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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54화 (154/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54화

귀마가 전신의 오러를 격발시켰다. 피가 빠르게 돌기 시작하며 온몸이 붉어진다. 올라오는 격통에 귀마의 표정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는 지금까지 이상의 신체 능력을 갖게 되었다.

‘빠르게 결판을 내야 한다.’

한 번 사용하면 전신의 근골은 물론 마나의 길까지 너덜너덜해지는 비기.

그렇기에 단기 결전에만 사용해야 하며, 그렇게 이긴다고 하더라도 수년은 족히 요양해야 되는.

그걸 확실히 이길지조차 알 수 없는 마룡왕을 상대하며 썼다는 것.

그가 정말로 목숨을 걸었단 뜻이었다.

[…….]

마룡왕에게 있어 그것은 처음 보는 기술이었지만, 금세 원리를 알아챌 수 있었다.

덧붙여 부작용도.

그로서는 시간만 버티면 쉬이 이기는 것이다. 귀마가 알아서 자멸해 줄 테니까.

[건방진.]

하지만 물론 그러지 않았다.

하찮은 인간을 상대로 시간을 끄는 그런 추잡한 방법으로 승리한다?

당장은 승리일지 몰라도 그것은 마룡왕에게 깊은 상처를 새길 것이다.

보이지 않고, 지워지지도 않을 그런 상처를.

그는 정면으로 귀마에게 맞섰다.

마력을 쏘아내고 공간을 터뜨리고, 기어이 운석까지 떨어뜨리며 지금까지 이상으로 마법을 운용했다.

그 둘의 싸움을.

‘…….’

시안이 홀린 듯한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특히 귀마의 움직임.

신체 능력이 올라간 것은, 단순히 귀마를 더 빠르고 더 강하게 만든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 힘과 속도를 이용해 귀마는 지금껏 없던 방식의 움직임을 보였다.

그것은 그 정도의 신체 능력을 가질 수 없는 시안에겐 따라 하지 못할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귀마의 움직임을 눈에 새기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그의 눈동자가 조여 오며 귀마의 걸음 하나, 칼질 하나조차 놓치지 않았다.

‘신호.’

거기에 귀마는 신호를 주겠다고 하였다.

그 말은 즉 마룡왕의 빈틈을 만들어 보일 테니, 결정타는 자신에게 맡긴다는 뜻.

그렇다면 그가 할 일은 저기에 끼어드는 것이 아니다.

마룡왕의 숨통을 끊을, 단 한 번의 일격을 위해 검을 벼리고 벼리는 것.

츠츠츠츠-

밤의 오러가 차츰 줄어들며 그의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것은 검은 구체가 되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구체의 안에서 시안은 귀마와 마룡왕을 관찰하며, 오러를 벼려 나갔다.

만년빙정의 힘에 밤의 오러를 곁들여, 단 한 번의 일검을 위해 갈고 닦는다.

그사이 귀마와 마룡왕의 상황은 차츰 변해가고 있었다.

“큭……!”

처음엔 분명, 일순간이나마 마룡왕을 압도했던 귀마다.

하지만 마룡왕이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대처하며 전투 양상이 다시 기울어갔다.

지지부진한 전투 상황.

이렇게 되면 급한 건 귀마였다.

“……!”

그 조급함이 독이 된 것일까?

귀마에게 지금껏 없던 빈틈이 드러났다.

[어리석은 녀석!]

마룡왕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용의 형상이었던 녀석이 순식간에 귀마에게 날아오며 그를 그대로 집어삼키려 들었다.

귀마가 이를 악물며 간신히 피했다.

피했으나,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검을 든 그의 팔이 마룡왕에게 완전히 뜯어 먹혔다.

단숨에 승기가 기운다.

검은 물론 주로 쓰는 팔까지 잃은 귀마.

그러나 그가 웃었다.

“별로 맛없을 텐데.”

[……!]

마룡왕의 입안에서, 귀마의 검과 오른팔에 깃들어있던 오러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귀마의 검은 마룡왕의 덩치에 비하면 혓바늘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오러에 잠재된 힘까지 그런 것은 아니다.

애당초 이것을 위해 귀마는 오른팔과 검에만 격발하는 오러를 모두 밀어 넣고 있었으니.

콰과과과광!

이윽고 그것이 터져나갔고.

오러에 씐 수백 수천의 칼 조각과 그리고 뼛조각이 마룡왕의 목구멍을 걸레짝으로 만들었다.

그곳엔 단단한 비늘도, 가죽도 없다.

마룡왕이 다급히 마나를 덧씌워 막아보려 하였으나, 귀마의 격발된 오러는 얇은 마나의 막 정도는 손쉽게 찢고 들어갔다.

[크아아아아-!]

마룡왕이 허공을 보며 크게 포효했다.

아무리 그라도 목구멍이 너덜너덜해지는데 참을 재간이 없었다.

그리고 그때, 숨어있던 시안이 뛰어올랐다.

‘신호란 게…….’

귀마를 관찰한 그는 알 수 있었다.

방금 귀마는, 원한다면 완전히 몸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팔을 먹힌 것이다. 지금의 이 빈틈을 만들어내기 위해.

그렇다면 자신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관통되어 얼음으로 억지로 막아놓은 배에서 극렬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는 그걸 완전히 무시했다.

오히려 그 통증을 이용해 몸을 바짝 조이며, 마룡왕을 향해 뛰어올랐다.

그리고.

-서걱.

빙정이 푸른 초승달을 그렸다.

빙정의 힘과 밤의 오러를 한껏 응축하여 날린 참격.

마룡왕의 목이 절반 이상 갈라지며, 폭포수처럼 피가 쏟아져 내렸다.

[컥! 커헉!]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만년빙정의 냉기가 마룡왕의 목에 남아 서서히 그에게 침투해 갔다.

흡사 독극물이나 다름없었다.

마룡왕이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목에선 피가 계속 흘러내리고 있다. 상처가 너무 깊다. 이것을 재생하려면 적지 않은 마력을 들여야 하리라.

거기에 침투해 오는 만년빙정의 냉기를 막는 것에도 실시간으로 마력이 들어가고 있었다.

비록 프시케가 그보다 약했다고 하지만, 그녀 역시 대악마다.

그녀가 수백 년을 쌓아 올린 힘은 간단히 밀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만전의 몸 상태라면 또 모를까.

그리고 더욱이.

아직 시안과 귀마 역시 멀쩡히 움직인다.

한 녀석은 배가 뚫렸고 다른 녀석은 오른팔을 잃었지만, 목을 잘린 자신보다는 상황이 낫다.

그런 녀석이 둘.

마룡왕이 눈을 감았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어쩔 수 없군…….]

그의 몸에서 빠르게 생명력이 빠져나간다.

더 이상 그는 목을 재생하는데도, 만년빙정의 냉기를 막는 것에도 마나를 소모하지 않았다.

쿵-!

녀석이 땅에 앉듯이 쓰러져 축 늘어졌다.

“…….”

“…….”

시안과 귀마가 그런 마룡왕을 보았다.

이걸로 끝인가? 지금 걸로 죽었어?

그럴 리가 없다. 그렇게 간단히 끝날 녀석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녀석의 몸에서 희끄무레한 무엇인가가 솟아나고 있었다.

“이건…….”

“허.”

아무리 두 사람이라도, 그것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뒤쪽이 비쳐 보이는 반투명한 상태의 그것. 그것은 마룡왕의 령(靈)이었다.

가망이 없는 육신을 버리고 령만으로 다시 나타난 것이다.

“젠장! 이렇게까지 해도 안 된다고?”

귀마가 얼굴을 찡그리며 욕설을 뱉었다.

이미 그는 오러 격발의 부작용을 겪고 있었다. 거기에 오른팔도 없고, 애용하던 검도 잃었다.

시안 역시 이마에서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 또한 중상인 것은 마찬가지.

귀마 만큼은 아니어도 오래 움직이진 못한다.

그러나.

[인정하지. 나의 패배다.]

마룡왕의 령에게선 더 이상의 투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 * *

당연히 믿을 수 없었다.

놈에게서 나온 패배 선언을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하지만.

‘방법이 없어.’

시안과 귀마에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영체 상태가 된 녀석을 타격할 방법이.

그냥 그저 그런 유령이었다면 그들의 오러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 격만으로 격퇴가 가능했을 테니까.

하지만 상대는 용의 영혼, 그것도 현존하는 가장 강대한 용인 마룡왕의 영혼이다.

오러만으로 처치할 순 없다.

‘하려면 마법이 필요한데.’

그러나 그들 중에 마법사는 없다.

거기다 애초에 마법으로 마룡왕을 처치하는 것 또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 어떤 대마법사라도 마룡왕의 앞에선 어린아이와 같을 것이니까.

[패배를 인정하지. 나의 힘도 이걸로 반으로 줄었다. 이 이상 낭비하고 싶진 않군.]

그런데도 녀석은 싸울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마룡왕의 힘의 절반은 그 강대한 육신에서 나온다. 그것을 버리고 영혼만 빠져나왔기 때문에, 녀석의 힘은 이미 반으로 줄어 있었다.

시안과 귀마 둘을 압도하기엔 모자란 힘.

거기에 육신을 잃은 그에게 마력이라 함은, 이 세상에 그의 존재를 유지시켜 줄 연료가 되어버렸다.

그런 귀중한 힘을 쓸데없는 전투에 날릴 수는 없었다.

“나더러, 그 말을 받아들이란 말이냐!”

[그럼 어쩔 거지? 네놈이 지금의 나를 죽일 수 있나?]

귀마가 한껏 이를 갈았으나 마룡왕의 말대로였다.

놈은 힘의 절반을 잃는 대신 귀마의 검이 닿지 않는 영체가 되는 것을 택했다.

[꼬마야. 너를 사도로 만드는 것도 이제는 포기하마.]

“…….”

그리고 시안에게도 깔끔하게 얘기했다.

지금까지 보였던 집착을 생각하면 납득이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놈이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너는 악마의 힘을 흡수할 수 있는 것 같더군. 내 육신을 내어주마.]

“……네가 말할 것도 없이 가져갈 건데.”

[그렇다 해도 내가 내어주는 것과 강제로 뽑아가는 건 다를 터.]

맞는 말이었다.

프시케의 힘이 담긴 만년빙정이 다른 검보다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는 건, 단순히 프시케의 힘이 압도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가 자진해서 내어줬기 때문에 힘을 흡수하는 데 있어 손실이 없었다.

[대신 한 가지 부탁하지.]

“부탁?”

[후일, 죽기 전에 너의 검을 내게 가져와 주지 않겠느냐.]

빈 정령의 검.

본디 정령의 힘을 담을 뿐인 C급의 아티팩트인 그것은, 프시케의 힘을 얻고 더욱이 마룡왕의 힘을 얻을 예정이다.

더 이상 C급 따위의 검이 아니다.

“내 검은 왜?”

[네 검에 담긴 세월을 읽고 싶구나.]

지옥계의 대부분을 알고 있는 마룡왕은, 본인이 알지 못하는 현계에 흥미가 있었다.

본래는 스스로의 날개와 발로 보고 관찰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네 검을 통해 읽는 것으로 만족하마.]

단순한 검이 아니다. 겨울의 뱀과 마룡왕, 두 대악마의 힘이 깃들었던 검.

그리고 그 사용자인 시안에게도, 마룡왕은 흥미가 있었다.

‘네메시스의 선택을 받은 아이라.’

그 아이의 인생이라면 당분간 얌전히 몸을 뉘고 있는 것에 대한 대가로는 충분할 것이다.

“한 가지만 더 들어준다면, 고려해보지.”

[뭐지?]

“현계로 가는 문을 열어줘. 나랑 프시케가 들어갈.”

[쉬운 일이군.]

마룡왕이 손을 그으니, 허공에 일렁이는 빛이 생겼다.

간단히 만든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간단하지 않은 마법.

거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시안이 라비에게 마룡왕의 육신을 먹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육신에 남은 잔존하는 힘을.

[현계 쪽은, 전쟁이 슬슬 끝나가고 있다.]

“전쟁이? 거인들은 어떡하고?”

그사이 마룡왕이 몇 가지 얘기를 해주었다.

[다시 살아난 거인들 대부분이 반요정과 수인들의 손에 죽었다. 머릿수도 한계가 있고, 그들도 무적은 아니니.]

“과거 세계를 지배하려던 종족이었다던데…….”

[그때는 거인들에게 우리들도 많이 붙어 있었고, 무엇보다 대륙의 인간들의 실력이 많이 올라왔어. 그때보다 마법도 검술도 아득히 발전했으니, 거인도 더 이상 그때만큼의 위협은 아니었겠지.]

그랬군.

충분히 납득이 갈만한 이유였다.

[해령궁주는 제국에서 손을 떼고 수인들의 영역에 숨어들어 갔다더군. 그 탓에 제국도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어졌다.]

“해령궁주가? 녀석은 어디 있지?”

[모른다. 녀석은 예전부터 뒤에서 살금살금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거든. 음침한 녀석.]

마룡왕의 말에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전쟁은 끝나고 있다고 하지만, 칠흑마탑은 아직 건재하단 소리였다.

결국 해령궁주를 처단하지 않는 이상 흑마법사를 완전히 쫓아내긴 무리였다.

대륙에 가장 처음 악마들을 불러 내린 것이 해령궁주였으니.

[끝났군.]

이윽고, 라비가 마룡왕의 육신에 남은 힘을 모조리 흡수했다.

마룡왕의 영혼이 건재하기 때문인지 새로운 검령이 생기진 않았지만, 검에 담긴 힘 자체가 근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아직 소화하기 전의 힘이라, 돌아가면 소화하는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나는 서쪽 끝에 있을 테니, 약속을 지킬 생각이 들면 언제든지 찾아와라.]

마룡왕의 령이 날아올랐다.

그러곤 떠나갔다. 서쪽. 해가 지는 방향을 향해.

녀석이 떠나자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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