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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58화 (158/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58화

날짜가 되어 아슬라 가에서 일단의 무리가 출발했다.

겐 아슬라를 비롯하여 호월족의 일원들이 수십 명씩 말과 마차로 에버웨일을 향해 움직였다.

거기에 아카데미에 다녔었던 란과, 본인의 희망으로 따라온 샨. 그리고 시안도 일행 중에 들어 있었다.

[이쪽으로 가는 게 가장 빠르다고?]

‘응. 갈 수 있다면 에버웨일을 관통하는 쪽이 제일 빠른 길이지.’

에버웨일은 대륙의 정중앙에 박혀 있다. 자카르타에서 올라가면 에버웨일이고, 그곳에서 더욱 올라가면 곧바로 빙하백령의 영역이다.

‘그리고 아마 빙하백령의 여왕이 올지도 몰라.’

[뭐! 그년이 온다고!?]

‘확실하진 않지만.’

종전을 위한 협정의 자리다. 여왕 본인이 오거나, 최소한 전권을 대리 받은 권력자가 오게 될 터.

만약 여왕 본인이 온다면, 그때 유설에 대해 알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년이 설아한테 뭘 하진 않았겠지?]

‘글쎄……. 날 감싸준 것 때문에 처벌을 받았을지도 몰라.’

[손가락 하나 댔어봐 아주 그냥!]

여왕이 시안과 함께 있는 거인왕을 발견하고, 갑자기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

빙하백령을 벗어나기 위해 도망치던 자신을 유설이 도와주러 왔었다.

그리고 여왕이 그것을 목격했었고.

그 때문에 감옥에 갇히거나, 혹은 더 심한 벌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프시케도 그걸 알고 있기에 이리 걱정하고 있는 것이고.

‘여왕 쪽도 문제는 문제지만.’

시안에게는 여왕의 일과 더불어 제국에 관한 문제도 있었다.

과연 제국 측에선 누가 올 것인지.

‘황제는 아마 안 올 테고.’

늙은 황제는 오지 않을 것이다. 황제는 이미 몇 년이나 황궁 밖을 나온 적이 없다.

아마 온다고 한다면 1황자, 혹은 3황녀 헬레네.

‘1황자 쪽이 가능성이 높긴 한데.’

이번 전쟁을 일으킬 때 가장 먼저 움직였던 것이 로데릭 대장군이다. 그 대장군은 1황자 측의 사람이었고.

그걸 생각해 보면 전쟁을 일으키는 데 1황자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을 터였다.

그렇다면 그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도 황자 본인이 찾아오겠지.

‘주의해야겠어.’

황자가 와도 마찬가지지만, 설령 구면인 헬레네 황녀가 와도 곤란한 것은 마찬가지다.

자신은 과거 대장군이 에버웨일을 장악했을 때, 제국 측에 칼을 들었던 인물이니까.

겐 아슬라가 그때의 일에 감사를 표하며, 제국 측의 압박은 자신이 막아주겠다고 얘기를 해주긴 했다.

하지만 그것만 믿고 있을 순 없는 일이다.

‘정신 바짝 차리자.’

에버웨일에 들어가, 제국 측을 피해 빙하백령 쪽에 접촉한다.

유설에 대한 정보만 빠르게 얻은 후에 에버웨일을 빠져나간다.

그게 가장 베스트였다.

마음 같아선 여왕에게 한 방 먹여주고 싶긴 했지만, 그건 때가 아니었다.

전쟁을 끝내자는 자리에서 그런 난동을 부렸다간, 새로운 전쟁의 불씨가 될 수도 있으니까.

과연 폭풍의 눈일지 고요의 평원일지.

그곳을 향해 시안이 말을 몰았다.

* * *

가는 길은 평온무사하기만 했다.

자카르타의 깃발이 걸려 있는 수십 필의 말과 마차.

심지어 그곳에 있는 것은 강인한 용병으로 유명한 수인족이다.

이런 일행을 보고 앞을 가로막을 간 큰 산적은 없었고, 가끔 지성 따윈 없는 마물들과 조우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몇몇 수인의 손에 피가 묻었을 뿐.

그러나 여행길이 조용하지만은 않았다.

혈기 넘치는 수인들은, 가끔 있는 쉬는 시간마다 휴식을 취하기보다 대련을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래 그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가주가 손님으로 끼워 넣은 한 인간 아이였다.

“다음은 나랑 하지!”

“오시죠.”

수인들은 선천적으로 인간보다 신체 능력이 높다.

그럼에도 그들은 딱히 인간을 경시하거나 하지 않았다. 인간들 중에도 그들과 맞먹을 만한 충분한 강자들이 많았으니까.

그러나 그런 그들의 눈으로 보아도 시안의 무위는 압도적이었다.

“저 아이가 그?”

“가주님의 목에 상처를 냈다던데?”

대련 중인 시안을 멀찍이서 힐끔거리며 수인들이 눈을 빛냈다.

가주의 몸에, 그것도 목 같은 급소에 상처를 내다니.

그것은 이미 나이의 많고 적음을 논할 수준이 아니었다.

평생을 수련해도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했으니까.

“흠.”

겐 아슬라도 육포를 뜯으며 그런 시안을 구경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시안과 대련을 하는 수인들 중에는 그의 딸 란과 아들 샨도 있었다.

‘참으로 신기하군.’

저 꼬마의 나이는 란과 똑같다. 그런데도 벌써 저렇게 완숙한 경지라니.

비록 그가 란의 아버지라곤 하지만, 안타깝게도 란은 시안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란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지금 저곳에 있는 이들 중에 시안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베르페드 놈한테 사람이 왔을 법하군.’

문득 예전에 영지에서 잡았던 제국의 첩자 하나가 떠올랐다.

첩자라곤 해도 녀석이 조사하던 건 아슬라 가의 전력이 아니었다.

영지에 시안 아그리드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을 조사하러 온 것이라 하였다.

한창 전쟁으로 온 대륙이 시끄럽던 그때, 저만한 재능을 가진 아들이 종적을 감췄으니 사람을 풀 법도 했다.

“적당히 하고 쉬게 해라. 먼 길을 가야 하니까.”

“네.”

대련으로 한창 끓어오르는 그곳을 보며 겐이 옆에 있는 수하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러곤 본인은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밥을 먹고 대련을 하고 이동을 하고.

그런 날이 몇 날 며칠을 계속해서 이어졌고.

일행은 별일 없이 무사히 에버웨일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제가 신세를 져도 괜찮을는지…….”

“아이 괜찮다니까. 가주님도 허락하셨는데 뭐가 문제야? 그냥 있어.”

오랜만에 돌아온 그리운 도시에서, 시안은 수인족들이 머무는 거처에 있었다.

여관 건물 하나를 통째로 빌려 겐 아슬라를 비롯한 다른 수인족이 모두 이곳에 짐을 풀었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이곳까지 오며 시안은, 거의 모든 수인과 싸워보았다. 그것도 몇 번이나.

그 덕인지 출발할 때에 비해 많이 친근하게 구는 그들이었다.

시안이 배정된 방에 짐을 풀고 나오니, 마침 같이 나오고 있는 란이 보였다.

녀석이 시안을 보곤 먼저 쓴웃음을 보냈다.

“아카데미, 망가진 그대로더라. 멀리서 봤을 뿐이긴 한데.”

“그렇더군.”

여관과 아카데미는 다소 거리가 떨어져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그곳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었다.

협정을 맺는 장소가 바로 그곳이었기에 허락된 몇 명을 제외하곤 접근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덕분에 멀찍이서 봤을 뿐이지만, 예전에 다녔던 우람한 건물과는 거리가 멀었었다.

“도망칠 때 부서진 이후로 안 고쳤나 봐.”

“딱히 고칠 이유가 없었겠지. 그럴 여유가 있으면 전쟁에 투입했을 테니.”

시안을 비롯한 다른 학생들이 대장군의 손을 피해 도망칠 때, 아카데미 건물도 많은 피해를 입었었다.

대부분이 대장군과 총장이 싸우다 무너진 것들이었지만.

“넌 어떡할 거냐? 이제 전쟁이 끝나게 됐는데, 아카데미 다시 다닐 거야?”

“일단 오기는 해야 돼. 총장님이 나한테 맡겨뒀던 물건이 있거든.”

제레흐 총장에게 받은 원시 마법. 그걸 돌려줘야 한다.

마룡왕의 힘을 얻은 지금의 시안에겐 별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그다음은?”

“글쎄…….”

그다음은 아직 결정하진 않았다.

원하는 쪽을 대보라고 한다면 당연히 다시 다니고는 싶다.

물론 대부분의 교관보다 지금의 자신이 강하긴 했지만, 아카데미는 전투만 가르치는 곳도 아닐뿐더러 제레흐 총장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란 것이 문제였다.

‘제국 측이나 그리고…… 후작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전쟁이 끝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화와 평온을 되찾게 되겠지만 시안은 아니었다.

그의 앞에는 아직 높은 산이 남아 있었다.

“제국이나 빙하백령에서 누구누구 왔는지 들은 거 있어?”

시안이 묻자 란이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빙하백령은 아직 안 왔다고 하고, 제국 쪽은 먼저 와 있었다더라.”

“누구?”

“1황자랑 대장군.”

역시 예상했던 대로의 인물들이었다.

“이번 전쟁에 1황자가 꽤나 열정적이었다고 들었는데, 속 좀 쓰리겠어. 제 손으로 종전 협정에 도장을 찍게 되었으니까.”

“그럼 3황녀 쪽이 차기 황제엔 더 가까워지겠군.”

“아마도? 나야 뭐 제국 정치는 잘 모르니까…… 네가 나한테 알려줘야 하는 거 아냐?”

“최근 제국 땅엔 들어간 적도 없어서.”

시안과 란이 대화를 하며 거리 밖으로 나섰다.

여관 바깥은 무척이나 고요하고 찌릿찌릿한 분위기였다.

호객을 하는 상인 따위는 전혀 없었고 민가 사람들조차 문과 창문을 걸어 잠그고 틀어박혀 있다.

간간이 보이는 이라곤 순찰을 나온 제국의 기사들뿐.

그들에게 달려들지 않도록 수하들을 달래는 데 겐이 꽤나 애를 먹고 있다고 한다.

“쯧.”

란 역시 결코 좋은 표정으로 그들을 보진 않았다.

수인들의 입장에선 멋대로 침략 전쟁을 시작했다가 제풀에 지쳐 떨어져 나간 것들이다.

좋게 봐주려야 봐줄 수가 없었다.

‘총장이 돌아와도 아카데미가 정상화되긴 힘들지도.’

수인들이나 반요정들이 제국에 가지는 반감은 상상 이상일 터였다.

그렇다고 제국을 배제한 채 수인과 반요정의 학생들만 복학시켜 수업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아마 총장은 지금쯤 머리를 꽤나 싸매고 있지 않을까.

‘내 코가 석 잔데 누굴 걱정하냐.’

총장 일은 총장이 알아서 하겠지. 지금은 일단 자신의 일부터다.

‘빙하백령 측에 여왕이 없다면 더 있을 이유가 없으니 바로 출발하자. 가기 전에 한 명 붙잡아서 정보만 살짝 얻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퇴로를 살폈다.

소란을 피우고 갈 생각은 없지만 혹시 모르니까.

그러던 중.

“어? 저기 좀 봐봐.”

란이 한 곳을 가리키며 얘기했다. 도시의 정문 쪽.

그곳을 보니, 하얀 정복을 입은 일단의 무리가 말을 타고 들어오고 있었다.

빙하백령의 수호성들이었다.

‘드디어 왔구나.’

시안이 눈을 빛내며 수호성들이 호위하고 있는 마차를 살폈다.

그곳에 올라와 있는 두 개의 깃발.

하나는 요정궁 빙하백령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왕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란. 잠시 이리로.”

“어? 왜?”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들을 구경하던 란을, 시안이 붙잡아 건물의 그늘로 숨었다.

란은 괜찮아도 자신은 그들과 마주할 수 없다.

여왕 본인과 마주쳤다간, 아니, 여왕이 아니더라도 수호성 중에 자신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이런 대로변에서 떡하니 마주쳤다간 또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게 분명했다.

“설마 여왕 본인이 올 줄이야…….”

“그러게. 난 수호성주나 그쯤이 올 거라 생각했는데.”

시안이 건물의 그림자 속에 숨어 대로를 지나가는 마차를 살폈다.

저 안에 여왕 가르시아가.

거인왕을 죽이고 자신을 봉인했던.

‘헥토르는 잘 도망갔나.’

아마 헥토르 역시 수월하게 도망치진 못했을 것이다.

그 모든 일의 주인공이 저 안에 있었다.

그렇게 시안이 날카로운 표정으로 마차를 살피고 있을 때.

창을 덮은 천이 흔들리며, 창가에 앉은 이의 얼굴이 살짝 보였다.

시안의 눈이 살짝 커졌고, 시안과 같은 것을 목격한 란 역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유설도 왔네?”

아무 일도 몰라 태연하게 얘기하는 란의 옆에서, 시안은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프시케의 시끄러운 소리가 머릿속을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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