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12화
“대장군이…… 로데릭 장군이 이곳에는 왜 온다는 겁니까?”
데미안의 말에 질문한 것은 옆에 있던 알렌이었다.
그는 데미안에게 일그러진 얼굴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캐묻듯이 쏘아붙였다.
데미안이 힐끔 알렌을 보고는 코웃음 쳤다.
“당연한 것 아니냐. 이렇게 가까운 곳에 적국 귀족의 자녀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데 그냥 지나칠 리가 있겠느냐?”
“그런 게……!”
용납될 리가 없다, 그렇게 소리 지르려던 알렌이었으나 그는 입을 다물었다.
데미안에게 얘기해 봤자 소용없다. 대장군이 움직인다는 건 이미 황제 폐하가 윤허한 일이라는 소리였으니.
시안이 굳어져 가는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그 말을 제게 해주러 오신 겁니까?”
“우리도 미리미리 준비해야 하지 않겠느냐. 너도 후작에게 미리 지시받은 사안이 있을 터인데?”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알렌의 시선이 느끼며 시안이 대답했다.
“그런 거 없는데요.”
“없어?”
데미안이 예상 밖이라는 듯이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아그리드 후작이 후계자인 네게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았다고?”
“예.”
“허어! 후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구나. 지금만큼 공을 세우기 좋은 시기가 없을 터인데.”
데미안이 눈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흠…… 어차피 너도 곧 알게 될 테니 미리 얘기해 주마. 대장군이 오는 건 아카데미를 장악하기 위해서다. 앞서 얘기한 인질 얘기는 뭐 겸사겸사 한 얘기고, 사실은 이곳을 전초기지 중 하나로 삼을 생각이라고 한다.”
에버웨일의 입지는 대륙의 중앙. 제국과도 요정궁과도 수인왕국과도 어느 쪽이든 가까이 이어져 있다.
양쪽을 모두 침공하고 있는 제국의 입장에선 꼭 손에 넣고 싶은 땅이리라.
반대로 양 적국과 모두 맞닿아 있기에 수성이 불리하단 단점이 있지만.
‘거인의 힘을 믿는단 건가.’
압도적인 전력의 차가 있다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터.
더욱이 상대는 빙하백령의 요정과 자카르타의 수인들.
그 두 종족은 모두 자국 내에서 더욱 강하다. 각자 빙하지대와 대삼림이라는 천혜의 요새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것은 반대로 말해 그들이 국경 바깥으로 나오게 되면 훨씬 공략하기 쉽다는 말이었다.
그런 의미로도 에버웨일의 입지는 제국에게 있어서 최적이란 말이겠지.
하지만.
“총장님이 가만히 있을 것 같습니까? 다른 교관들은요?”
에버웨일의 총장 제레흐는 대장군과 동급의 하이마스터다. 더욱이 교관들은 대륙 곳곳에서 모인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
아무리 대장군이라도 피해 없이 진압하기는 어려울 터.
“글쎄. 대장군이 이곳을 어떻게 공략할 요량인지까진 듣지 못했다. 군사기밀이니까. 우리 제국연 쪽에서 내부에서 돕겠다고 하니 단칼에 거절하더군.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대장군에게 받았던 답장의 서신을 떠올리며 데미안이 킬킬 웃었다. 그리곤 덧붙였다.
“하지만 일절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군. 보면 안다면서.”
보면 안다.
시안과 알렌이 그 말뜻을 깨달은 것은 이후로 수 시간도 지나지 않은 저녁. 새까맣게 어둠이 내려앉은 밤의 일이었다.
에버웨일 영지의 저 너머 너른 평야에서 불꽃이 폭발했다.
이윽고 그것은 거대한 한 사람의 형상을 이루었다.
“화염거인…….”
어찌나 거대한 녀석인지 이 영지에서 녀석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이가 없었다.
시안과 알렌은 물론, 아카데미의 모든 학생들과 영지의 모든 영지민들에게도.
그날 밤, 에버웨일 전체가 불의 장벽으로 둘러싸였다.
* * *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은 빛보다도 빠르게 전파되었다. 그걸 듣지 못한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소식이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화염거인이 나타나 영지를 가두었다. 그런 상황에 태평하게 귀를 닫고 있을 사람은 없었다.
“워프 게이트는요! 영지에 게이트 관리소가 있잖아요!”
“이미 다 망가져 있었다. 영지에 들어온 기사들 중에 황실의 간자들이 있었던 모양이야.”
“기사들 중에요?”
“학생들을 호위하겠다고 왔던 기사들 말이다.”
“그런…….”
당연히 아카데미 내도 거의 패닉 상태였다.
수인족과 반요정 학생들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상태였고, 그들을 다독이는 교관들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가득했다.
당연하게도 아카데미는 제국의 학생들과 수인족, 반요정 학생들 둘로 양분되었고, 제국의 학생들은 별도의 공간에서 따로 모이고 있었다.
제국의 학생들이 묵는 기숙사와 제국연의 부실, 그 외에 몇몇 강의실.
수업이 될 리도 없었고 그저 불안감에 떠는 나날들이 시작됐다.
그 와중에 시안은 제국의 진영에도 수인과 반요정의 연합 진영에도 가지 않은 채 대련 광장에서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아무리 그라도 이 상황에 1인 수련실에 들어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안, 어떻게 할 거야?”
유일하게 그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에르제였다.
유설과 란은 연합 진영에 있었고 알렌은 고민이 많은지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헥토르는 거인의 낌새를 살펴보라고 방금 심부름을 보낸 상태였다.
“어떻게 하다니? 대장군을 기다리며 상황을 보는 수밖에 없잖아.”
화염거인을 보낸 것은 황실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황실의 칙령을 가지고 대장군이 이곳으로 향하고 있을 터.
“대장군이 와서 뭐라 뭐라 입장 표명을 하겠지. 얌전히 기다렸다가 그걸 따르면 될 일이야.”
그냥 적당히 둘러댄 것이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앞으로를 위해 지금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대장군이 무슨 말을 하던 그에 따를 생각은 없다.
“거짓말.”
그리고 그 거짓말은 에르제에게 곧바로 간파당했다.
시안이 눈을 크게 떴다. 제대로 연기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뭔가 할 거지? 꿍꿍이로 가득한 표정인데.”
“그럴 리가. 후작가의 자제가 황실의 뜻에 따르지 않을 리가 없잖아. 제국의 봉신 가문 중 하나인데.”
“말이 길어지는 거 보니까 진짜인가 봐?”
“…….”
원래 이렇게 눈치가 좋은 애였던가…….
빤하게 시안을 바라보는 에르제의 눈동자는,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붉게 물든 채였다.
일전에 그류페인에서의 일 이후로 그녀의 눈동자는 다신 검게 돌아오지 않았다.
“어이, 주인아.”
그때 마침 저 멀리서 헥토르가 터덜터덜 걸어왔다.
입고 온 집사복은 곳곳이 불에 타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머리카락도 끝부분이 검게 그을려 있는 것이 평범한 모습은 아니었다.
“한바탕하고 왔나?”
“녀석이 내가 아는 녀석인지 알아 오라며. 미안하지만 난 얼굴만 보고 거인들 구별하는 재주는 없다.”
“그래서 그 검댕이는 뭐야?”
“얼굴은 구분 못 해도 불에 지져 보면 알 수 있지. 놈은 퀘른델이란 이름의 화염거인이다.”
굉장한 건지 바보 같은 건지 알 수 없는 뇌력천주의 방식에 시안의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까 화염거인의 얼굴을 구분할 수 없으니 불꽃으로 구분한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걸 하필이면 직접 지져지면서 알아본다는 얘기고.
‘……뭐 일단은 무사한 것 같으니.’
그래도 부상이 커 보이지는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퀘른델이라……. 그래서 네가 아는 녀석인가?”
“음. 옛날에 이름은 좀 들어봤는데.”
헥토르가 힐긋 옆에 있는 에르제를 보았다. 시안이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거인이 부활하고 그에 제국이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만천하에 공개된 후다.
후작가의 집사가 거인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그렇게 이상할 건 없었다.
에르제는 시안이 아카데미에서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이기도 하고.
헥토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얘기했다.
“거인들 중엔 어린 축에 속하는 놈인데, 엄청난 재능을 타고났다고 말이 많았었지. 그래도 옛날엔 어렸으니까 별문제는 없었는데…….”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끝을 흐리는 헥토르였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잘 알 것 같았다.
“지금은 다 자랐단 말이군.”
“뭐 그렇지.”
요는 타고난 재능에 이젠 오랜 세월까지 곁들여진 녀석이란 소리였다. 아틀란타처럼 완전히 늙어 무력해진 거인과는 정반대의.
하긴, 그 많은 거인들 중에서 아카데미를 무력화하기 위해 대장군이 엄선한 녀석일 것이다.
별 볼 일 없는 놈으로 데려왔을 리가 없지.
‘쉽게 가진 않겠는데.’
하지만, 시안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결단 역시도.
* * *
대장군이 도착했다.
에버웨일 내의 모든 워프 게이트가 망가져 버린 상황에서 수십의 기사와 마법사들을 이끌고 불쑥 나타난 대장군 로데릭 발자크.
아마 모종의 방법으로 화염거인을 가져다 놓으며 워프석도 따로 갖다 놓은 모양이었다.
당당하게 영지 내를 가로지르며 들어오는 대장군과 병력.
영지민은 한껏 불만과 불안에 가득한 상황임에도 그들에게 끽소리 하나 하지 못하고 문을 걸어 잠갔다.
그들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아카데미에 입성했다.
“이게 무슨 짓인가, 로데릭 경.”
“오랜만입니다, 제레흐.”
제레흐가 가득 차오른 분노를 꾹꾹 내리누르며 로데릭을 맞았다.
승자의 여유인지, 본래가 오만한 성격인 것인지 로데릭의 눈빛은 그저 차갑기만 했다.
제레흐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쿵, 하고 지팡이로 땅을 짚었다.
그러자 지팡이 속에 들어 있던 검이 튕겨 나왔다. 그걸 단숨에 집어 제레흐가 검을 휘둘렀다.
―카가가가강!
그 일검에 로데릭의 뒤에 있던 기사들의 검과 마법사들의 지팡이가 모조리 잘려나갔다.
그들이 저마다 경악하며 몸을 떨었다. 무기만 잘려나가고 다른 모든 것은, 심지어 옷자락 하나 잘려나가지 않은 상황.
그들로선 대체 어떻게 했는지 상상도 되지 않는 요술이었다.
심지어 제레흐가 노린 것이 무기가 아닌 목이었다면……. 그런 상상을 하니 온몸에 오한이 들어왔다.
“제레흐. 제 기사들에게 손대지 마십시오.”
로데릭이 검 손잡이를 잡은 채 얘기했다. 검집에서 살짝 뽑혀 있는 그 검은 다른 기사들과 달리 흠집 하나 나지 않은 채였다.
“너야말로. 내 학생들에게 무슨 짓거리를 하러 온 것이냐.”
“아무 일도. 그냥 얌전히 이곳에 있어주기만 하면 됩니다. 제대로 포로로서 대우할 생각이니 걱정 마시길.”
“…….”
대놓고 감금하겠단 소리. 제레흐의 얼굴은 전혀 펴지지 않았다.
“당신이 학생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만큼 저도 제 부하들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잊지 말아주시길.”
대장군이 제레흐를 스쳐 아카데미로 들어갔다.
스치는 그 순간 제레흐가 손에 핏줄이 돋아날 정도로 강하게 검을 잡았지만, 결국 휘두르진 못했다.
1:1이라면 결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로데릭은 혼자가 아니었다.
마법사들 사이에 그가 있었다.
‘화염마탑주!’
하이마스터의 경지까지는 아니었지만 그 문을 두드리고는 있는 자.
로데릭과의 전투 도중에 그가 가세한다면 아무리 제레흐라도 필패였다.
그 사실을 알기에 로데릭의 걸음은 당당하기만 했다.
아카데미를 장악하고 포로로 쓸 학생들은 기숙사에 몰아넣는다. 그리고 이 영지를 침공의 교두보로 삼는다.
국경에서의 개전(開戰) 이후로 오늘까지 폐하가 그린 그림에서 단 하나도 엇나간 것이 없었다.
이대로 하나하나, 완벽히 작전을 수행해나간다면 제국의 승리는 필연이리라.
“…….”
그때, 광장을 지나던 그가 학생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시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