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35화
빙하백령은 이 추운 땅에 박힌 한 그루 세계수에서 시작한 영지다.
세계수는 영지 곳곳에 뿌리를 뻗어 양분을 나누어주었고, 오랜 세월에 걸쳐 이 혹한의 땅을 생명체가 살아가기 충분한 양질의 땅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런 땅에 자리 잡은 반요정들에게 있어 세계수는 신성한 것이었으며, 다른 숲들 역시 세계수의 은총을 받아 자라난 귀중히 돌봐야 할 것들이었다.
사이한이 위치한 숲 역시 마찬가지.
특히 이곳은 세계수가 있는 만큼 빙하백령 내에서도 가장 철저하게 관리가 되는 곳이었다.
“들어와.”
“응.”
본디 덩굴과 나무뿌리로 막혀있던 숲의 입구가, 유설이 다가감에 따라 길을 연다.
그 진기한 현상에 헥토르가 눈을 크게 떴고, 거인왕은 여전하단 표정이었다.
반응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을 데리고 시안이 유설의 뒤를 따랐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한 나무 아래 지어져 있는, 유설이 지내고 거처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일행들에게 따뜻한 차 한 잔씩을 내어주며 유설이 시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제국이 부리고 있는 거인들을 땅에 돌려보내려 왔다.”
시안이 두 손으로 차를 들어 한 모금 마시며 얘기했다.
몸속도, 양 손바닥도 차의 따스한 열기로 한층 풀려왔다.
“거인들을?”
“응. 전쟁이 계속되는 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거든.”
정확히는 제국이 영향력을 넓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아그리드 후작과 헬레네 황녀. 자신의 앞길을 막을 가능성이 있는 두 사람이 모두 제국의 권력자들이 아니던가.
거기에 겸사겸사 악연이 많은 칠흑마탑을 쳐부수는 일까지.
해령궁주니 마룡왕이니 하는 녀석들과도 악연이 있는 만큼 거인들을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럼 에버웨일에서 도망치고 계속 거인들을 쫓아다닌 거야?”
“그런 셈이지.”
거인들의 무덤에서 개미들과 맞닥뜨리긴 했으나 그것도 결국 거인왕을 찾기 위한 일환이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보다 너는 어떤데? 네 언니가 집에 좀 오라고 하던데.”
“아…….”
시안이 그녀의 근황을 묻자 유설이 눈을 찌푸렸다. 그러곤 천천히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곤 해도 엄청나게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에버웨일에서 화염거인이 쓰러지고, 총장이 대장군을 막는 사이 유설은 유연과 다른 동포와 함께 빠져나왔다.
제국군의 추격이 붙긴 했지만 추격이 오래 이어지진 않았다.
자카르타의 수인 학생들 역시 빠져나간데다, 에버웨일에 상주하던 제국군에게 그 정도의 여력은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온 유설은 한동안 가문에서 전쟁을 준비하며 지내던 중.
“여왕의 부름을 받았다?”
“응.”
“왜?”
“그게…… 나도 잘 몰라.”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그녀의 근황에서 특기할 만한 일이 있다면 이 부분 뿐이었다.
듣기로 갑자기 여왕이 그녀를 불러 사이한에 머물게 하였고, 종종 보러 와 친하게 대해 준다고.
“너…… 들킨 거 아냐?”
“으음…….”
시안의 말에 유설이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헥토르와 거인왕을 보았다.
시안이 얘기했다.
“이쪽의 헥토르는 악마야. 뇌력천주라는 이름이지. 이 꼬마 놈은…… 아직은 말할 수 없지만 얘도 악마랑 연관 있는 놈이니까 괜찮아.”
시안의 말에 유설이 눈을 깜박이곤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어떻게 된 게 이런 이들만 동료로 데리고 다닌단 말인가?
프시케와 계약한 유설 본인이 할 얘기는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어이가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혹시 시안 너 칠흑마탑의 스파이거나 그런 건 아니지?”
“절대 아냐.”
시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의심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주변에 악마가 많긴 하다.
유설도 그냥 해본 소리였는지 이 이상 말하지는 않았다.
그보다 두 사람 다 악마와 연관이 있고 시안의 동료라면, 프시케에 대해서도 숨길 필요는 없었다.
“들켰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어. 프시케는 들켰을 리가 없다고 계속 그러긴 하는데…….”
[여왕 앞에서 힘을 쓴 적도 없는데 들킬 리가!]
“그런데 그거 말고는 여왕님이 나한테 관심 가질 이유가 없어서. 아 수호성으로 들어오라고는 하시던데.”
“수호성? 스카웃인가?”
“근데 거절했어. 아직 딱히 생각이 없기도 하고…… 전쟁이 끝나면 아카데미로 돌아가고 싶어서.”
“그렇군.”
아카데미라……. 확실히 겨우 1년 좀 넘게 다니다 일이 터진 건 아쉬운 일이긴 했다.
아직 그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지 못했는데.
‘그건 그렇고.’
시안이 생각했다. 프시케의 말대로 정말 들킨 게 아니라고 한다면 그러면 뭐 때문이지?
정말로 수호성의 스카웃 때문에? 아니면 그냥 말동무가 필요해서?
그러나 시안이 생각해 봐야 알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가 요정들의 여왕의 마음을 어떻게 추측할 수 있겠는가.
그 뒤론 잠시 다른 아이들에 대한 근황을 전했다.
알렌과 에르제와 잠시 동안 함께 했던 일. 그 일이 끝나고 둘은 제국의 크루거 가문으로 돌아간 일.
자카르타 쪽으론 가질 안아서 란이나 그쪽의 근황은 알지 못했다.
전쟁 중이니만큼 그쪽도 결코 평안하지는 않으리라.
“그래…… 그랬구나. 아, 한 잔 더 줄까?”
“부탁하지.”
찻잔을 다 비운 것을 발견하곤 유설이 차를 더 타기 위해 일어났다.
시안이 등받이에 몸을 묻자, 헥토르가 옆에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왜?”
“아까 프시케라는 이름이 들렸던 거 같은데……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잘 들은 거 맞아. 쟤가 프시케의 계약자거든.”
“엑.”
그 말에 헥토르가 표정을 와락 구겼다.
프시케는 지옥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악마다. 다시 말해 헥토르에게 목줄을 채울 수 있는 또 다른 악마란 말이었다.
헥토르의 입장에선 꺼려질 수밖에 없는 일.
그 마음을 알았는지 시안이 얘기했다.
“괜찮아. 프시케는 내 앞에선 나오지 않으니까. 아니, 정확히는 라비 앞에선 나오지 않는 거지.”
시안이 헥토르의 앞에 손을 펼쳐 보이자 검은 기운이 모여 라비가 나타났다.
동글동글한 작은 생명체를 보며 헥토르가 본능적으로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곤 살짝 뒤로 빠지며 물었다.
“그게 뭔 소린데? 그 무서울 거 없는 년이 왜 라비…… 님 앞에 안 나온다는 거야?”
“프시케도 라비한테 묶여 있거든.”
“……!”
그 말에, 이 땅에 강림한 이래 처음으로 헥토르가 최대로 경악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프시케는 최고 서열의 악마 중 하나인데!
“라비가 계승했다는 네메시스의 권능이 그런 거인 모양이지.”
시안이 그리 말하며 슬쩍 거인왕 쪽으로 눈을 돌렸다.
거인왕이 어깨를 으쓱였다. 자신도 잘 모른다는 제스쳐였다.
실제로 그에게 네메시스의 존재에 대해 자세히 물었었지만, 거인왕이 대답해준 것은 하나였다.
네메시스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 있어도 그 라비란 정령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 가는 게 없다고.
―녀석이 뒤지기 전에 후임 하나 만들어 놓은 거겠지.
들은 것은 그것뿐이었다. 단지 그것은 신빙성 있는 추측이긴 했다.
네메시스란 존재가 어떻게 최고위 악마들에게 족쇄를 채울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 힘이 있다면 죽기 전에 후계를 만들어 놓았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무슨 얘기해?”
그때 유설이 차를 가지고 돌아왔다.
시안이 헥토르를 가리키며 얘기했다.
“얘가 너한테 붙어 있는 프시케가 불편한 모양이야.”
“엑, 아, 아니, 딱히 불편하다는 게 아니라…….”
헥토르가 눈알을 굴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지금은 시안이 앞에 있다지만 언젠가는 자신이나 프시케나 시안에게서 벗어나는 때가 올 것이다.
인간과 악마는 가진 수명이 다르니까.
때문에 헥토르는 시안이란 방패가 있음에도 프시케에게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난 안 불편한데.]
“프시케는 안 불편하데.”
“아, 아하하. 그거 다행입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말고 얘기 나누십쇼.”
헥토르가 그리 얘기하며 가만히 구석으로 빠졌다.
시안이 고개를 저었다. 항상 시끄럽게 굴면서 더 강한 악마가 나타나니 꼬리를 마는 모습이라니.
평소 헥토르의 모습을 모르는 유설은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아까 하던 여왕님에 대한 얘기 말인데…….”
유설이 차를 나눠주며 그렇게 다시 운을 떼었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유설이 곧바로 일어서 문을 열었고, 열린 문을 통해서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자하니 인간 용병을 집에 들였다면서? 얼굴이나 한번 보러 왔단다.”
유설이 그녀를 보며 중얼거렸다.
“여왕님…….”
빙하백령의 여왕 가르시아.
인간을 차마 세계수의 안으로 들일 수 없던 그녀가, 시안을 직접 보기 위해 이곳까지 내려온 것이었다.
* * *
일국의 황제가 일개 민가에 개인적인 일로 직접 방문한다.
제국에선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빙하백령에선 달랐다.
요정여왕이란 직책엔 황제만큼의 권위적인 의미는 없었고, 반요정들이 그만큼 신분의 격차를 따지는 이들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가르시아는 비교적 자유롭게 궁을 나와 사이한에 방문할 수 있다.
물론 그 뒤에 호위를 위한 수호기사를 주렁주렁 데리고는 있지만 말이다.
‘저자는…….’
그중 한 명, 시안의 눈에 띄는 자가 있었다. 아까 마을 바깥에서 봤던 선임 기사였다.
그 역시 시안을 보고는 눈을 한 번 찡그려 보였지만, 굳이 말을 걸어오진 않았다.
“또 만났네요. 직접 보는 건 처음이죠?”
“예, 뭐.”
유 가의 지하에 있던 뿌리에서 얼굴을 보긴 했다. 그 외에 바람의 정령을 통해 여러 번 목소리는 전해 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다.
손을 뻗은 가르시아의 손을 잡고 시안이 악수를 나눴다.
“그쪽은 일행분이시군요. 보고는 받았습니다.”
헥토르와 거인왕에 대한 것도 이미 얘기는 들은 모양이다.
가르시아가 자연스럽게 테이블의 상석에 앉았다. 유설은 자리를 피해 시안의 옆으로 와 앉았다.
한편, 거인왕이 시안의 옆구리를 찌르곤 속삭였다.
“봐라, 모르지 않느냐.”
“그래.”
가르시아가 혹시나 거인왕의 정체를 꿰뚫어 볼까 걱정했던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과연 과한 걱정이었는지 가르시아는 거인왕을 보고도 일절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무리 거짓에 익숙한 사람이라도 눈빛마저 속일 수는 없는 법이다.
“굳이 직접 보러 올 필요가 있습니까?”
“그냥요. 그래도 힘든 저희들을 도와주시는 분인데 만나보는 게 예의이기도 하고.”
시안이 다소 안심한 표정으로 가르시아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내용은 별것 없었다. 전쟁에 대한 얘기. 거인의 처리를 도와주어 감사하다는 얘기. 아직 남은 거인이 어디 있나에 대한 얘기.
“그렇게 많이 남진 않았군요.”
“예. 제국군도 이젠 많이 힘든 모양인지 더 들어오지 못하고 있어요. 안 그래도 이곳의 기후는 평범한 인간들에겐 버티기 힘들 테니.”
조금씩 끝이 보인다. 제국에서 거인을 더 발굴해서 투입할지 아닐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현재까지는 잘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또…….”
그렇게 전쟁에 대한 얘기를 이어나가던 가르시아가,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빛나던 그녀의 눈에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며,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시선은 시안의 옆에서 천연덕스럽게 과자를 집어 먹고 있는 거인왕을 향했다.
돌변한 그녀의 분위기에 시안의 경계심이 한껏 올라갔고.
“……죽인 것이 아니었군요.”
그 말과 함께, 가르시아의 주위로 냉기가 모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