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23화
시안이 자크와 함께 숲을 누비고 다녔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개미를 처리해야 할 정도였지만, 그들의 앞을 막을 수는 없었다.
“흐럇!”
자크가 오러를 일으킨 검으로 개미의 목을 베고 배를 뚫었다.
그가 그렇게 너덧 마리를 처리하고 시안 쪽을 보았다.
시안은 이미 개미들의 사체로 산을 쌓은 후였다.
“빨리 가지.”
“아, 응.”
자크가 그걸 보곤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도시 입구에서 이미 한번 제압된 일로 이들이 강한 일행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풍기는 기세만으론 예전에 보았던 마스터와도 비견될 정도였으니.
‘정체가 뭐지?’
그러다 보니 점점 더 정체가 궁금해져 왔다.
겉모습은 분명 그리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데, 그 나이에 이 정도 경지라니.
“이쪽 길은 괜찮아 보이는군. 위험한 지형도 없고, 뭣보다 날개 달린 놈들이 쳐들어오기 힘들겠어.”
자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시안은 임무에 철저했다.
캘드윈에서 파악하고 있는 에버웨일로 향하는 루트는 열 개도 넘었다.
그중 6개째를 확인하고 있는 참인데, 이 루트가 지금까지 중에 가장 좋았다.
‘날개 달린 놈들만 잘 막아도 안전성이 배는 올라가.’
시안이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그 점이었다.
이 루트는 거대한 거목들이 자라나 있어 그 가지와 잎으로 하늘을 가득 덮고 있다.
날개 달린 개미들을 완전히 차단하지는 못하겠지만, 상당수 막을 수 있으리라.
“나도 동감이다. 일단은 이쪽 길로 정해놓는 것이 좋겠어.”
자크도 주변의 거목들을 둘러보며 얘기했다.
이곳은 거인들의 무덤. 그 사기의 영향을 받는 것은 비단 마물뿐만이 아니다. 대륙의 것에 비해 풀은 훨씬 더 억세었고, 나무는 큼지막했다.
개중에서도 이 장소의 거목들은 주변 숲보다도 한층 더 컸다.
나무 한 그루의 둘레를 감싸는 데 몇 명은 팔을 벌려 안아야 할 정도.
“일단 나머지 루트도 확인하고 가지.”
“알았다.”
시안이 나뭇가지 사이로 조금씩 보이는 하늘을 보며 얘기했다.
아직은 새파란 하늘. 하지만 해가 질 때까지 그렇게 많은 시간이 남지는 않았다.
“조금 서두르지.”
“그래.”
해가 지기 전까지 모든 루트를 확인하려면 조금 빡빡하다.
시안과 자크가 다른 루트들을 확인하러 떠났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10개의 길을 모두 보고 온 두 사람이 다시금 예의 거수림 앞에 도착했다.
눈앞에 보이는 거인과도 같은 나무의 숲을 보며 시안이 얘기했다.
“여기가 최선인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나도 동감이다.”
이곳만큼 탈출하기 용이한 길이 없었다. 다른 길은 모두 하늘이 탁 트여 있거나, 너무 휑해서 개미들의 추격을 막기 힘들다.
시안과 자크가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도시로 귀환했다.
벌써 한나절 이상 지났다. 해는 이미 져 있었다.
“도시는 괜찮겠지?”
“하루 정도는 거뜬해. 거기다 네 동료들도 있으니까.”
이 정도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면 애초에 이곳에 정착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자크.
그러나.
저 앞에서 피어오르는 불길을 보곤 두 사람이 우뚝 멎었다.
“저 불은?”
“도시 쪽이다!”
자크가 기겁했다.
크기가 결코 작은 불꽃이 아니었다. 흡사 도시 전체가 타오르고 있는 것 같은.
“젠장할!”
자크가 욕지기를 내뱉으며 당장에 달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고작 하루 만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머릿속에 혼란이 가득 찬 그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위에서 떨어지는 인영을.
-카앙!
“허억!”
그걸 막아준 이는 시안이었다.
그가 ‘섬’을 밟고 달려와 자크를 습격하는 습격자를 쳐냈다.
놈이 멀찍이 날아가는가 싶더니 자세를 바로잡으며 착지했다.
“조심해. 아직 놈들의 영역이야.”
“고, 고맙다.”
짧게 얘기를 나눈 두 사람이 습격자를 바라보았다.
얼핏 보기엔 평범한 여성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붉은 눈. 검은 강철이 연상되는 반들거리는 피부에 입술 양쪽에 가로 방향으로 휘어진 송곳니와 같은 것이 달려 있다.
어딜 봐도 인간이 아니었다.
“여왕! 여왕개미다!”
“여왕? 저게?”
자크의 말에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확실히 개미가 연상되는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개미보다는 인간에 가까운 생김새였다.
“예전에 시장이 젊을 때 본 적이 있다고 했어. 여왕개미는 포식한 먹이의 육체를 재구성해서 무기로 쓴다고.”
“그렇다면 저건…….”
“녀석한테 먹힌 사람이 한둘이 아냐.”
지금까지 먹어온 인간의 모습을 이리저리 구현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소리다.
시안이 검을 들어 녀석을 겨눴다.
자크의 정보로 놈의 정체와 능력을 알았다. 다만 시안은 자크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악마의 기운이 느껴진다.’
여왕에게서 악마의 힘이 느껴지고 있다.
본래 악마의 힘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라비에게 의지해야 했지만, 이제 시안은 혼자서도 그 힘을 감지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흡수해 온 악마의 힘이 몇이던가.
‘그렇다면 속에 든 것은 여왕개미가 아니라 악마겠군.’
그가 그렇게 판단했다.
과거 그류페인 산에서, 에르제와 라비는 하이오크 아기의 몸에 강림한 악마와 싸운 적이 있다.
그때를 생각해 보면 개미의 몸에 강림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다.
자이언트 앤트를 통솔하는 여왕쯤 되면 어지간한 인간보다도 훨씬 유용한 육체일 테고.
“여왕은 지하 깊숙한 곳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왜 여기 있는 거야! 도, 도망가야 해!”
기겁하며 뒷걸음질 치는 자크를 내버려 두고, 시안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자크가 그런 시안을 보곤 움찔 떨었다.
“싸우려고?”
“넌 도시로 돌아가. 상황을 살펴보고, 여력이 있으면 도움을 불러라.”
자크가 몸을 떨었다.
대체 그게 무슨! 가뜩이나 무시무시한 여왕개미를 혼자서 막겠다니!
‘서, 설마.’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능성이 스쳤다.
설마 자신이 도망갈 수 있게 시간을 벌어주려는 건가? 목숨을 걸고?
자크가 감동이라도 받은 것 같은 눈으로 시안을 보았다.
그러나 시안의 눈에 담긴 것은 희생정신 같은 그런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투지(鬪志)였다.
“오히려 기회야.”
저놈을 잡으면 이 난리도 끝날 테니까.
그리 얘기하는 시안을 보며, 자크가 할 말을 잃었다.
* * *
자크가 뒤로 돌아 켈드윈을 향해 뛰었다.
그걸 보곤 여왕개미가 눈을 꿈틀거렸다.
이내 녀석의 한쪽 손이 변화하더니 기다란 송곳과 같은 것으로 변했다.
그러곤 땅을 박차 자크의 뒤통수를 노리고 찔러 들어갔지만.
-캉!
단숨에 사이로 파고든 시안의 검이 녀석의 송곳을 걷어냈다.
“금방 올 테니까! 승산 없으면 너도 도망가라!”
자크가 그렇게 한마디 하고는 도시를 향해 뛰었다.
그가 앞을 막는 개미들을 무차별적으로 베어가며 불타는 켈드윈으로 향했다.
남은 것은 시안과 여왕개미, 그리고 주위를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개미들.
“이름이 뭐지?”
시안이 놈을 향해 물었다. 여왕개미의 육체를 빼앗은 악마에게.
-이…… 름……?
그러나 놈은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더듬거리기만 할 뿐.
‘발성기관이 좋지 않은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시안이 검을 찔러 들어갔다.
그러나 여왕의 검은 머리칼을 스치기만 했을 뿐. 유효타는 먹일 수 없었다.
곧바로 반격하는 여왕개미.
시안이 찔러 들어오는 송곳을 왼손으로 꽈악 붙잡았다.
‘라비!’
‘웅!’
시안도 충분히 승산이 있기에 혼자 남은 것이었다.
녀석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악마라면 라비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란 자신.
이내 보이지 않는 무형의 사슬이 여왕개미를 감쌌다.
지옥의 섭리와 함께 탄생한 억압의 사슬.
‘이걸로 이 소동도 끝이다.’
여왕개미만 구속하면 이 사단도 끝이다.
그렇게 생각한 시안이었으나.
-캬아!
사슬은 여왕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녀석이 거칠게 시안의 손을 쳐내고는 발을 올려 찼다.
생각과는 다른 결과에 시안이 눈을 크게 뜨며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여왕의 등이 꿈틀거리더니, 날개가 돋아나 하늘로 날아올랐다.
‘사슬이 안 먹힌다고?’
허공에 뜬 채로 이쪽을 노려보는 여왕을 보며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어째서 사슬이 통하지 않은 거지? 녀석이 라비보다 서열이 높은 악마라도 되는 건가?
‘아니, 그건 아닐 텐데.’
그랬다면 방금 그 순간에 녀석이 라비를 역으로 구속했을 것이다. 자신을 구속하려다 역으로 묶인 프시케처럼.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녀석이 라비보다 높은 녀석은 아니라는 뜻.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 하나는 라비와 동등하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악마가 아냐?”
녀석의 정체가 지상에 강림한 악마라는 자신의 추측이 빗나갔다는 것.
하지만 악마가 아니라면 지금 이 순간에도 찐득하게 느껴지는 이 지옥의 기운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순간, 시안의 머릿속에 방금 자크에게 들었던 여왕개미의 능력이 떠올랐다.
‘포식한 대상의 육체를 사용한다.’
만약 그 능력을 이용한 것이라면.
녀석의 정체는.
“악마를 먹었군.”
여왕개미의 육체에 강림한 악마가 아니다. 악마를 먹은 여왕개미였다.
어떻게 녀석이 악마의 사체를 먹을 수 있었는지.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답이 나왔다.
이곳에 있다는 예의 흑마법사가 어떻게 조달해서 먹였겠지.
“쯧.”
시안이 혀를 찼다.
악마였다면 오히려 편했을 텐데, 그게 아니라 일이 어렵게 되어버렸다.
-키아!
그런 시안에게 여왕개미가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어느덧 녀석의 다른 한쪽 손도 송곳처럼 변해 시안에게 내리꽂혔다.
쿠웅!
시안이 각인에서 검륜을 꺼내 녀석의 송곳을 막았다. 동시에 쥐고 있던 검은 비검으로 바꿔 녀석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시안을 공격하느라 훤히 드러난 등을 향해 비검이 쇄도했다.
-키이!
카가가강!
그러나 그 등에서 나뭇가지와 같은 가시가 몇 개나 자라나더니 비검을 쳐내었다.
캉!
시안이 오러를 두른 검륜을 휘둘러 녀석의 팔을 잘라내려 하였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악마의 육체라 그런지 확실히 단단하군.’
일전의 강철 개미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도가 높았다.
반탄력 또한 장난이 아닌지라, 쳐낸 이쪽의 손이 부르르 떨릴 정도였다.
‘그렇다면.’
시안의 눈이 가라앉으며 여왕과 몇 차례나 검격을 나누었다.
앞에선 시안이 휘두르는 검륜이, 그리고 뒤에선 라비가 깃든 비검이.
앞뒤로 동시에 맹공을 펼치고 있으나 여왕개미도 만만치 않았다.
극도로 민감한 그녀의 감각은 보지 않아도 비검의 위치를 모두 들여다보듯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검격은 막을 수 있어도 막지 못하는 것이 있었으니.
‘단단한 걸 부술 때는.’
검륜과 비검 모두에서 줄기줄기 피어오르는 밤의 오러.
도화지에 먹을 칠하듯 그것이 공간에 퍼져 나가고 있었고, 십수 번의 검격이 이어진 후에는 이미 시안의 오러가 이 장소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단번에 끊어야 한다.’
모든 것을 끊어낼 압도적인 힘으로.
시안이 검을 들었다.
그러자 불길한 낌새를 느꼈는지 여왕이 움찔거렸다.
파지지직!
시안의 손에 들어온 비검이 휘어지며 세이버의 형태를 갖추었다. 검령, 뇌명.
벼락을 쏟아내는 그 검에 이곳에 펼쳐진 밤의 오러가 몰려들더니, 이윽고 검은 번개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
여왕이 크게 몸을 떨더니 곧바로 땅을 박차 뒤로 뛰었다.
해일과도 같은 개미들의 무리. 그 속으로 여왕이 몸을 피신했다.
그에 멈추지 않고 주변에서 개미들이 꾸역꾸역 앞으로 밀고 들며 시안과 여왕 사이에 방벽을 만들었다.
앞에 있던 개미들을 짓밟고 압사까지 시키면서도, 녀석들은 여왕의 명령에 따라 단단한 벽을 만들었다.
개중엔 예의 강철 개미 또한 수백은 포함되어 있었다.
그 벽을 향해, 아니, 벽 뒤에 숨은 여왕을 향해 시안이 검을 내려쳤다.
[ 상천검(霜天劍) - 천뢰(天雷) ]
검은 벼락이, 하늘을 뒤집으며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