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70화
“무슨 일이십니까?”
황자가 자신을 찾은 이유.
그것이 무엇인지 시안은 정말로 알지 못했다.
빙하백령과 사라진 가르시아 여왕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라고 하기엔, 사건이 일어난 지 한참이나 지난 후였고.
혹시 과거 제국에 반기를 들었던 자신을 처벌하러 온 것인가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분위기도 아니었다.
애초에 잡을 생각이었다면 에버웨일에 도착한 직후 그랬겠지.
“자리를 옮기지.”
시안이 묻자 아이작 황자가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약간의 미심쩍음을 가슴에 품고, 그가 황자의 뒤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도시를 가로지르는 마차.
마차가 도착한 곳은, 바로 어제까지 협정이 치러졌던 장소.
에버웨일의 아카데미 부지였다.
‘오랜만이군.’
마차 밖으로 아카데미의 풍경을 보니 새삼 오랜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길 떠난 지 2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만약 아무 사건 없이 계속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었다면, 벌써 졸업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의외로 깔끔한데.’
아카데미 내부의 부지는, 2년이나 폐쇄되어 있던 것과는 달리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아마 전쟁 중 주둔하던 제국의 병사나 학생들이 관리를 한 모양이지.
“실은 이전부터 둘이서 얘기를 하고 싶었거든.”
마차가 부지 내를 천천히 달리는 와중, 아이작이 먼저 얘기를 꺼내왔다.
아무래도 벌써부터 본론을 꺼낼 심산인 것 같았다.
“저와 말입니까?”
“그래.”
“황자님께서 왜 제게 관심을 보이는지 모르겠군요.”
시안의 얘기에 아이작이 대답했다.
“왜 없겠나. 자네가 마룡왕의 사도라며?”
그 말에 시안이 눈을 찌푸렸다.
그건 벌써 오해라고 해명한 일인데…….
유일하게 계속 의심했던 엘리아 여왕이 사라지면서, 모든 오해는 풀린 후였다.
“후후, 천연덕스럽기도 하군.”
그러자 황자가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직후 그의 손바닥에서 물줄기가 생성되며, 작은 회오리를 그리기 시작했다.
시안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건…….”
“역시 알아보는군. 해령궁주의 힘이라네.”
놀랐다.
아니, 전혀 예측할 수 없던 일은 아니었다.
제국이 어떻게 칠흑마탑과 손을 잡았는가, 그 이면엔 제국과 칠흑마탑 둘을 이어주는 인물이 반드시 있었을 테고.
그 인물은 칠흑마탑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해령궁주의 힘을 쓸 것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황자였을 줄이야.’
그 인물이 황자 본인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심지어 아이작의 손에 피어오른 작은 소용돌이는, 보기에만 작지 엄청난 거력을 품고 있었다.
당장 던져놓기만 해도 이 정도 도시쯤은 폭풍으로 적셔버릴 수 있을 정도로.
“어떻게 해령궁주와…….”
“내가 그쪽과 조금 긴밀한 연결이 있거든.”
아이작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그의 말의 뉘앙스는 참으로 묘하여,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다.
칠흑마탑과 긴밀한 연결이 있어 해령궁주와의 계약을 소개받았다.
혹은, 해령궁주 본인과 긴밀한 연결이 있다.
‘만약 후자라면.’
‘긴밀한’이라는 단서까지 붙일 정도라면 평범한 계약자는 아니다.
그 말은 즉, 놈의 사도라는 뜻.
“……잘도 숨기고 계셨군요.”
제국 내에서라면 또 모를까, 이 자리에서까지 숨길 수 있었던 것은 의외였다.
이번 협정에서 아이작의 주위엔 강자들이 많았다.
마룡왕에 대한 증오를 품고 있고, 비슷할 정도로 다른 악마들 역시 증오했던 엘리아 여왕.
천도맹의 일원으로 칠흑마탑의 뒤를 쫓고 있던 제레흐 총장과 정화교단의 성녀.
악마들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겐 아슬라나 로데릭 대장군 역시 대륙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강자들이다.
그들 사이에서 이만한 힘을 모두 숨기고 있었다니.
심지어 마룡왕과 프시케의 힘을 가진 시안 본인조차 방금까지 아이작의 힘을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다.
“이 정도야 뭐. 너도 성녀에게 들키지 않았잖아.”
아이작이 무슨 공감이라도 바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오지만, 시안은 그냥 흘리고 말 뿐이었다.
그가 무슨 방법으로 숨기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과는 다를 터이다.
자신이 들키지 않은 건 라비 덕분이니까.
“그래서 저는 대체 왜 찾은 겁니까.”
어쨌든, 아이작에 대해서 중대한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지금 시안의 의문을 풀어주는 건 아니었다.
대체 왜 자신을 초대하여, 이렇게 마차 안에서 은밀하게 말을 거는 것인가에 대한.
“내가 너를 찾은 이유야 하나밖에 없지.”
시안의 질문에 아이작이 가늘게 뜬 눈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손을 잡자. 시안 아그리드.”
그 말을 들으며 시안이 생각했다.
“거인들은 모두 죽었지만 해령궁주의 힘은 건재하다. 거기에 마룡왕의 힘이 더해진다면 다시금 제국에 영광을 일으키는 것도 일이 아닐 거다.”
이 녀석,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다고.
* * *
당초 제국은 거인의 힘에 더불어 해령궁주와 마룡왕의 조력을 바라고 병력을 일으켰다.
거인의 힘은 잘 이용할 수 있었고 해령궁주의 힘은 아이작 황자가 활용할 수 있었으나.
기대했던 마룡왕은 묵묵부답이었다.
전쟁이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로데릭 대장군이 에버웨일에 온 것도 이 때문이었다.
에버웨일에 있는 원시 마법을 빼앗아, 그걸 미끼로 마룡왕을 판에 끌어들이기 위해서.
결과적으로 원시 마법은 제레흐가 빼돌려 시안에게 건네주었고, 로데릭의 발걸음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래서 다음 방안으로 파멜라 드레이크를 찾아보려 했는데 말이지.”
아이작이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그녀는 찾지 못했어. 어디에 숨었는지 도저히 찾을 수가 없더군.”
파멜라의 이름을 들으며 시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찾을 수 없을 수밖에.
아마 그때 이미 파멜라는 지옥계에 있었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마룡왕은 파멜라의 시체를 어찌했지?’
동생인 샤밀라에게 데려다준다고는 하였으나, 그게 언제까지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설마 샤밀라가 죽어서 무덤에 묻히면 그 옆에 같이 묻어주겠다든가 그런 건 아니겠지?
어찌 되었든, 아이작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
“제국이 진 것은 마룡왕이 조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겁니까?”
아이작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미 침략은 실패하고 병력은 물렸으며 종전 협정까지 막 마치고 나왔으나.
아직도 그는 전쟁을 그칠 생각이 없었다.
“말투가 조금 그렇군. 그렇게 마룡왕의 탓으로 돌리려는 게 아니다. 그저 그가 있다면 다음 전쟁은 필승이란 얘기를 하고 싶을 뿐이야.”
그렇기에 시안을 불렀다.
성녀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해령궁주의 사도인 그는 시안에게서 마룡왕의 기운을 포착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한 정도라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시안에게 마룡왕의 사도라고 소리치는 요정여왕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시안은, 자신과 같이 힘을 숨기고 있는 사도라고.
“이 대륙은 크게 네 영역으로 나뉘어 있지. 소메르 제국, 빙하백령, 자카르타, 그리고 거인들의 무덤.”
“그렇죠.”
“알고 있나? 그중 단 하나만이 우리 인간들의 영역이라네.”
“모르면 바보가 아닙니까.”
빙하백령은 반요정의 나라고 자카르타는 수인들의 왕국이다. 거인들의 무덤은 사기가 가득한 사람이 살 수 없는 땅.
대륙에 사는 거의 대부분의 인간은 소메르 제국에 살고 있었다.
“너무 좁다고 생각하지 않나?”
“…….”
“제국의 인구는 빙하백령이나 자카르타의 몇 배는 되지. 둘을 합쳐서 다섯을 곱해야 아마 우리 제국의 인구수와 맞먹을걸? 그런데 차지하고 있는 땅은 똑같아.”
아이작의 말에 시안이 입을 다물었다.
“아직은 그럭저럭 수용을 하고 있지만 제국의 인구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이대로 5년만 지나도 비좁아질 테고, 10년이 지나면 숨이 막혀올 테지. 15년이 지나면 모든 제국민을 먹여 살리는 것조차 벅차질지도 몰라.”
“……멀리도 보고 계시는군요.”
당장 눈앞의 전쟁 결과도 알지 못하면서, 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러나 시안이 참은 말을 눈치를 챘는지, 아니면 본인도 평소 생각하고 있던 건지.
아이작이 쓴웃음을 지으며 얘기했다.
“전쟁의 패배는 내 실책이다. 인정하지. 하지만 말이야,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안 되지 않겠나?”
“그래서 저를 통해 마룡왕을 끌어들이겠다고?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없습니까?”
“말했잖나. 제국의 땅은 점점 비좁아지고 있다고. 영토 확장은 필연이야.”
시안이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아이작의 의견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애초에 제국의 땅이 비좁다고 느낄 만한 위치에 있던 적도 없던 그였다.
과거 그에게는, 한 채의 별저가 세상의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제국에 돌아간다.’
그 하나만큼은 마음이 동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다.
‘아그리드 후작.’
베르페드 아그리드.
결국 그와 담판을 짓지 않고서는 자신은 자신의 이름을 되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언제까지고 그를 피하고 제국의 땅에서 도망치며 지낼 수는 없지 않겠는가.
“황자님의 미래 계획 같은 것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만, 제국에 돌아갈 생각은 드는군요.”
시안이 가감 없이 솔직한 사실을 얘기했다.
그러나 그를 마룡왕의 사도로 알고 있는 아이작의 귀에는 전혀 다른 소리로 들렸다.
“그래그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이건가? 잘 알겠네.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하지.”
아이작의 입장에선 시안의 모습이 ‘자신의 제안에 혹해서 신중해진’ 모습으로만 보여 왔다.
그가 착각하고 있음을 시안은 눈치챘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착각하고 있는 편이 자신에겐 더 좋았으니까.
“황도에는 나흘 후에 출발할 예정이다. 그때 함께 귀국하도록 하지. 가문에서 무슨 일이 있어서 가출했는진 모르겠지만, 원한다면 황도에 거처를 마련해 줄 수도 있네.”
“고마운 말이군요.”
손을 내미는 아이작. 그 손을 잡으며 시안이 적당히 대꾸했다.
아이작이 아직 꺼지지 않은 야망의 불씨를 부여잡곤 활활 타오르고 있을 때, 시안의 머릿속에는 전혀 다른 생각만 가득했다.
‘후작.’
아그리드 후작에 대한 생각, 그리고 일단의 결의뿐이었다.
* * *
시간이 흘러 제국으로 떠날 날이 찾아왔고, 시안은 아는 얼굴들과 작별을 나누고 다녔다.
겐과 란, 샨을 포함한 수인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제레흐에게도 찾아왔다.
“돌아가는군.”
“예. 총장님은 이곳에?”
“당연하지. 아직 시간이 조금 필요하겠지만, 다시 아카데미를 일으킬 생각이네.”
그가 결연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엔, 조금 누그러진 눈으로 시안을 보았다.
“그때가 되면 자네도 다시 배우러 오게. 아직 자네가 졸업장을 받지 않은 것을 잊진 않았겠지?”
그 말에 시안이 피식 웃었다.
이미 그는 아카데미의 수업 같은 걸 들을 경지가 한참 지났지만, 그럼에도 제레흐의 제안은 고마운 것이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 말하는 시안의 목소리는, 일전에 황자에게 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긍정적인 느낌이 가득했다.
어린 시절 그의 세상은 아그리드 영지에 있는 별저 한 채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곳을 나와 가장 처음 보았던 곳이 바로 이곳, 에버웨일 아카데미.
이곳은 그에게 있어서도 적지 않은 인연이 있는 장소였다.
그렇게 제레흐와도 헤어지고 그가 아이작과 함께 제국의 황도로 향하는 여정에 올랐다.
몇 대나 되는 마차와 말을 탄 기사들. 그리고 창을 든 보병들이 단체로 행군을 하는 길.
이 정도로 많은 인원과 함께 움직이는 것은 시안도 처음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윽고 일행은 제국의 심장이라 불리는 도시, 황도 루스카야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