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15화
조금 전.
편지를 두 기숙사에 모두 보낸 에르제와 합류하여, 시안 일행이 아카데미를 나갔다.
정문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기사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지만 그에겐 시안을 막을 권리가 없었다.
제국의 학생들은 원하는 때 얼마든지 돌아가도 좋다고 로데릭이 허락했으니까.
도심지에 들어온 일행은 그대로 영지의 바깥으로 향했다.
“승산은 있고?”
도중에 헥토르가 가벼운 어투로 물었다.
시안이 슬쩍 그를 쳐다보았다.
“네가 보기엔 어떤데.”
“나?”
“거인과 싸워본 적 있어?”
“싸워본 적은 없는데.”
헥토르가 콧잔등을 긁으며 대답했다.
“싸우는 걸 본 적은 있지. 장난 아니게 난폭한 놈들이야.”
난폭하다라.
시안이 만났던 거인이라곤 아틀란타 하나뿐이다. 후회의 사슬에 싸여 무력하게 죽어갔던 그 녀석.
녀석을 떠올리면 난폭한 종족이라는 말이 잘 상상이 안 되긴 했지만, 아마 그 녀석이 특이했던 것일 테지.
‘얌전한 종족이었으면 다른 종족을 짓밟고 전쟁을 일으킬 리 없으니.’
두 사람이 지금부터 싸우게 될 거인에 대해 얘기하고 있을 때, 뒤쪽에선 알렌과 에르제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에르제, 정말 괜찮겠어? 거인들의 무덤은 위험한 곳이야.”
“알고 있어.”
“애초에 너는 따라올 이유가 없잖아.”
알렌이 납득이 안 된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르제가 왜 따라온다고 하는 것인지 알렌은 전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자신은 흑마법사와 거인을 찾고 싶어 그곳으로 향한다. 찾아서 죽이고 싶어서.
시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거인왕을 찾으러 간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에르제는 그들을 찾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유라면 있어.”
“있어? 어떤 이윤데?”
에르제가 앞쪽을 바라보았다. 헥토르와 나란히 걸어가는 시안의 뒷모습.
그녀가 알렌에게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비밀이야.”
알렌이 미간을 찌푸렸다. 의문이 풀리기는커녕 깊어만 가는 대답이었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시안을 비롯한 네 사람은 영지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생각보다 가깝군.”
그가 저 앞에 보이는 초원을 둘러싼 불의 장벽을 보았다.
그 사이에 붉은 화염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형체가 보인다.
화염거인 퀘른델.
일행이 가까이 다가가자 눈을 감고 있던 퀘른델이 천천히 눈을 떴다.
「뭐냐. 너희들.」
“퀘른델.”
퀘른델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처음 보는 인간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거슬리기라도 한 것일까.
그러나 녀석의 시안은 녀석의 기분을 헤아려 줄 생각은 없었다.
“한때 대륙의 패권을 노리던 종족이 지금은 제국의 개가 되어 나타나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그러자 퀘른델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건방진 녀석. 알지도 못하면서 지껄이지 마라.」
울분이 가득한 얼굴. 그 반응만으로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 자발적으로 돕고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강제로 조종하는 무슨 방법이 있는 건가.’
예를 들면 시안이 라비의 족쇄를 이용해 헥토르를 부리고 있는 것처럼.
거인들은 흑마법사나 황제에게 부려지고 있는 모양.
하긴 국경의 전쟁에서 제국은 거인을 전쟁병기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배신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으니 그렇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일 터.
“뭐가 너를 속박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시안이 오른팔을 들었다. 그곳의 각인에서 밤의 기운이 풀려나와 시안의 손에 들렸다.
퀘른델이 움찔거리며 불꽃을 피어 올릴 때.
“이제 그만 해방시켜 주지.”
시안이 크게 검을 올려쳤다.
치고 올라간 검격이 퀘른델의 어깨를 가르며 그 팔이 땅에 떨어졌다.
* * *
“설아야. 얘 정말 믿어도 돼?”
“응.”
평소답지 않게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어보는 언니의 질문에 유설이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연이 얼굴을 씰룩거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시안으로부터의 편지.
의심 하나 없이 그걸 믿는 유설의 모습이 무척이나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지금은 사적인 감정을 우선시할 때가 아니다.
그녀가 주위를 돌아보았다.
같은 고향에서 온 반요정의 동포들.
로데릭의 손에 의해 감금된 그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이 편지 한 장을 믿고서.
“화염거인을 쓰러뜨릴 생각이니 틈을 봐서 탈출하든 해라.”
무척이나 퉁명스러운 어투의 편지였다.
하지만 그 편지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제국의 기사들에게 감금된 지금의 상황에서 탈출할.
그녀가 기숙사의 창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화염거인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아직 건재했다.
“알았어. 저 거인한테 이변이 보이면 바로 출발하자.”
유연의 말에 유설과 다른 반요정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시각, 비슷한 일이 수인들의 기숙사에서 역시 일어나고 있었다.
“역시 시안 그놈은 데미안이랑 다를 줄 알았다니까!”
쿠르간이 씨익 웃으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화염거인의 동태를 보고 있었다.
“당연하죠! 스승님은 수인이라고 차별하고 그러실 분이 아니에요!”
“…….”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 변화가 없는 란과 그녀의 동생 샨.
그들 외에도 기숙사 내엔 많은 수인들이 있었다.
그들 역시 시안의 편지 한 장에 이렇게 모인 것이었다.
란이 그 편지를 다시 바라보았다.
편지라고 하니 새삼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
갓 입학했던 그때, 의무실에서 시안에게 두 통의 편지를 받았던 일.
‘그렇게 많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기껏해야 반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왜인지 무척이나 아련하게 느껴졌다.
그만큼, 이 반년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거인이 공격받으면 기사들도 당황할 테지. 그때를 틈타 달아난다. 여기 있어봤자 인질밖에 안 되니까 말이야.”
“예.”
“예!”
쿠르간의 말에 비스트 길드의 수인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길드 소속이 아닌 다른 수인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의 뜻을 비쳤다.
그들이 창밖의 거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거인의 팔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 * *
「크아아아―!」
퀘른델이 괴성을 지르며 남은 하나의 팔을 휘둘렀다.
시안이 놈의 주먹을 피해내며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동시에 그의 검이 발목을 베고 지나갔다.
쿵!
균형을 잃고 자세를 흐트러뜨리는 퀘른델.
헥토르가 씨익 웃으며 벼락을 쏘아 녀석의 무릎을 꿰뚫었다.
「이 잔챙이들이!」
퀘른델이 분노의 포효를 내질렀다. 녀석의 입에서 거대한 불꽃이 방사되어 시안과 일행을 향했다.
시안이 검을 바꿔 들었다.
검령, 창해.
그 물의 검이 소용돌이치며 방사된 화염을 모조리 흩어버렸다.
치익거리며 수증기가 피어올라 사위를 가리기 시작했다.
“헥토르, 우리 쪽이 감전되지 않게 조심해.”
“쉽지!”
헥토르가 뿔 달린 망아지마냥 전격을 흩뿌려대며 날뛰었다. 신기하게도 이 안개로 가득한 전장에서 그것은 아군 쪽엔 단 한 줄기도 오지 않았다.
시안이 다른 일행들도 바라보았다.
알렌은 푸른 화염을 일으켜 놈의 불꽃을 그대로 삼키고 있다.
알티마에게 저런 재주도 있었을 줄이야.
그리고 에르제는 몸을 숨겼는지 보이지 않았다.
검은 선 속에서 퀘른델에게 치명상을 입힐 단 한 번의 기회를 노리고 있으리라.
‘치명상이라고 하면.’
역시 그곳밖에 없겠지.
심장.
거인도 심장이 있고 그게 부서지면 죽는다. 아틀란타 때 이미 확인한 일이었다.
「크아아아―!」
그때, 놈의 잘려있던 오른쪽 어깨에서 불꽃이 꿈틀거리더니 순식간에 팔이 다시 튀어나왔다.
그 팔이 놈의 오른편에서 자리를 잡고 있던 알렌을 기습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알렌이 크게 당황했으나.
촤라라락!
시안의 창해가 쏘아지더니 녀석의 팔뚝을 감싸, 그대로 다시 끊어내었다.
「이 꼬맹이가!!」
두 번이나 팔이 잘린 것에 분노한 퀘른델이 다시 세 번째 팔을 생성했다.
시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녀석의 몸이 조금 줄어들어 있었다.
‘무한정 재생되진 않는 모양이군.’
뭐 당연한 일일 것이다. 무한히 재생할 수 있다면 그건 죽지 않는다는 말이었으니.
거인은 강대한 종족이긴 하였으나 불사의 종족은 아니다.
“고마워 시안!”
알렌이 크게 외치고는 다시금 놈에게 달려들었다.
녀석을 일별하곤 시안이 밤의 장막을 펼쳤다.
그동안 흡수한 영약과 흑마법사의 기운, 악마들의 기운, 그리고 아틀란타의 마나까지.
시안은 남들보다 월등히 많은 마나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 마나로 펼친 장막은 거대한 퀘른델을 모두 감쌀 정도로 컸다.
「어림없다!」
퀘른델도 두 눈 뜨고 가만히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녀석이 마구잡이로 불꽃을 휘두르며 시안의 오러를 태워갔다.
그러나 곧 놈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간단히 타버릴 것 같던 인간의 오러가, 타기는커녕 그대로 불꽃을 안은 채로 자신의 몸을 휘감아오고 있지 않은가?
「크악!」
휘감긴 밤의 오러를 매단 채로 녀석이 팔을 휘두르고 땅을 짓밟으며 시안 일행을 떨쳐내려 하였다.
고작해야 단 세 놈일 뿐인데, 그 세 놈에게 퀘른델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퀘른델의 시선이 땅에 있는 시안과 헥토르, 알렌에게 모두 쏠려 있을 때 에르제가 나무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거꾸로 오른 그녀의 신형이 달을 등지고 떨어져 내리며, 퀘른델의 가슴을 커다랗게 그으며 떨어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기습에 퀘른델이 크게 당황했다.
그런 놈의 벌어진 가슴 사이로 단단한 거인의 심장이 보였다.
“저거다!”
“내 거야!”
그 순간을 일행은 놓치지 않았다. 알렌이 손가락을 튕기며 불꽃을 쏘아냈고 헥토르가 날카롭게 정련한 번개의 창을 던졌다.
파파파팟!
푸른 불꽃과 자줏빛 전격이 퀘른델의 심장을 향해 쏘아졌다.
그러나 그 둘 사이로 쏜살같이 쏘아지는 것이 있었으니.
시안의 검이 만들어낸 검은 오러였다.
쌔애애애액!
아틀란타의 마나를 사용해 고체와 같이 단단히 뭉쳐진 검기가 바람을 가르며 쏘아져, 누구보다 먼저 퀘른델의 심장을 갈랐다.
알렌의 불꽃과 헥토르의 전격은 한발 늦게 도착해 심장의 잔해만을 지졌다.
쳇, 혀를 차는 헥토르와 숨을 내쉬는 알렌. 그리고 시안.
퀘른델이 부릅뜬 눈으로 시안을 바라보았다.
「커헉……! 네 이놈, 이 마나를 어떻게……!」
심장이 갈라지는 그 순간, 퀘른델은 느낄 수 있었다.
시안이 쏘아낸 검은 오러를 이루고 있는 마나가 인간의 것이 아닌 자신과 같은 거인의 것이란 사실을.
어떻게 저 꼬마 놈이 동포의 마나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
그러나 그 의문을 풀 만한 시간은 그에게 없었다.
화륵!
조각난 심장과 함께 무너져 내리는 퀘른델의 불꽃.
녀석의 눈에서 빛이 사라지며, 동시에 에버웨일을 두르고 있던 화염의 벽도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거기 누구냐!
동시에 뒤쪽에서 소란이 느껴졌다. 시안이 그쪽을 바라보았다.
도시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고, 그리고 꽤 많은 기사들이 말을 타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좋아. 도망치자.”
시안의 말에 일행이 빠르게 미리 말을 묶어둔 곳으로 향했다.
나무에서 말을 묶은 줄을 끌러내어 타고 오르려던 순간.
서걱!
네 필의 말의 목이 동시에 베어 떨어졌다.
“이게 무슨 짓인가, 시안 공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시안이 얼굴을 구기며 몸을 돌렸다.
그곳엔.
“대체 뭐가 불만이기에 이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
한 자루의 검을 쓸어내리는 대장군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