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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17화 (117/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17화

시안과 알렌, 에르제, 그리고 헥토르.

에버웨일을 빠져나온 그들은 곧바로 거인들의 무덤으로 향했다.

그곳은 워프 게이트 같은 건 없는 곳이라 오로지 말로 가야 했지만 그래도 그렇게 멀진 않았다.

애초에 에버웨일이란 도시는 대륙 중앙에 위치한 도시다.

도시를 나와 얼마간 말을 달리니 금세 거인들의 무덤에 진입할 수 있었다.

“켈드윈이라고 했던가? 그 도시가 여기 어디에 있다는 말이지?”

“응.”

끝없는 산봉우리들이 이어진 산맥 지대다.

봉우리를 하나둘 넘으며 그들이 조금 더 안쪽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켈드윈의 정확한 위치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대충 어느 부근에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입구에서 들어가서 산을 두 개 정도 넘고 나면 다른 산보다 배는 더 숲이 울거진 산이 나온다고 한다.

그 산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고.

“화전민들의 마을 같은 느낌인가?”

“그럴지도.”

숲에서 산다고 하면 아마 사냥이나 채집으로 자급자족을 할 테지만, 어쩌면 화전민처럼 곡식을 경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뭐가 됐든 사람 사는 흔적이 없을 수는 없으니까. 찾기 어렵진 않을 거야.”

그런 생각으로 산에 들어온 시안 일행.

하지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사람의 흔적이 아닌 마물들뿐이었다.

자이언트 앤트.

득시글거리는 마물들을 베고 태우며 시안이 사람의 흔적을 찾았다.

확실히 근처에 도시가 있는 것은 맞는지 흔적을 발견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개미들로 인해 다 짓밟혀 있었기에 그 흔적을 분석하거나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에 곤란해하던 중.

간신히 생생한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갓 흘린 핏방울.

개미들의 체액과는 명백히 다른, 아직 말라붙지 않은 핏방울을 찾았다.

그걸 따라온 결과 발견했다. 개미들에게 덮쳐지고 있는 사람을.

“간신히 사람을 찾았군.”

그게 바로 방금의 일이었다.

* * *

“어, 어어…….”

깜짝 놀란 듯한 사내를 앞에 두고 시안이 옆을 보았다.

여기저기 흩어진 개미의 잔해와 체액들. 동료의 사체의 냄새를 몰려들었는지 그새 또 개미들이 잔뜩 몰려들었다.

“알아서 와주는 건 편한데 뭐가 이렇게 많이 튀어 나오냐.”

옆에서 헥토르가 번개를 튀기며 불평했다.

그가 입술을 삐죽이고 있을 때 알렌이 먼저 움직였다.

[ 정화구역, 파(波) ]

그가 검을 옆으로 휘두르자 부채꼴 모양으로 푸른 불꽃이 터져 나갔다.

알티마의 불꽃이 자이언트 앤트의 마기를 모조리 태워버리며 개미들이 속절없이 쓰러졌다.

헥토르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알렌과는 반대로 그는 오히려 가느다란 전격만 몇 줄기 쏘아내고 끝이었다.

그러나 그 전격에 당한 개미들은 죄다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두 사람이 그렇게 해충을 잡느라 여념이 없을 때.

시안은 에르제를 대동하곤 사내에게 다가왔다.

“이름이 뭐지?”

시안이 묻자 사내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의 눈엔 시안의 뒤쪽에서 수십, 수백의 개미무리가 속절없이 쓰러져가는 것이 고스란히 들어왔다.

그리고 바로 앞엔, 저 살벌한 일행의 리더로 보이는 이.

그가 침을 꿀꺽 삼키곤 더듬더듬 얘기했다.

“티, 티스라고 합니다만.”

“시안이다.”

시안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티스가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시안이 재촉하듯 손을 움직이자 티스가 그제야 시안의 손을 잡곤 몸을 일으켰다.

“고, 고맙습니다.”

“많이 다친 것 같은데.”

“상처는 많긴 하지만 다 경상입니다.”

“그거 다행이군. 그나저나 이곳에 있다는 건 너는 그곳의 주민이란 뜻이겠지?”

“그곳?”

“켈드윈. 그곳을 찾는 중이거든.”

티스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긴장이 흘렀다.

이런 강해 보이는 이들이 어째서 켈드윈을 찾는 것이지? 혹시 누구를 쫓거나 잡으러 온 건가?

그의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켈드윈은 갖가지 사정으로 자국에서 도망쳐 나온 이들이 모여 있는 도시다.

하지만 티스의 눈에 비친 시안 일행은 모든 걸 포기하고 도망쳐야 할 정도로 약해 보이지도, 그리고 사연이 많아 보이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넷 모두 지나치게 젊었다.

“안내해 주면 사례를 하지.”

그의 경계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안이 얘기했다.

티스가 다시 한번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러면 또 얘기가 달라진다.

‘적어도 개미를 끌고 기어들어가는 것보단 훨씬 낫지?’

자신이 아니더라도 이들은 언젠가는 켈드윈을 찾을 것이다.

어차피 그럴 것이라면 자신이 안내하고 사례라도 챙기는 편이 좋겠지.

순식간에 그가 계산을 마쳤다.

상대가 방금 막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라는 것은 계산에 들어 있지도 않았다.

켈드윈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정도 이해타산은 필수였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생명의 은인의 부탁을 어떻게 거부하겠습니까.”

물론 말은 이쁘게 했다.

그가 실실 웃으며 켈드윈으로 향하는 길을 타기 시작했다.

‘잘 먹고 잘 자란 귀족의 냄새가 난다.’

정중한 말투는 물론이고 몸짓 하나에서도 느껴진다. 자신 같은 사람과는 다르게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예법을 교육받은 것 같은 모습.

어째서 그런 이들이 켈드윈을 찾는 건지는 몰라도, 그의 경험상 이런 이들은 자신의 말을 어기는 경우는 없다.

차라리 없는 사람처럼 무시를 하면 했지, 이렇게까지 얘기하고 사례를 떼먹는 경우는 없었다.

그가 눈을 빛내며 뒤따라오는 시안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저…… 사례라면 혹시 어떤…… 아, 그게 켈드윈에선 화폐를 쓸 수 없어서 말입니다. 보통 모두 현물로 거래하곤 합니다만…….”

시안이 그를 보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미 하지 않았나?”

“예?”

“네 목숨.”

티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왔다.

그것은 개미들에게서 목숨을 구해줬던 것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닌 다른 의미일 수도 있다.

티스는 후자의 경우를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그, 그랬었죠, 하하.”

그가 허튼 생각은 관두고 얌전히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 * *

조용해진 티스의 뒤를 따라 숲을 헤쳐 걸으며, 시안은 품속의 물건을 생각하고 있었다.

천에 싸여 있는 청동거울.

천 또한 마법이 새겨진 물건인지 거울이 자연스럽게 발하는 마나를 차단하는 기능이 달려 있었다.

‘결국 제대로 된 사용법은 알아내지 못했어.’

이곳까지 오며 틈만 나면 원시마법의 사용법을 연구했다.

그때 자신이 거울을 보고 느꼈던 깨달음. 그것을 다시금 불러낼 수 있다면 한 걸음 더 강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이후로 비슷하긴커녕 그 어떤 마법적인 현상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마나만 잔뜩 가지고 있는 쓸모없는 아티팩트였다.

‘마룡왕이 나를 쫓을 이유가 또 늘었군.’

안 그래도 자신을 사도로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사도인 파멜라가 자신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다.

이 두 이유만으로도 차고 넘치는데 하나가 더 추가된 것이다.

‘알고 받은 거긴 한데.’

물론 그것이 정말 싫었다면 거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안은 테일 교관에게서 원시마법을 받아들였다.

이 물건은 보물이었다.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 이상의 복을 가져다줄지도 모를.

‘마룡왕도 헥토르처럼 족쇄를 채운다면 편해지련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가능성이 없지도 않았다.

프시케의 말에 따르면 마룡왕 역시 프시케나 해령궁주와 같은 동급의 악마. 그들끼리는 서로 족쇄를 채우거나 채워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프시케에게 족쇄를 채운 라비의 능력은 마룡왕에게 통할 지도 모른다.

‘그걸 성공한다면.’

헥토르처럼 마룡왕을 자신의 수하로 부릴 수 있게 된다면.

제국은 물론 가주 역시 자신을 위협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이 베스트다. 그러나 시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무 가능성이 낮아.’

프시케는 라비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마룡왕은 정황상 해령궁주와 함께 칠흑마탑을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해령궁주는 라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는 모양.

그렇다면 마룡왕에게도 라비의 정보가 흘러갔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

심지어 그때 직접 대면하기도 했었고.

“저…….”

그때, 한창 생각에 빠져 있는 시안에게 티스가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도시가 점점 가까워지니 걱정도 많아지는 모양이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무슨 목적으로 켈드윈을 찾는 것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찾으시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시안 일행의 목적을 듣기 위해 적당히 지어낸 구실.

시안도 그가 적당히 얘기하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대답해 주었다.

딱히 목적을 숨기고 있는 것도 아니니.

“동쪽 끝으로 가볼까 해서. 켈드윈을 거점으로 동쪽으로 가볼 생각이다.”

“동쪽 끝으로요!? 거기는 사기도 제일 짙고 사람 사는 곳이 아니잖습니까?”

“내가 살러 가는 것도 아닌데 뭐.”

그건 맞는 말이다. 티스는 말문이 막혔다.

그리곤 조금 후, 도시의 누군가를 잡으러 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마음이 가벼워진 그가 이런저런 얘기를 꺼냈다.

“동쪽 끝이 목표시라면 켈드윈에 거점을 잡는 것보다 빙하백령 쪽에서 위쪽으로 도는 더 좋았을 텐데요.”

“위쪽으로 돌아?”

“그쪽의 해안선으로 쭉 도는 게 그나마 마물들을 가장 적게 조우하는 길 아닙니까.”

“너무 멀잖아. 해양마물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렇다고 그냥 가로질러 직진하기엔 이곳 상황이 많이 좋지 못한 터라…….”

티스가 얘기하는 것은 대륙에 있던 시안은 모르던 정보였다.

본래 거인들의 무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마물들이 엎치락뒤치락 영역 다툼을 하며 생태계를 이뤄오던 곳이다.

수많은 세월 동안 다퉈오며 극적인 균형을 이루고 있던 상태.

하지만 최근엔 균형이 깨졌다.

“자이언트 앤트가 다른 놈들을 죄다 바깥으로 밀어내 버렸습니다.”

오우거와 같은 힘도, 트롤과 같은 재생력도, 그 외에 다른 아무런 능력도 없는 자이언트 앤트.

그들이 뛰어난 점은 딱 하나뿐이었다.

번식력.

그러나 그 하나로 모두를 짓밟고 이 마물의 땅을 장악했다.

강대한 마물들조차 죽이고 죽여도 그 몇 배 이상이 몰려오는 개미들을 버티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가로지르기 힘들어졌단 건가?”

“예. 예전에는 마물들의 영역만 잘 파악하고 있으면 그 경계를 따라서 꽤 깊숙한 곳까지 갔다 올 수 있었죠. 실제로 왕년에 그런 방식으로 왔다 갔다 하던 노인도 있거든요. 그런데 이젠 그게 안 됩니다. 개미들의 영역을 가로지를 순 없어요.”

근래 이 근방은 완전히 개미왕국이나 다름없다고.

그 탓에 켈드윈도 도시를 더 뒤쪽으로 이동하는 문제로 꽤나 잡음이 심하다고 한다.

‘그런가.’

시안이 턱을 쓰다듬었다.

자세한 건 도시로 들어가 본 후에 다시 알아볼 문제였지만, 얼추 전체적인 상황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개미들의 영역을 뚫고 가는 건 제국에서 미친놈처럼 군대를 밀어 넣는 게 아닌 이상은 불가능할 겁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거인들의 무덤은 그 명칭 그대로 거인이 스러져 간 땅이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종족이었던 그들.

그런데 지금 그 땅을 주름잡고 있는 것은 가장 작은 종족인 개미들인 것이다.

뭐 일반적인 개미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놈들이긴 했지만.

‘어쨌든 개미들의 영역을 통과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말이군.’

일단 당면한 목표는 확인했다.

그를 위해선 정보도 더 얻어야 하고, 일행들과 상담도 해보고.

모든 것은 켈드윈에 도착한 이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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