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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68화 (168/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68화

두두두두두!

세계수의 뿌리가 마구 뻗어 나가며 시안 일행을 덮쳐왔다.

아니, 사실은 조금 다르다. 일행‘만’을 공격한 것이 아니다.

자라난 세계수는 일행뿐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부숴버리려 날뛰고 있었다.

딱히 특정한 누군가에게 적의를 가지는 것이 아닌, 주위의 모든 것에게.

울부짖는 아이와 같이 마구잡이로 날뛰고 있었다.

“큭!”

그야말로 재난이나 다름없었다.

엘리아나 세르쥬를 상대할 때는, 그래도 스스로의 힘을 잘 통제하는 이들과 싸우는 것이었는데.

자라난 세계수는 그렇지 않았다.

본인의 힘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통제할 생각이 없는 것인지.

스스로 뿌리내린 땅을 부수고 사원의 잔해와 숲 전체를 갈아엎어 양분으로 삼으며, 태양을 가리며 이 땅에 어둑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피아의 구분이 없는, 그야말로 자연재해와 같은 상황.

“도망치자.”

시안이 기절해있는 유설을 들쳐 메고, 프시케와 함께 급박하게 몸을 피했다.

그의 뒤를 따라오며 프시케가 물었다.

“어디로? 바깥으로?”

“응. 여기 있다간 진짜 큰일 날 것 같아.”

이 땅 전부를 향한 세계수의 공격은 물리적인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하얀 가지가 공간 자체를 파고들며 잠식하고 있다.

이미 쩌적거리며 공간 곳곳에 금이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프시케, 출구가 어딘지 알아? 처음 왔던 장소로 돌아가면 돼?”

“잠깐만.”

프시케가 정신을 집중하며 현계로 돌아갈 출구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본래는 엘리아가 각종 마법으로 가려놓았던 출구였으나, 그녀가 죽은 지금 그 마법들은 별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마법의 잔해만큼은 그대로 남아 있었기에, 진짜 출구를 찾기 위해선 다소의 시간과 집중력이 필요했다.

-쑤욱!

그때 굵은 뿌리 하나가 그들을 정통으로 덮쳤다.

출구를 찾는다고 잠시 멈칫했던 틈에 피하기 힘든 경로로 날아든 것이다.

서걱!

시안이 검을 들어 뿌리를 잘라내었다.

그러자.

-쿠구구구구궁!

한층 더 땅의 진동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동시의 뿌리의 움직임도 더욱 거칠어졌다.

“화난 거 같은데?”

“그렇다고 맞아줄 순 없잖아.”

프시케의 얘기에 시안이 어쩔 수 없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더욱 발광을 하는 뿌리들을 피하며 프시케가 출구를 찾았다.

현계로 빠져나가기 위한 공간의 틈새.

그러는 와중에도 그들을 향해 쇄도하는 뿌리들은 여전했고, 시안은 몇 개의 뿌리를 더 잘라내야 했다.

동시에 세계수의 가지가 이 공간을 완전히 깨뜨려 버리기 위해 점점 뻗어 나가고 있었다.

‘빨리 찾아야 해.’

그걸 보며 프시케가 식은땀을 흘렸다.

세계수에 의해 강제로 공간이 파괴된다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운이 좋다면 그대로 현계로 돌아가게 될 수도 있지만, 나쁘다면 영원히 이곳에 갇히게 될 수도.

그렇기에 그녀가 눈이 벌게져라 집중하여 출구를 찾았다.

그리고 이내.

“찾았다!”

엘리아가 만들어 놓은 출구를 발견했다.

시안이 프시케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전력으로 뛰었다.

유설을 등에 업고, 그걸로도 모자라 프시케도 옆구리에 안아 들고 뛰고 있었다.

쩌적!

그 순간 뒤쪽에서 불길한 소리와 함께, 하늘 전체가 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왔다.

세계수가 본격적으로 이 공간을, 엘리아가 세계수의 정수를 뽑아 만든 이 땅을 부숴버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빨리! 빨리!”

옆구리의 프시케가 재촉했고, 시안이 더욱 속력을 올렸다.

이윽고 일렁이는 듯한 느낌의 게이트 속으로 몸을 던져 넣었고.

카가가가가강!

그 직후 하늘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깨져 나가는 공간을 뒤로한 채 시안과 프시케가 게이트 속에 몸을 맡겼다.

다음 순간, 그들은 숙소에 있는 유설의 방에 와 있었다.

숲의 사원에서의, 땅과 하늘이 뒤엎어지는 결전이 무색하게, 방은 조용하기만 했다.

심지어 시안이 경비를 서던 수호기사들을 기절시켰다는 것조차 들키지 않았는지, 사방이 잠이 든 듯 고요했다.

“후우…….”

“하아…….”

시안과 프시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룻밤 새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리고 내일부터도 사라진 여왕의 소재 탓에 또 많은 일이 있을 예정이지만.

어쨌든 끝이 났다.

그들은 무사했고, 유설도 상처 없이 구출해 낼 수 있었다.

“그러면, 나는 일단 돌아갈게.”

시안이 유설을 침대에 눕히고는 프시케에게 얘기했다.

기절한 수호기사들이 깨어나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게 들킨다면 문제가 더욱 커질 수 있다.

“응. 수고했어.”

프시케는 당연히 유설의 곁에 남을 생각이었다.

뱀의 모습이면 들킬 리도 없고, 유설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니.

작게 이별을 나누고 시안이 창틀에 발을 걸쳤다.

그런데, 그렇게 훌쩍 뛰어내리려고 하던 그때.

-콰직!

방 안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안이 창틀에 그대로 발을 올린 채로 고개를 돌렸다.

방의 한가운데, 그 공간이 금이 간 듯 깨어져 있었다.

“설마…….”

프시케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시안의 얼굴도 덩달아 굳어왔다.

이거 혹시.

-콰직! 콰지지지직!

허공의 금이 일파만파 퍼져가며, 그곳에서 하얀 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프시케가 다급히 유설을 향해 몸을 던졌고, 그 두 사람을 시안이 끌어당기며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직후.

-콰과과과과광!

거친 폭발과 함께, 숙소 전체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엔 갑작스럽게 현계에 등장한, 하늘까지 닿을 듯한 거대한 하얀 나무가 있었다.

* * *

“뭐야!”

“적습인가!?”

가장 먼저 난리가 난 것은 당연히 숙소를 쓰던 빙하백령의 사절단들이었다.

갑작스럽게 무너져 내린 숙소에서 그들이 다급히 빠져나왔다.

잔해에 갇혀 있는 사절들을 수호성의 기사들이 황급히 구출하며, 사태를 파악하였다.

다만 상황 파악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그들 중 누구라도, 거대하게 자라난 하얀 나무를 보지 못하는 이는 없었으니.

“저건…….”

“설마…… 세계수?”

“그럴 리가! 빙하백령에 있어야 할 세계수가 왜 여기에 있어!?”

하얀 나무의 정체를 알고 있는, 세계수와 가까운 그들이었기에 패닉은 더욱 컸다.

분명 북쪽 땅에 있어야 할 그 거대한 나무가 왜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심지어 그것은, 그들이 아는 세계수처럼 얌전한 것이 아니었다.

-콰과과과광!

숙소를 모조리 부숴놓은 후에도, 그 뿌리들은 미친 듯이 날뛰며 주변을 마구잡이로 공격하고 있었다.

빙하백령의 반요정들은 차마 가까이 가지 못한 채, 멀찍이 떨어져야 했다.

그들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여왕님은! 여왕님은 어디 계시지!?”

이 난리 통에서 가장 먼저 다른 이들을 달래고 수습하여 이끌어야 할, 그녀의 존재가 보이지 않았다.

패닉이 확산된 것엔 여왕이 없다는 이유도 있었다.

“조용히! 침착하게, 일단 거리를 벌려라!”

여왕이 보이지 않는 이때, 반요정들을 지휘하고 있는 이는 요정궁의 수호기사단장 비운이었다.

비 가의 가주임과 동시에 수호성의 단장.

여왕을 제외하고, 이 사절단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이가 바로 그였다.

그가 차분한 표정으로 반요정들을 지휘하며 피해를 최소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체 무슨 일이지?’

침착한 겉과는 달리, 그 역시 속으로는 혼란이 가득했다.

갑자기 세계수로 추정되는 나무가 숙소에 나타나다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여왕님은 어디 계시고?’

여왕의 부재 역시 그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 중 하나였다.

일이 터진 후 그는 즉시 호위를 위해 여왕의 방에 갔으나,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그 후로 여왕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가 미처 정리하지도 못하고 있을 때.

부하 하나가 그에게 달려왔다.

“단장님!”

“그래, 뭔가! 여왕님을 발견했나?”

무언가 정보를 가져왔다는 생각에 비운이 화색을 띠며 재촉했다.

부하가 정신없는 표정으로 다급히 보고했다.

“그, 그건 아닙니다만, 수상한 자를 발견했습니다!”

“수상한 자?”

“여왕님이 경계하라고 하셨던, 그 시안 아그리드가 세계수의 뿌리를 베고 있습니다!”

상황을 해결해 주기는커녕, 더욱 헝클어뜨리기만 하는 정보에 비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하얀 뿌리가 쇄도한다. 시안이 검을 휘둘러 뿌리를 쳐내었다.

“자르면 큰일 나는 거 아냐?”

“큰일은 이미 났어.”

프시케의 말에 대답하며, 시안이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빙하백령의 사절단이 묵고 있던 숙소가 완전히 박살 났다.

그 자리에 자라난 세계수가, 그에 그치지 않고 주변에 마구잡이로 뿌리를 뻗어가고 있었다.

수호기사들이 사절들을 지키며 구조를 하고 있었고, 반요정들뿐만 아니라 도시 자체가 깨어나고 있었다.

그곳에서 시안은, 자신을 집요하게 쫓아오는 뿌리를 잘라내며 몸을 피하고 있었다.

“역시 화났나 봐!”

아까보다도 한층 더 집요한 모습에 프시케가 소리쳤다.

아까도 지금도 피아를 가리지 않고 날뛰는 것은 같았으나, 이상하게 지금은 더욱 발광을 하며 시안을 쫓고 있다.

정말 뿌리를 잘라내서 그런 건가?

“유설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피해. 나는 혼자서 몸을 빼볼 테니까.”

“으, 응.”

자신에게 분노하여 쫓는 것이라면 일단 두 사람은 떼어놓아야 하리라.

아무리 시안이라도 둘을 업은 채로 세계수를 상대하기는 힘들었다.

그가 유설을 프시케에게 넘겨주곤 제대로 검을 잡았다.

그런데.

“어!?”

유설을 끌고 거리를 벌렸던 프시케가 눈을 크게 떴다.

시안을 쫓던 세계수의 뿌리들이, 그대로 방향을 틀더니 그녀에게 쇄도하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시안이 깨달았다.

‘내가 아니라 유설이었나?’

저 뿌리가 쫓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유설이었다.

대체 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추측은 가능했다.

‘여왕이 뭔 짓을 했군.’

아무래도 유설의 몸을 빼앗기 위해 마법을 사용하던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

여왕의 힘이 일부 넘어갔다거나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넘어갔다거나.

그것 말고는 세계수가 유설을 쫓을 이유가 없었다.

“큭.”

시안이 땅을 박차 뿌리와 프시케의 사이에 끼어들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뿌리가 또다시 잘려나갔다.

하지만 한두 개 자른 정도로는 티도 나지 않았다.

세계수의 뿌리는 아득할 정도로 많았다.

“어, 어떡하지?”

“글쎄.”

세계수가 유설을 쫓는다는 사실은 프시케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조급한 목소리로 시안에게 물었다.

그러나 시안 역시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굳이 있다고 한다면.

“베어버려야 하나?”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하도록, 그 밑동을 완전히 베는 수밖에.

자신에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자신 혼자서 할 필요는 없다.

엘리아의 공간에서와 달리 이곳은, 몇 사람이나 되는 하이마스터가 머물고 있는 도시였으니까.

-쿠구구구!

일단 제레흐 총장이나 겐 아슬라가 올 때까지 시간이라도 끌고 있자.

그런 생각에 검을 들고 있는 시안에게, 하얀 뿌리들이 쇄도했다.

그때.

“시안.”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며, 쇄도하던 뿌리가 허공에서 멈췄다.

돌아보니, 언제 일어난 것인지 정신을 차린 유설이 보였다.

“대체 무슨 일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이 그와 프시케를 보는 유설.

그녀의 가슴께에, 정체 모를 녹빛의 보석이 빛나고 있었다.

환한 연녹빛의 빛을 흩뿌리는, 반으로 갈라진 보석.

과거 엘리아가 집어삼켰던 세계수의 정수의 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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