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08화
결승전이라고 특별히 경기장이 다르거나 하진 않았다. 첫째, 둘째 경기 때와 똑같은 숲 필드.
시안에겐 첫 번째 경기 때와 똑같은 흑색의 깃발이 주어졌고 저 멀리 적색, 청색, 백색의 빛기둥이 보였다.
“이번에도 똑같이?”
“응.”
하늘을 보니 적색의 기둥이 가만히 있는 것이 보인다. 청색과 백색은 서로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청팀이나 백팀 둘 중 하나의 뒤를 덮치는 것도 좋은 판단이지만, 시안은 가만히 수비를 하고 있는 적팀을 요격하는 것을 택했다.
청팀과 백팀 사이에 난입해 어설프게 난전을 유도하기 보다는 깔끔하게 한 팀씩 잡는 쪽이 승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런 연유로 가만히 있는 적색 기둥을 향해 가던 중.
―쿵! 쿠구구구궁!
땅이 울리며 우지끈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점점 다가오는 진동과 굉음에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그것은 적색 기둥이 있는 방향에서 이쪽을 향해 맹렬히 달려오고 있었다.
“아만 발자크.”
기둥은 그대론데 녀석만 숲속에서 튀어나왔다.
성난 맹수와 같이 달려온 그놈이 그 기세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이글거리는 오러가 시안의 가슴께를 노리고 쇄도했다.
―카앙!
시안이 검을 들어 놈의 검을 막았다. 시안의 검에도 물론 오러가 씌워져 있었다.
“역시 검왕의 아들이군!”
시안의 오러를 보며 아만이 눈을 빛냈다.
시안이 경기를 할 때 화면 너머로 보긴 했다. 하지만 직접 보니 새삼 놀라웠다.
자신보다 2살이나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이 정도로 완성된 오러를 사용하다니.
일순간에 몇 차례나 검을 휘두르는 아만. 시안이 그 모든 일격을 받아 흘렸다.
그사이 녀석의 등 뒤론 유설의 얼음이 떨어지고 있었으나.
“흡!”
파앙!
오러를 방출하여 녀석이 유설의 마법을 모두 튕겨내었다.
시안이 헛웃음을 흘렸다.
피하는 것도 쳐내는 것도 아닌, 오러만으로 마법을 튕겨내다니. 꽤나 터프한 녀석이다.
“혼자 왔나?”
“그렇다면?”
녀석의 검을 받아 흘리며 시안이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아만이 워낙 존재감을 어필하며 등장하긴 했지만, 그걸 빼고서도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적색 기둥 역시 저 멀리 위치한 그대로이고.
‘적색 깃발이 저기에 있으니 데미안은 무조건 저곳에 있겠지.’
규칙상 리더는 깃발을 몸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 데미안은 아직 그 자리에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줄리오는 데미안을 혼자 두고 다닐 놈이 아니다.
“에르제, 유설. 적색 기둥이 있는 곳으로 가봐.”
시안의 말에 당장에라도 아만의 뒤를 치려던 두 사람이 움찔 멈췄다.
시안의 뜻을 읽었는지 아만도 잠시 검을 거두고 물러났다.
유설이 물었다.
“……혼자 괜찮아?”
그녀의 눈은 아만의 손에 있는 백색 1위의 반지로 향했다.
그것이 뜻하는 바를 모르는 그녀가 아니다.
시안이 강하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지만, 그래도 혼자 아만을 상대하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
“문제없어.”
그러나 시안의 대답은 단호했다.
아직 걱정이 다 가시지 않은 듯한 두 사람이었지만 리더는 시안이다. 리더의 명령에 따라 두 사람이 데미안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둘이 사라지고 나자 아만이 뚜둑 목덜미를 풀면서 검을 들었다.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일단 소개부터 하죠. 아만 발자크. 옛부터 검과 방패로 제국을 지켜오던 강건한 발자크가의 아들입니다.”
발자크는 대대로 제국의 군부에 투신해온 명문 기사 가문이었다.
대장군의 손자. 3년간 수많은 의뢰를 완벽히 해결해온, 이 나이에 이미 수많은 공적을 인정받아 기사의 작위를 수여받은 학생.
“대장군의 핏줄인가?”
“내 조부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것 치곤 데미안 형님과 꽤나 친분이 깊어 보이던데.”
“정치적인 문제야 제국 내에서의 일이고, 여기선 그저 같은 학교에서 수학하는 동문일 뿐입니다.”
그러니 친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다고, 아만은 그리 얘기했다.
이치에는 맞는 말이다만 납득하긴 힘들었다.
본디 권력이란 피도 눈물도 없는 법.
이것은 권력의 잔혹함을 토로하는 것이 아닌, 권력이란 같은 핏줄조차 개의치 않는 차가운 것이란 의미다.
제국 내에선 정적이지만 바깥에선 동문이라든가, 그렇게 간단히 나눌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찌 됐든 데미안 공자님은 제국 공작의 아들입니다. 예를 갖추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리 말하며 녀석이 검을 들었다. 검신을 타고 투지가 가득한 오러가 이글거리며 피어올랐다.
“그 예의 후작 아들한테도 좀 갖춰주지?”
시안이 흑검을 겨눴다.
이글거리며 검에 뭉치는 아만의 오러와는 달리 시안의 오러는 사위를 검게 물들어갔다.
그걸 보며 아만이 눈을 번뜩였다.
“한번 고려해 보죠.”
그가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 * *
유설과 에르제는 시안의 지시대로 적색 기둥이 있는 곳으로 직진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데미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공터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적당히 걸터앉아, 보석이 달린 지팡이를 만지작거리는 모습.
딱히 숨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반요정이 왔나. 거참 재수도 없는 날이지.”
“…….”
한껏 멸시하는 시선이 날아오자 유설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재수 없는 것은 이쪽이었다. 데미안의 횡포는 학년을 막론하고 유명한 이야기였으니까.
그녀가 견제와 탐색의 의미로 얼음화살을 날려보았다.
그러나 그 화살은 데미안에게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산산 조각나 분해되었다.
마법은 아니었다.
“실이야.”
뒤쪽에 숨듯이 서있던 에르제가 그녀에게 얘기했다.
숨지도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수상쩍다 생각하곤 있었다만, 아무래도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통째로 얼려버리는 건 쉬운 일이긴 한데.’
문제는 그사이 데미안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
데미안의 손에 끼워진 흑색 1위의 반지는 유설을 신중하게 만들었다.
“실은 내가 처리할게. 깃발 쪽을 부탁해.”
“네가? 괜찮겠어?”
“응. 이 정도라면 괜찮아.”
에르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데미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허, 우리 줄리오가 들었으면 참으로 섭섭해하겠어. 300위밖에 안 되는 후배한테 그런 말을 들을 애는 아닌데.”
데미안이 뭐라고 말하든지 에르제의 눈빛에는 일절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그저 다짐할 뿐이었다.
‘절대 안 져.’
얼마 만에 시안과 함께 팀을 이루는 행사인데, 패배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서로 마나를 뿜어내 상대를 견제하기 시작하는 유설과 데미안.
그 둘을 남겨두고 에르제가 조용히 검은 선 속으로 사라졌다.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그녀를 보곤 데미안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유설과 대치하느라 에르제를 찾아보거나 할 수는 없었다.
‘……실.’
선 속에 숨은 에르제가 숲으로 들어와 곳곳에 있는 실들을 살폈다.
하나씩 잘라내며, 혹은 그냥 넘어가며 그녀가 줄리오의 위치를 찾았다.
단서는 넘치고 있었다.
숲 여기저기에 설치된 줄리오의 실들. 그 하나하나가 전부 줄리오의 위치를 찾게 해줄 단서였다.
‘장력이 달라.’
어느 실은 변함없이 일정하고, 어느 실은 장력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 마치 실이 숨을 쉬는 것처럼.
‘전자는 그냥 설치만 해놓은 거고 후자가 술사랑 연결돼 있어.’
이걸 역추적하면 줄리오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
그녀가 눈을 빛내며 숲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 갔다.
* * *
숲 한가운데 생긴 밤의 공간에서 아만이 빛나는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이 태양과 같이 이글거리며 시안이 펼친 밤을 찢어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왜지?’
생각처럼 잘되지 않는 것을 보며 그가 숨을 들이켰다.
이상했다. 시안의 오러는 분명히 완성도가 높다. 입학한 지 반년 밖에 안 된 이의 오러라기엔 상당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 있었다.
시안이 검왕의 아들이라 하여도 자신 역시 자랑스러운 대장군의 손자다.
조부 역시 베르페드 아그리드와 같은 하이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기사이며, 아버지 또한 마스터급에 오른 기사였다.
그 핏줄을 한껏 받은 자신 역시 어렸을 때부터 수많은 천재들을 제치고 이겨왔다.
그랬기에 검왕의 아들이라 하여도 자신에겐 안 된다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
분명 검을 부딪치고는 있고 서로 검격이 오가며 합이 맞춰지곤 있다.
하지만 아만은 끝없는 늪에 빠져드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집중을 못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만 발자크.”
“큭!”
시안의 지적에 아만이 흐트러지던 정신을 바짝 부여잡았다.
그러곤 다시금 힘을 실어 시안의 밤의 오러를 흩어내려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한 번의 검격으로 일순간 흩어낼 수는 있어도, 그것은 곧바로 다시 복구되었다.
‘마나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아만.
이만한 밀도의 오러로 이런 넓은 공간을 점하는 것조차 상당한 일일진대, 아무리 찢어버려도 아무렇지 않게 복구한다.
자신은 같은 밀도의 오러로 검을 감싸는 것이 고작인데 상대는 전투 공간 자체를 감싸고 있었다.
자신도 나름 어릴 때부터 영약을 먹거나 마나가 풍부한 지역에서 터를 잡고 수련을 하는 등 노력해왔는데, 그 정도론 따라잡을 수 없을 격차가 느껴졌다.
아만은 영영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마저 들어왔다.
‘실력은 좋은데.’
한편 시안은 아만과 다르게 조금 김이 새고 있었다.
아만 발자크. 대장군의 손자. 에버웨일 1위의 학생.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일 것이다. 언제나 강함에 목말라하며 강자와의 대련을 바라는 그에게 있어 아만 또한 언젠가 겨루고 싶은 이 중 하나였다.
그런데 막상 부딪쳐 보니 기대 이하였다.
‘내가 눈이 너무 높아진 건가?’
만약 헥토르와 싸우기 전이라면, 혹은 마룡왕과 조우하기 전이었다면 조금 더 두근거리며 싸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경험으로 시안은 벽이 깨졌음을 느꼈다.
학생들 중 1위 정도로는 도저히 성에 차지 않을 정도로.
‘이제는 진짜 아카데미에서 바랄 것이 많이 없어졌군.’
교관들이나 총장을 제외하면 더 이상의 자극이 사라졌다. 자극이 사라졌다는 것은 성장이 멈췄다는 것.
더 이상 학생들끼리 부딪치는 학교 행사 정도로는 성장을 기대하기 힘들어졌다.
혹시 총장과 대련을 하는 식의 행사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아직 안 끝났다!”
이내 아만이 이를 악물고 검을 당겼다. 그 검에 이글거리는 화염이 폭발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일순간 모든 밤을 떨쳐낼 정도로 강한 빛을 발하며, 그의 검이 시안에게 떨어졌다.
시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 상천검(霜天劍) - 참(斬) ]
그가 조용히 검을 가로 그었다.
동시에 흩어졌나 싶던 밤이 다시 살아나며 아만이 펼친 빛을 모조리 감싸 가뒀다.
본디 밤을 밝혀야 할 빛이 오히려 밤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이윽고 아만의 검이 시안에게 도달했을 때.
이미 그곳엔 한 점의 빛줄기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카앙!
고요한 정적 속.
칼이 부러지는 청명한 소리와 함께, 반 토막 난 검신이 빙글빙글 돌며 바닥에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