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62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요즘 에버웨일의 분위기는 상당히 긴장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은 종전을 위한 협정. 즉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 에버웨일이야말로 마지막 전쟁이 치러지는 전장이라 할 수 있었다.
창칼이 오가는 것이 아니라 펜과 먹이 오간다는 점이 다를 뿐.
그렇기에 시안 역시 더욱 조용히 지내고 있는 것이다만.
‘그건 프시케랑은 상관없으니.’
그건 지상의 사람들의 입장일 뿐, 프시케와는 큰 관계가 없는 이야기였다.
그녀 입장에선 그냥 계약자에게 돌아가고 싶을 뿐인데, 별 상관도 없는 장해물이 앞을 막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까지 참은 것만 해도 많이 양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 가자.”
그래서 시안은 더 이상 막지 않았다.
그가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의자에 걸쳐 놓았던 검은 외투를 걸쳤다.
흔한 은장식 같은 것 하나 없는, 야간 활동에 최적화된 기능성 외투였다.
[너도 오게? 나 혼자서도 괜찮은데.]
“그 여왕이 있는 곳으로 가는 건데 뭔 일이 있을지 알고 혼자 보내.”
시안이 쓴웃음을 지으며 손목의 정령 각인을 그녀에게 보였다.
라비가 깃든 각인이었고, 그 라비는 프시케의 힘을 잘 흡수하여 빙정이란 검을 만들어냈다.
프시케가 힘을 잃은 것이 결국 자기 때문인데 어떻게 그런 곳에 홀로 보낸단 말인가.
[그래도 들키면 위험하다며. 괜히 그러지 말고 여기 있어.]
“괜찮아.”
더구나.
시안이 마룡왕과 싸움이 일어났을 때, 프시케는 놈과 싸울 이유가 하나도 없음에도 시안을 도와줬다.
그전에 해령궁주의 영역에 가겠다고 했을 때도 고민 없이 동행하겠다 했었고, 애초에 엘리아의 봉인에서 빠져나온 것 자체가 그녀의 도움이었다.
이런 마당에, 들키면 위험하다는 이유로 그녀를 내팽개칠 정도로 시안은 은혜를 모르는 이가 아니었다.
“안 들키면 돼.”
그가 창틀을 밟고 프시케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안의 뜻이 확고함을 알았는지 프시케도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그녀가 스르륵 기어와 평소처럼 시안의 팔목에 감겼다.
-탁!
일전과 똑같이 그가 밤하늘의 지붕 아래로 뛰어올랐다.
그리곤 엘리아와 빙하백령의 사절들이 묵고 있는 숙소로 향했다.
이미 두 번이나 가본 적이 있는 곳이기에 헤매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떡한다…….”
숙소의 맞은편 건물의 옥상. 굴뚝의 그림자에 숨어 앉아 시안이 고민했다.
여기까지는 경계가 없었기에 쉬이 접근할 수 있었지만 이 앞은 문제였다.
본래도 이 이상은 경계가 두터워지는 곳이었고, 뿐만 아니라 일전에 단검을 던져 창을 깨뜨린 일 때문에 더욱 경계가 강화된 것 같았다.
아무리 밤의 오러가 시안의 기척을 밤 속에 숨겨주고 있다지만, 다소 궁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여기까지면 됐어.]
“응?”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줘.]
프시케가 시안의 팔목에서 스르르 내려오더니, 입으로 스스로의 몸통 부분을 서너 번 비비었다.
그렇게 작은 비늘 하나를 떼어낸 그녀가, 비늘을 시안에게 건넸다.
“이건?”
[미약하긴 하지만 나랑 연결돼있는 비늘이야. 뭔 일이 있으면 이걸로 신호 보낼 테니까.]
정말로 큰일이 터진다면 연락을 할 테니 이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어달란 얘기였다.
시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비늘을 쥐었다.
“다른 기사들은 그렇다 쳐도, 여왕이라면 결계 마법을 몇 겹이나 설치해 놨을 것 같은데, 괜찮겠어?”
[날 뭐로 보는 거야.]
시안이 물어보자 프시케가 씨익 웃으며 얘기했다.
그래 봤자 작달막한 새끼 뱀의 모습이었기에 위엄이고 뭣도 없었지만…….
뭐 힘을 잃었다곤 하나 그녀의 격이 내려간 것은 아니다.
지옥의 대악마. 그 마룡왕과 같은 선에 놓이는 -비록 체급 차이는 있었지만- 녀석이니 결계 마법 정도는 훤히 꿰뚫어 볼 수 있을 테지.
[부수는 건 못하겠지만 들키지 않게 빠져나가는 정도는 충분해.]
“그래. 조심하고.”
시안이 지붕에서 내려와 땅바닥에 프시케를 내려주었다.
그의 배웅을 받으며 프시케가 남몰래 빙하백령의 숙소 쪽으로 접근했다.
* * *
‘흐음, 꽤 까다롭긴 하지만.’
과연 숙소의 주위에는 빠짐없이 결계 마법이 펼쳐져 있었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마력의 흐름이 프시케의 눈에는 훤하게 비치고 있었다.
숙소를 빼곡히 모두 가려버릴 정도의 마법진이 형형색색의 빛을 흩뿌리며 그 존재를 과시하고 있다.
그 모든 빛을 하나하나 피하고 우회하며, 프시케가 숙소 그들로 접근했다.
‘읏차.’
개중엔 화려한 빛을 발하는 마력과는 달리 프시케의 눈에도 극히 희미한 마력도 몇 종류나 있었으나, 모두 소용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단지 눈만으로 마력을 감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눈보다는 다른 감각 쪽이 훨씬 발달된 그녀였다.
그렇게 한동안 끙끙거린 끝에, 그녀가 건물 외벽을 오를 수 있었다.
‘저쪽 끝이었었지.’
유설이 있는 방은 이미 알고 있다. 예전에도 와봤고, 무엇보다 계약의 끈이 있으니 헤맬 이유가 없었다.
그녀가 외벽을 타고 기어올라 유설의 방에 달린 창으로 다가갔다.
다행히 환기를 위해서인지 창은 살짝 열려 있었다.
사람은 결코 통과하지 못할 작은 입구였으나 뱀인 그녀에겐 전혀 상관없는 얘기였다.
그 틈 사이로 그녀가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런데 그 순간.
“어?”
프시케가 강렬한 위화감을 느꼈다.
모든 것이 변화했다.
사방을 감싸던 마력도, 피부에 닿던 공기도, 그리고 눈에 보이는 풍경조차.
분명 그녀는 고급 여관의 방 하나에 들어온 것일 텐데, 기이하게도 눈앞에 보이는 것은 울창한 숲이었다.
울타리처럼 둘러싸여 있는 숲과 그 가운데에 위치한 사원.
‘여긴 어디지? 분명 방으로 들어왔는데? 그보다 설아는?’
가장 먼저 계약의 끈을 다시 더듬어 보고는, 프시케의 표정이 더욱 딱딱히 굳어왔다.
처음에는 함정 마법에 빠진 것인가 생각했다. 걸려든 적을 강제로 먼 곳으로 워프시켜 버리는 등의 함정.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런 것이라면, 유설과 이어진 계약의 끈은 그만큼 멀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방에서 감지했던 계약의 끈은 이곳에 제대로 있었다.
다른 곳으로 날려간 게 아니라, 프시케는 아직 그 방에 있다는 얘기였다.
‘가능성은 두 가지.’
하나는 정신 마법.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정신 마법은 한참이나 경지가 높은 이가 한참이나 격이 떨어지는 이에게 시행해도 성공률이 처참한 마법이다.
만약 엘리아가 그런 게 가능했으면, 마룡왕 따윈 진작 토벌하고 남았을 것이다.
그 외에 다른 가능성이라면.
‘공간 마법…… 즉, 봉인 마법.’
이미 한 번 겪어보지 않았던가.
시안과 함께, 숲이 통째로 이면공간에 갇히는 경험 말이다.
그 일이 이 방안에서, 직접 들어오기 전까진 눈치도 못 챌 정도로 정교하게 펼쳐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프시케가 일단 시안이 쥐고 있을 비늘에 신호부터 보냈다.
아직 자신의 존재가 엘리아에게 들키진 않은 것 같지만, 유설의 방에 이런 것이 설치되어 있는 것부터 이미 비상사태다.
차라리 여왕의 방이었다면 스스로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할 테지만, 유설의 방에 이만한 규모의 공간 마법을 펼쳐놓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프시케가 없다면 유설은 흔한 얼음화살 하나 만들어내지 못하는 평범한 여자아이에 불과한데.
-꿀꺽.
프시케가 침을 삼켰다.
과거의 그녀였다면 망설임 없이 깽판을 쳐놓았을 테지만, 힘을 잃은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지금의 그녀에겐 엘리아를 당해낼 힘이 없다.
그래도.
‘빨리 들어가 보자.’
여기까지 와서 뒤로 돌아갈 순 없었다.
오히려 왜 더 빨리 오지 않았는지 후회가 될 정도였으니까.
* * *
숲의 사원.
그곳은 아주 오래전 엘리아가 직접 세운, 오로지 그녀만의 사유지였다.
그런 사원에 지금은 한 여자아이가 누워 있었다.
더러움 한 점 없는 하얀 옷을 입고 제단 위에 누워 있는 그녀. 그 제단을 중심으로 빼곡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들은 결코 최근에 그려진 마법진이 아니었다.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전부터 하나씩 하나씩 그려져왔던 마법진들이, 세월을 증명하듯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가장 꼭대기에, 이번 세대의 새로운 마법진을 그리는 여왕 엘리아.
바깥은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 탓에 한창 시끌벅적하고 있지만, 그녀는 그쪽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지금 그녀의 목적은 오직 하나.
세월이 지나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가르시아의 몸에서, 다음 세대의 몸으로 기억과 영혼을 옮기는 것.
마룡왕과 조우하며 극도의 공포를 체험한 그녀가 택한 방식은, 그녀 스스로 쌓아온 방대한 지식과 세월을 다음 세대로 넘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런 것을 남긴다고 하여 후손들이 마룡왕을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녀만이, 천고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 이윽고 세상을 구한 영웅이 된 그녀만이 마룡왕과 맞설 수 있다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녀 자신을 온존하기로 선택했고, 이 숲의 사원과 영혼 전이 마법을 만들었다.
‘곧 끝난다.’
엘리아가 천천히, 정말로 천천히 한 끗 한 끗 마법진을 그려나갔다.
그것은 굉장한 섬세함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이미 같은 작업을 수십 번을 해왔음에도, 엘리아는 방심하지 않고 더욱 세심히 검토했다.
그러던 도중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유설을 바라봤다.
‘처음 봤을 땐 놀랐지.’
정확히는 처음 봤을 때는 별생각 없었지만, 지나고 다시 보니 놀랐었다.
가르시아를 대체할 다음 세대의 육신을 슬슬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한 엘리아는, 그 세대의 아이들을 모두 지켜보았다.
유진이나 유연, 유설을 비롯한 유 가의 아이들은 물론, 다른 주요 가문의 아이들까지 전부.
그러나 영 성에 차는 물건이 없었다.
그나마 유연이 가능성이 있어 보여, 이번 세대는 적당히 지나가고 다음 세대에 다시 걸어보자 생각하던 엘리아.
그런 그녀가 놀란 것은, 6살이 된 유설을 다시 보았을 때였다.
분명 갓 태어났을 때에는 아무런 재능도 힘도 없는, 도저히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라 여겨지지 않았던 유설이 6살 때부터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그녀의 힘 자체는 아직 보잘것없었으나, 힘을 받아들이기 위한 그릇이 넓어졌다.
동 세대의 다른 아이들 전부를 합쳐도 유설 하나만 못할 정도로.
‘이러면 영혼을 옮기고 다시 힘을 되찾을 시간이 많이 줄어든다.’
본래 한 사람의 그릇이란 그 육신에 비례하게 마련이라, 그릇이 작은 이의 몸에 들어가면 고생이다.
엘리아의 목적은 분명 세대를 거듭해가며 경지를 올리는 것임에도, 그릇이 작은 이에게 들어가면 이전의 경지를 되찾는 것에만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는 것이다.
하지만 유설같이 힘을 받아들이는 그릇이 크다면, 지금 자신의 경지 상당 부분을 유지하며 영혼을 옮길 수 있었다.
그렇게 유설을 눈여겨보기 시작한 그녀는, 전쟁이 터지고 유설이 아카데미에서 도망쳐 돌아오자 슬슬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먼저 그녀를 요정궁으로 불러들여 가까이 둔다. 그러면서 몸에 좋은 차라고 하며 각종 시약과 약재를 조금씩 섭취시킨다.
시약과 약재라고 하여 딱히 몸에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약이나 영약에 가까운 물건들이었다.
이제부터 자신이 들어갈 육신인데 나쁜 것을 먹일 리 없지 않은가.
‘전쟁 때문에 한창 혼란스러웠지만.’
오히려 이때야말로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동안의 경험상 평화의 시대보단 전란의 시대가 더욱 영혼을 옮기기 수월하다.
영혼의 정착에는 별 상관이 없지만 보다 현실적인 문제, 즉 여왕직의 계승에 있어선 한창 혼란스러울 때가 오히려 좋았다.
그렇게 결단을 내리고, 유설을 옆에 두고.
숲의 사원을 가동시켜 본격적으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1년여 남짓.
이제 그 결실이 비칠 때였다.
‘슬슬 비 가에도 얘기를 해둬야겠어.’
빙하백령의 귀족가문 중 유일하게, 그 가문만큼은 엘리아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 가문의 가주만이 알고 있는 것이지만.
애당초 비 가 자체가 현실적인 여러 문제를 쉽게 해결하기 위해 엘리아가 세운 것이기 때문이다.
유설의 몸으로 수월하게 여왕직을 계승하기 위해선 미리부터 해놓을 여러 작업들이 있었다.
그렇게 하나둘 해야 할 일을 정리해 가던 중.
“응?”
그녀의 손이 허공에 우뚝 멎었다. 있어선 안 되는 일이 감지되었다.
“…….”
엘리아의 눈빛이 스산하게 번뜩였다.
숲의 사원에 침입자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