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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64화 (164/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64화

터져 나간 폭풍의 여파가 인근의 흙과 나무들을 모조리 뒤집어엎었다.

폭풍의 진원지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났고, 그곳을 중심으로 나무가 모조리 반대쪽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 가운데에 시안이 서 있었다.

“시안 아그리드!”

엘리아의 눈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바로 조금 전 그녀는 이 공간, ‘숲의 사원’에 침입한 새로운 침입자를 감지했었다.

다만 눈앞의 프시케를 먼저 처리하자는 생각에 마법을 완성해 날린 것인데, 그 침입자가 설마 이렇게 빨리 난입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심지어 그 시안 아그리드라니.

“마룡왕뿐만 아니라 프시케랑도 아는 사이였나요? 아주 골고루도 붙어먹고 다니는군요.”

엘리아가 입을 씰룩거렸다.

그녀는 시안이 마룡왕의 사도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용납할 수 없는 일일진대, 프시케와도 친분이 있는 이였다니.

덕분에 그를 향한 살심만 더욱 짙어졌다.

“…….”

시안이 그런 엘리아를 보았다.

숨길 생각도 없다는 듯 살기로 가득한 눈빛.

다만, 지금은 프시케를 살피는 것이 먼저다.

엘리아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은 채 프시케에게 다가왔다.

지금 프시케는 시안이 한 번도 본적 없던 아이의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알아보는 것에 문제는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유설은?”

“저년이 감금하고 있어. 위치는 저쪽의 사원 쪽.”

프시케가 빠른 어조로 필요한 정보만을 얘기했다.

시안이 멀찍이 보이는 사원을 힐끗 바라보았다.

프시케의 비늘이 신호를 보내와 유설의 방에 들어왔을 때, 숙소가 아니라 이상한 공간으로 들어온 것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다.

엘리아가 유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다고.

그런데 설마 그게 진짜였을 줄이야.

“설아의 몸을 뺏으려고 하고 있어.”

프시케가 덧붙인 한마디로 마지막 의문까지 모두 풀려왔다.

몸을 빼앗는다.

어떻게 하는 것인진 모르겠지만 엘리아에겐 그게 가능한 모양이다.

‘그 힘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던 거군.’

어떻게 거인이 날뛰던 옛 시대의 영웅이 아직까지 멀쩡히 활동하고 있는가.

심지어 일국의 여왕이라는 중요 직책을 꿰찬 채.

그 비밀이 모두 풀렸다.

납득하는 시안을 보며 엘리아가 물었다.

“바깥은 제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을 텐데 어떻게 들어왔죠? 설마 다 죽이고 오셨나요?”

“그럴 리가. 그냥 기절만 시키고 들어왔다.”

유설의 방으로 들어오기까지 완전히 몸을 숨기고 들어올 수는 없었다.

때문에 대충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주치는 기사들은 모조리 기절시키면서 들어왔다.

사실 그것도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들키면 큰 소동이 일어날 일.

하지만 그래도 죽이는 것보단 나았다.

“어처구니가 없군요. 일국의 여왕이 묵고 있는 거처에 흙발로 들어오다니. 당장은 들키지 않아도 기절한 기사들이 깨어나기 시작하면 소란이 일겁니다.”

근엄히 얘기하는 엘리아였지만 그런 말에 꿈쩍할 시안이 아니었다.

그가 검을 들며 얘기했다.

“일어나기 전에 유설을 구해서 돌아가면 돼.”

그 말에 엘리아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그녀의 등 뒤 허공에서 수많은 얼음의 창이 생성되어 시안에게 떨어져 내렸다.

시안이 흑검을 백화로 바꾸어 휘둘렀다.

울컥 쏟아지는 하얀 불꽃이 얼음의 창을 모조리 휩쓸어 녹여 버렸다.

“프시케. 넌 유설을 구하러 가.”

“……여기는 부탁할게.”

시안의 말에 프시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하긴 했지만 엘리아의 상대는 시안에게 맡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설아를 구하러 가는 것이 최선이다.

그녀가 살짝 타이밍을 재고는, 빠르게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어딜!”

다람쥐마냥 쪼르르 튀어나가는 프시케를 보며 엘리아가 손을 들었다.

그러나.

-휘익!

시안이 오러 발판을 만들어 뛰어올라 엘리아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가가강!

그 검은 엘리아가 펼친 투명한 얼음벽에 막혀 버렸지만, 덕분에 프시케를 요격하려던 마법을 취소시킬 수는 있었다.

한 번 막힌 것에 굴하지 않고 시안이 몇 번이고 검을 휘둘렀다.

캉! 캉캉!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얼음벽이 푹푹 패여 나간다.

엘리아는 계속해서 마력을 보충하여야만 했고, 그러는 사이 프시케는 이미 시야에서 멀어져 있었다.

“쯧.”

엘리아가 혀를 찼다.

뭐 상관없다. 얼마나 거리가 떨어져 있든 약간의 집중할 시간만 있다면 바로 따라잡을 수 있으니까.

‘가디언도 배치해 놨으니.’

뿐만 아니라 사원엔 만에 하나를 위한 가디언도 배치되어 있다.

상격(上格)의 악마라고 하지만 지금의 프시케는 대부분의 힘을 잃은 상태.

가디언을 뚫고 들어가진 못하리라.

‘이놈만 처리하고 가면 된다.’

그녀가 땅 아래로 착지한 시안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마룡왕의 사도. 프시케와도 묘한 친분이 있는 흑마법사 놈.

어떻게 정화교단의 성녀를 속여 넘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눈을 피하진 못한다.

저 녀석은 지금껏 봐온 흑마법사 중에서도 가장 강하고 교활한 놈이 분명했다.

그녀가 시안을 노려보며 팔을 휘둘렀다.

쿠구구구구궁!

그러자 땅이 흔들리더니, 쩌저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단단한 대지가 파도처럼 출렁이기 시작했고, 시안은 파도 위의 부평초마냥 흔들렸다.

‘땅을.’

시안이 몸을 낮춰 균형을 잡고는 동시에 곳곳에 오러의 발판을 만들어 내었다.

마룡왕과의 싸움에서 귀마가 했던 것처럼.

그러곤 불안한 땅에서 벗어나 발판을 밟고 뛰어 올랐다.

적이 조종하는 대지에서 싸우기보단, 차라리 공중에서 싸우는 쪽이 낫다.

“여기라면 방해도 들어오지 않겠죠.”

그러니 이곳에서 완전히 없애버리겠다며.

마룡왕을 잡기 위한 제1보로 사도인 네놈을 먼저 처리하겠다며.

엘리아가 양 손을 짝 마주쳤다. 그러자 시안의 양 옆의 허공이 일렁이더니, 공간 자체가 압축되기 시작했다.

시안이 다급히 앞쪽의 발판을 밟곤 뒤쪽으로 뛰었다.

콰아앙!

방금까지 시안이 있던 장소가 무참히 압사되었다.

시안이 백화를 창해로 바꾸어 휘둘렀다.

촤르륵!

물줄기와 함께 풀려나간 검이 엘리아가 펼쳐둔 구형의 얼음벽을 휘감았다.

그걸 잡곤 시안이 솟아올라 그 위에 착지했다.

“감히…….”

자신을 감싸고 있는 얼음벽 위에 착지한 시안을 보곤 엘리아가 얼굴을 구겼다.

직접 밟힌 것은 아닐지라도 그에 버금갈 정도로 굴욕적이었다.

그러나 그에 아랑곳 않고, 시안이 검을 내려찍었다.

콰직!

파지지직!

벼락을 품고 있는 뇌명의 검이 얼음벽을 뚫고 들어가 전격을 흩뿌렸다.

그러나 엘리아는 이미 얼음벽을 버리고 도망친 후였다.

동시에.

“!”

콰과과과과광!

시안이 밟고 있던 얼음벽이 터져 나갔다.

순간적으로 반응하고 피하려 했으나, 그보다 빨리 터져 나간 탓에 얼음 파편들이 시안의 전신을 덮쳤다.

옷이 찢어지고 피부에 수많은 잔상처들이 생겨난다.

정말로 스친 상처는 밤의 오러가 스며들어 바로 회복하였지만, 개중엔 생각보다 깊은 상처도 있었다.

욱신거리는 고통에 시안이 눈을 찡그릴 때, 엘리아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공세를 이어갔다.

콰과과과광!

시안의 주변 공간이 차례차례 터져 나가며 시안을 내몰았다.

그의 검은 아직 엘리아에게 닿지 못했지만, 시안의 몸엔 하나둘 상처가 생겨나고 있었다.

“사도의 힘도 별거 아니네요.”

엘리아의 손에 파직거리는 벼락의 구체가 나타났다.

그녀가 그것을 하늘에 흩뿌리니 거센 천둥소리와 함께 온 대지에 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쿠구구구궁!

안 그래도 불안정했던 대지가 쏟아지는 벼락에 부서져 박살 났다.

엘리아가 펼치는 재해급 마법을 직격으로 받고 있는 대지.

그 위에 착지한 시안이, 푸른빛이 흐르는 백색의 검을 꺼내 들었다.

검령 만년빙정.

그가 그대로 검을 휘두르자.

-쩌정!

출렁거리던 대지가 그 모습 그대로 얼어붙었다.

새하얗게 얼어붙은 세상 속. 엘리아가 그걸 보며 표정을 굳혔다.

얼어붙은 대지를 밟고 시안이 검을 내려쳤다.

거대하게 솟아오른 냉기의 오러가 엘리아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큭!”

그녀가 다급히 얼음벽을 만들어 막아내려 하였으나, 소용없었다.

빙정으로 벼려낸 시안의 오러는 엘리아의 벽을 거침없이 뚫고 들어가 그녀의 몸에 상처를 내었다.

어깨부터 옆구리까지 이어지는 사선의 상처.

흩날리는 스스로의 핏물을 보며 엘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딱히 상처가 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피를 볼 정도의 상처를 입어보는 것이 대체 얼마만의 일이던가.

시안이 멈추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동시에 엘리아에게 검기의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정반대의 상황.

검기를 막고 몸을 비틀어 피하며, 엘리아의 등에 땀이 흘러내렸다.

‘생각보다…….’

생각보다도 더 강했다.

그 사실에, 그런 생각을 자신이 품었다는 사실에 엘리아가 뿌득 이를 갈았다.

마룡왕 본인도 아닌 고작 사도일 뿐인 녀석이!

그러나 마음과 달리 그녀는 좀처럼 시안의 공격을 받아칠 수가 없었다.

“…….”

본디 안 그래도 시안은 마법사를 상대하는 것이 특기였다.

어릴 때부터 항상 해왔던 것이 염노와의 대련이었으니.

거기에 그에 그치지 않고 지옥계에서 마룡왕까지 상대하고 왔다.

비록 귀마와 프시케까지 낀 1:3의 싸움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 경험이 모두 시안의 안에 녹아 있었다.

‘엘리아 여왕.’

확실히 지금껏 봐왔던 마법사들 중에선 가장 뛰어나다.

하지만 그 거대했던 용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마룡왕에 비하면 별거 아니군.”

시안이 그리 얘기하자, 엘리아의 눈이 순간 붉게 충혈되었다.

발끈한 그녀가 마력을 모아 술식을 자아내는 순간.

시안이 빠르게 그녀와의 거리를 좁혔다.

[ 상천검(霜天劍) - 천뢰(天雷) ]

그리고 그녀에게, 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빙정으로 펼친 천뢰. 거대한 백색의 번개가 엘리아를 향해 쇄도했고, 그에 엘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죽는다.’

그 생각만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과거 영혼 전이를 완성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

죽음이란 단어는 그녀와 가장 거리가 먼 단어였다.

그런데, 자신의 삶에서 가장 멀어졌다고 생각한 죽음이 지금 이 순간 시안의 검에서 느껴졌다.

마치 과거 마룡왕을 처음 봤을 때처럼.

‘더 이상…….’

아끼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녀의 눈에서 안광이 터져 나왔다.

아주 오래전, 세계수에서 도려내 삼켰던 세계수의 정수.

그것이 그녀의 몸속에서 폭발적으로 뿌리를 뻗기 시작했고.

“!”

세상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 * *

프시케가 전력으로 달렸다.

이윽고 사원에 도착한 그녀. 거기서 비로소 잠시 숨을 고르고는, 그녀가 입구로 뛰어 들었다.

그러나.

-쾅!

“악!”

들어가자마자 큰 충격파에 휩쓸려 튕겨 나갔다.

작은 몸인 만큼 크게 날아간 그녀가 허공에서 빙글 몸을 돌리곤 착지했다.

전신이 삐그덩거릴 정도로 충격이 오긴 했으나,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체 뭐야!?”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이거 또 자그마한 손님이 오셨군.

저 높은 천장에 닿을 정도의 거인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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