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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38화 (138/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38화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보이는 것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본래 시안이 있던 숲속과 똑같은 모습.

다만 달라진 점이 둘 있었다.

하나는 멀찍이 보이던 거대한 세계수가 이곳에는 없다는 것.

다른 하나는 색이 온통 흑백이라는 것.

“후우.”

시안이 한숨을 쉬었다.

봉인 안이라는 건 명백하다. 이 드넓은 공간에서 생명체라곤 오로지 그 혼자였다.

본디 숲은 가만히만 있어도 시끄러운 곳이다.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풀벌레들이 우는 소리.

그러나 이곳엔 오직 시안뿐이었다.

그 사실이 상상 이상으로 적막함을 불러왔다.

“어떻게 할까.”

떨어질 때 반드시 기어올라 주겠다고 맹세하긴 했지만, 솔직히 막막했다.

가르시아, 혹은 엘리아의 봉인의 술은 매우 고위의 술법임은 명백하다. 고대의 거인들도 지금까지 묶어놓을 정도로.

반면 자신은 마법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었다…….

‘그나마 희망이라고 한다면 원시 마법인데.’

시안이 품속에서 청동거울을 꺼내 보았다.

마나도 주입해 보고, 들어보기도 하고 여기저기 비춰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 반응도 없다.

결국 다시 품에 집어넣고는 그가 걷기 시작했다.

‘일단 탐색부터.’

가만히 있어봐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흑백의 숲속을 따라 걸으며 그가 이 안쪽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신경 쓰이는 점은 무수히 많다. 자신이 어디 다른 곳으로 날려 온 것인지, 아니면 엘리아가 만든 모종의 이계 같은 것에 갇힌 것인지.

거기에 바깥과의 시차가 얼마나 되는지도 신경 쓰이고, 무엇보다 빠져나가는 방법이 시급했다.

‘뭔가 단서라도 있으려나.’

그렇게 고민하며 주변을 관찰하던 그때.

바스락.

적막한 숲속에 누군가 풀을 밟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무언가 단서가 될 것이라는 반가움, 그리고 엘리아가 풀어놓은 적일지도 모른다는 경계심.

그 두 가지를 모두 가진 채 시안이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을 때.

“나니까 경계 풀어.”

“유설?”

유설이 수풀을 헤치며 나타났다. 하얀 머리의 반요정.

그런데 아까와는 전혀 옷차림이 전혀 달랐다.

무늬가 없는 단색의 편한 복장이던 아까까지와는 달리, 지금은 무늬와 장식이 많은, 나풀나풀한 옷을 입고 있다.

거기에 무엇보다 표정이 달랐다.

유설은 대부분의 상황에서 표정이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다. 반면 지금 나타난 여자는 누가 봐도 불만스러운 표정에 입술을 잔뜩 삐죽이고 있었다.

유설보단 오히려 유연과 닮은 모습.

“유설 맞아?”

덕분에 시안은 오히려 경계심이 더 커져왔다.

체형이나 얼굴 생김새는 유설이 확실한데, 복장도 갑자기 다르고 표정도 다르다.

무엇보다 봉인에 떨어진 건 자신 혼자인데 유설이 이곳에 있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혹여 엘리아의 함정이나 환상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에 검을 쥔 손에 힘을 넣고 있자니.

“당연히 아니지. 이건 계약자인 설아의 외형을 빌려서 이런 거고.”

그녀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얘기했다.

시안의 눈이 커졌다. 그 말인즉슨.

“프시케?”

“맞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지?”

가급적이면 보고 싶지 않았는데, 라고 중얼거리며 그녀가 시안의 검을 힐끔거렸다.

라비가 깃들어 있는 검.

시안이, 검을 집어넣진 않았지만, 살짝 힘을 풀었다.

“정말인가 보군.”

라비에게 무척이나 많은 신경을 쏟는 그 모습을 보니 정말 프시케가 맞았다.

지옥의 대악마 중 하나, 겨울의 뱀 프시케.

그녀가 계약자를 두고 시안과 함께 봉인 안에 뛰어든 것이다.

* * *

“여왕이 숲 전체를 봉인한다는 얘기가 퍼졌을 때, 설아가 바로 널 찾으러 갔어.”

프시케가 이야기를 하며 슬쩍 시안을 보았다.

시안의 품에는 방금까지 검에 깃들어 있던 라비가 본래의 모습으로 안겨 있었다.

“웅!”

“……!”

잠깐 장난기가 돌았는지 라비가 프시케를 보며 물 것 같은 흉내를 내었다.

그러자 프시케가 흠칫하며 순식간에 거리를 벌려 도망갔다.

시안이 쓴웃음을 지으며 라비를 쓰다듬었다.

“라비, 중요한 얘기 중이니까 얌전히 있어.”

“웅.”

프시케의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라비가 힘을 풀고 시안의 손에 기대었다.

그런 라비를 쓰다듬고 있자 프시케가 다시 살금살금 다가왔다.

“뒤는 뭐 별거 없는데. 기사들한테 물어서 네가 도망한 방향을 듣고 빨리 쫓아가서 발견한 것뿐이야.”

“네가 여기 있는 이유는?”

“널 찾던 중에 설아가 얘기했거든. 만약의 일이 있을 때 널 도와줬으면 한다고.”

“그래서…….”

“떨어질 때 잠깐 너한테 갈아탄 거지.”

대강의 자초지종은 알았다.

프시케의 얘기를 듣곤 시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고맙다는 말만으론 끝나지 않을 일이었다. 여왕의 뜻을 거슬러 자신을 도와주다니.

심지어 프시케까지 자신에게 붙여주면서 말이다.

“그럼 이제 본론이다만.”

프시케의 얘기를 모두 듣곤 시안이 본격적인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 봉인에 대한 것이었다.

이 봉인에 대해 아는 거라도 있는지, 뭐라도 좋으니 단서는 있는지, 혹은 탈출할 방법을 알고 있는지.

“몰라.”

그러나 프시케의 대답은 단호했다.

“몰라?”

“응. 나도 이런 건 처음이야. 대충 이면세계를 만들어서 거기다 가둬놓은 느낌인데, 이런 쪽은 나도 전문이 아니라서.”

“단서가 없는 건 마찬가진가…….”

시안이 끄응 신음을 삼켰다.

든든한 동료가 생긴 건 다행이다만 결국 처음과 별반 달라질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당분간 이곳에서 먹고 자면서 탈출 방도를 찾아야 하는 건가?

그보다 먹을 건 어떡하지? 당장 들고 있는 건량은 이틀 치밖에 없는데.

“근데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뿐이라면 못할 건 없어.”

“뭐?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여기서 나가는 건 할 수 있어. 나도 나름 믿는 게 있으니까 들어온 거지, 아무리 설아 부탁이라도 보험도 없이 이런 곳까지 따라왔을 리가 없잖아.”

시안의 눈이 반짝였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가 아닌가?

그런데 어감이 조금 묘했다.

나가는 것‘만’이라면 할 수 있다는 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

“혹시 뭘 제물로 바쳐야 한다거나 그런 얘기야? 나가는 건 가능하지만 몸 성히 나갈 수는 없다는 그런 뜻?”

시안의 얘기에 프시케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얘기가 아니라 출구에 대한 얘기야. 여길 나가는 건 괜찮은데 원래 있던 곳으론 못 가.”

“그럼 어디로 가는데?”

“내가 왔던 곳.”

프시케의 말에 시안의 눈이 커졌다.

그가 고개를 내려 손에 안겨 있는 라비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곤 다시 프시케를 보았다.

그녀가 왔던 곳이라고 한다면 설마…….

“지옥계. 내가 태어난 그 세계로 갈 수는 있어. 편도행이지만.”

* * *

그녀의 제안은 다소, 아니, 꽤 많이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자신의 힘이라면 지옥계의 문을 열 수 있다는 것.

아무리 그녀라도 문을 유지할 정도의 힘은 없지만 잠깐 통과할 정도는 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문을 열고 함께 지옥으로 가자는 것이, 그녀의 얘기였다.

“지옥계라니……. 내가 가도 괜찮은 곳인가.”

“안 될 거 뭐 있어. 나나 다른 악마들도 너희 세계에 마구 강림하고 그러는데.”

시안이 라비와 함께 판판한 돌덩이 위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를 프시케가 분주히 돌아다니며 돌과 나뭇가지 따위를 가져와 뭘 그리거나 배치하거나 했다.

시안으로선 하나하나가 무슨 의미인지 예측하기도 힘든 행동들이었다.

“……도와줄까?”

“됐으니까 가만히 앉아 있기나 해. 뭘 건드릴 생각일랑 추호도 하지 말고.”

시안이 얘기하자 프시케가 단박에 거절하며 으름장을 놓았다.

쓸데없이 움직였다가 모래알 하나 흐트러져서 마법진이 박살 날 수도 있다며, 시안에게 결코 움직이지 말라 엄포를 놓았다.

엉거주춤 일어서려던 시안이 그냥 가만히 다시 앉았다.

“그러니까 네 말은 먼저 지옥계 쪽으로 탈출한 다음에 본래 세계로 돌아가면 된다는 거지?”

“응. 근데 너는 악마가 아니라 인간이니까 계약 같은 편법으로 넘어가긴 힘들 거야.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다른 방법?”

“응…… 확실한 건 아니지만 몇 가지 생각나는 건 있는데. 하나만 일단 말해줄까?”

“말해봐.”

“마룡왕을 찾아가서 부탁하는 거. 그 할배라면 너희 세계로 넘어가는 방법쯤은 알고도 남을걸.”

마룡왕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시안의 표정이 썩어갔다.

그걸 보곤 프시케가 깔깔 웃었다.

그러나 이어진 그녀의 설명으로는 꽤나 가능성이 높은 방법이라고 한다.

지옥에서 마룡왕은 그 어떤 금은보화보다도 지식에 대해 극도로 탐욕스럽다고 한다.

마룡왕이 모르는 일이라면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 떠돌 정도라고.

“으음……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도록 하지.”

“아마 제일 확실한 방법일 텐데.”

“지금 그 녀석이랑 마주쳤다간 본래 세계로 탈출하는 게 아니라 녀석의 손아귀에서 탈출하는 게 문제가 될 수도 있어.”

“흐흐. 그러게 잘 좀 해놓지 그랬어.”

“대뜸 사도가 되라는데 뭘 잘해놔.”

“그 할배가 그런 말까지 했어?”

“어.”

시안의 말에 프시케가 사뭇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과거 아카데미의 사건으로 시안과 마룡왕이 마찰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마룡왕이 그에게 사도가 되라고 얘기했다는 건 처음 들었다.

“그러면 진짜 부탁하면 들어줄지도 모르겠는데? 그만큼 널 마음에 들어 했다는 거 아냐.”

“대신 본래 세계로 돌아갈 땐 녀석의 낙인이 찍힌 후겠지.”

“사도도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냐. 마룡왕 힘도 빌릴 수 있고, 네가 위험할 땐 도와주기도 할걸? 애써 찾은 사도가 객사했다간 우리 입장에서도 아쉽거든.”

“그래도 싫어.”

프시케는, 같은 악마라고 마룡왕의 입장을 대변해 주었지만 시안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묶이는 게 싫어서 위험을 무릅쓰고 후작에게서 탈출한 그다.

이제 와서 마룡왕의 사도가 된다?

후작에게서 벗어나서 마룡왕의 아래에 들어가는 꼴밖에 되지 않지 않은가.

“뭐 싫으면 어쩔 수 없지.”

그리 얘기하며 프시케가 땅에 박혀있던 돌멩이 하나를 뽑더니 바로 옆에 다시 박아 넣었다.

그러곤 허리를 펴며 일어섰다.

“끝!”

“벌써?”

“대강이긴 하지만 실수는 없어.”

그녀가 다시 한번 주변을 쭈욱 둘러보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시안의 머리 위에서 푸른 냉기의 구체가 생성되더니 천천히 떨어졌다.

이윽고 바닥에 떨어진 그것이.

파앗!

확 터져 나가며 냉기를 퍼뜨렸다.

프시케가 열심히 만든 ‘무언가’가 모조리 냉기에 뒤덮이며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시안이 바닥을 보았다.

놀랍게도 바닥에 차디찬 냉기로 이루어진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그냥 돌과 나뭇잎뿐이었는데.

“저거야. 들어갈 준비는 됐어?”

프시케가 한쪽을 가리켰다.

마법진이 모이는 끝자락에 허공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냥 가기만 하면 되나?”

“응.”

시안이 그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 옆에 프시케가 붙었다.

“아까 하던 얘기 말인데. 그래서 지옥에서 본래 세계로 돌아갈 다른 방법은 또 뭐가 있지?”

“나도 직접 본 적은 없는데, 그쪽과 이어져 있는 문이 있는 모양이야.”

“지금 네가 만든 저거 같은?”

“저건 임시로 만든 거라 금방 사라져. 지옥에 있는 그 문은 또렷하게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고 그랬어.”

이윽고 두 사람이 아지랑이 앞에 도착했다.

시안이 손을 뻗으니, 그 아지랑이 속으로 팔이 쑤욱 들어갔다.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시안이 물었다.

“그 문은 어디에 있는데?”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가장 그럴듯한 건…….”

“그럴듯한 건?”

“해령궁주의 심처에 있다고 해.”

시안이 집어넣던 팔을 잠깐 멈췄다.

해령궁주의 심처에 있다는 현계로 향하는 문.

‘그러고 보니.’

과거 벤델 영지에서 만났던 아틀란타. 놈의 기억이 떠올랐다.

가장 처음 거인과 계약을 맺었던 악마, 보다 정확히는 거인을 꼬드겨 계약을 맺게 했던 악마.

그게 해령궁주였다.

“뭐 마룡왕보단 낫겠지.”

그렇게 중얼거리곤, 시안이 아지랑이 속으로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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