭔가 이상했다. 흑팀은 계속해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흑팀을 견제한다고 생각했던 적팀은 아까부터 그 자리에 그대로 못 박혀 있지 않은가?

그 사실에 그가 위화감을 느끼고 있을 때.

“서, 선배! 위!”

드론드의 외침 소리에 그가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선 하늘을 덮을 정도로 빼곡한 얼음의 창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 상천검(霜天劍) - 천뢰(天雷) ]

그 사이로 흑색의 번개가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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