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71화
황도 루스카야에 도착했다.
시안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도시보다 거대한 도시의 풍경이었다.
황도 루스카야는 빙하백령의 요정궁이나 아그리드 후작가, 혹은 대륙의 중심이라 불리던 에버웨일보다도 더욱 크고 웅장했다.
“굉장히 크군요.”
“황도는 제국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니까.”
시안의 중얼거림에 대답한 것은 아이작의 호위와 부대의 지휘를 겸하고 있는 대장군 로데릭이었다.
그와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성문을 지나 도시 내부를 걸으며, 시안이 황도를 구경했다.
전체적인 인상은, 직선의 느낌이 강했다.
평지에 지어진 루스카야는 철저한 도시계획 하에 확장을 거듭하기라도 한 것처럼 올곧고 질서정연했다.
‘사람들의 표정도 나쁘지 않고.’
전쟁에서 패배한 국가의 국민들이라고 하기엔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표정이 어둡지 않았다.
아마 침략을 당한 것이 아닌, 한 측의 입장이라 그런 것도 있을 거고.
제국이 잃은 병력의 대부분이 병사들이 아니라 거인들이었다는 것도 한몫하겠지.
거인을 중심으로 한 침략 전쟁이었기 때문에, 황도에 사는 이들에게는 전쟁의 실감이 크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도시를 보며 전체적인 분위기를 살피던 중, 아이작이 다가왔다.
“시안. 어떤가, 황궁의 손님으로 오지 않겠나?”
예전에 얘기했던 거처를 마련해 주겠다는 얘기였다.
물론 달갑지 않은 얘기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황자에게 빚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황궁에는 그 헬레네 황녀도 있을 테고.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여기까지 함께 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그런가.”
시안이 정중히 사양하자 아이작이 쩝,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더 제안을 해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는 이미, 시안이 황도에 들어온 것으로 시안의 포섭을 거의 완료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영역에 들어온 것이니 이미 잡은 물고기나 다름없다며.
“알겠네. 그럼 뭐 당분간은 황도의 관광을 즐기게나. 만약 결심이 서게 된다면 언제든 찾아오고.”
“예.”
짧게 대답한 후 시안이 아이작 일행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그들은 그 길로 대로를 걸으며 거대한 황궁으로 향했고, 시안은 여관이 있을 법한 도심지를 찾았다.
‘딱히 고급 여관일 필요는 없으니.’
귀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이 묵을 법한 고급 여관이 즐비했으나, 시안은 그곳에선 눈을 돌렸다.
그렇다고 당장 부서질 것 같은 낡은 여관도 제외다.
적당히 규모가 있고 깔끔한 여관. 그런 곳을 찾아 시안이 들어갔다.
-딸랑.
“어서 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서빙을 하고 있던 점원이 밝게 인사를 하였다.
1층은 식당으로 되어있는 평범한 형식의 여관이었다.
시안이 그대로 접수대로 향해 방을 구했다.
“며칠 정도 묵으실 예정이신가요?”
“아직 미정인데…… 일단 일주일 정도로 하고, 더 머무르게 된다면 늘리겠습니다.”
“예!”
활기찬 인상의 점원에게 체크인을 하는 동안, 주변에선 떠들썩한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대낮인데도 벌써부터 흥청망청 부어라 마셔라 하는 부류들이 많았다.
그중 대부분은 용병들이었다. 딱히 정기적인 일거리가 없어 대낮부터 술을 들이켤 수 있는.
“그럼 방으로 안내해드릴게요. 아! 짐은 저 주세요.”
점원이 싹싹하게 시안의 짐을 받아들며 계단으로 향했다.
그 뒤를 따라 시안도 2층으로 오르려던 중.
그때 익숙한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
“…….”
테이블에서 모르는 얼굴의 용병들과 킬킬거리며 술을 거의 붓고 있던 사내.
눈이 마주치자 시안도, 그리고 그 사내도 눈을 껌뻑거리며 우뚝 정지했다.
“너…….”
설마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시안이 한마디 뱉으려 할 때.
“으악!”
녀석이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순간 시안의 눈이 번뜩였다. 그러곤 그 역시 여관을 나서며 놈을 쫓았다.
“헥토르!”
시안이 놈의 이름을 부르며 뒤를 쫓았고.
“그, 그런 사람 몰라요!”
헥토르는 헐레벌떡 거리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 * *
“후우.”
시안이 가볍게 숨을 골랐다.
헥토르는 열성적으로 도주하였으나 그를 붙잡는데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건물과 건물 사이, 어두침침한 뒷골목에서 헥토르가 꽁꽁 묶여선 털썩 앉아 있었다.
“끄응.”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녀석을 보며 시안이 입을 열었다.
일단은 그간의 근황이 먼저였다.
“그동안 뭘 하고 있던 거야? 여왕의 손에선 무사히 도망친 모양인데.”
헥토르가, 입이 댓발은 튀어나온 채, 마지못해 대답했다.
“너가 봉인되고 빙하백령의 여왕이 거인왕을 공격했어.”
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아라면 그랬을 테지. 실제로 거인왕을 죽였다고 말하기도 했고.
“그 틈을 타서 도망갔지. 네가 봉인됐으니 나는 자유……가 아니라! 널 봉인에서 풀어줄 방법을 찾아보려면 일단 여왕의 손을 피해야 했거든!”
시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나 말을 끊지는 않았다. 괜히 얘기가 길어지는 것은 싫으니.
“그래서 일단 단서를 찾기 위해 빙하백령을 좀 둘러보려고 했는데…….”
빙하백령의 관광을 하려 했다는 얘기인 듯하다.
“수호기사들이 나까지 잡아가려고 쫓아오더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국 쪽으로 도망 왔지.”
어찌어찌 빙하백령을 탈출한 후부터는,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돈을 모으기 위해 용병 길드를 전전하며 간간이 의뢰를 받으면서 살아왔다고.
“실력은 있는데 신분이 확실치가 않아서 말야. 진짜 헥토르의 신분을 꺼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벌이가 좋은 의뢰는 받을 수 없더라고. 그래서 조금씩 받아오는 걸로 간신히 연명하고 있었지.”
녀석이 사뭇 비참한 경험을 했다는 듯이 푹 한숨을 쉬며 얘기했다.
그런 헥토르를 시안이 빤히 바라보았다.
아까 대낮부터 술 파티를 하고 있던 모습. 더욱이 지금 녀석의 목에는 금목걸이가 걸려 있었고, 걸치고 있는 옷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고급스러운 소재로 되어 있었다.
어찌나 잘 처먹었는지 얼굴에 개기름이 올라왔을 정도였다.
“아주 양껏 즐기고 있구나 너?”
“즈, 즐기고 있다니 무슨! 내가 너 걱정하느라 얼마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는데!”
“그래? 그럼 이제 걱정이 사라졌으니 다시 같이 다니면 되겠군.”
흠칫!
헥토르가 살짝 몸을 떨고는, 조심스레 시안의 눈치를 보았다.
녀석의 눈이 살살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 그거 다행이다 야. 그나저나 어떻게 빠져나온 거야? 그 봉인은 거인왕을 봉인했던 것과 거의 맞먹는 봉인이라 그랬는데.”
“음, 그게, 말하자면 긴데…….”
시안이 팔짱을 끼며 그간의 일을 간추려 설명하려는 찰나.
시안이 보인 빈틈에 헥토르가 눈을 번뜩였다.
“핫!”
뚜두둑!
그가 자신을 묶은 밧줄을 순식간에 끊어버리곤, 땅을 박차고 뛰었다.
“옛날의 나라고 생각하지 마라! 이 인간의 몸에도 모두 적응했고, 강림에도 익숙해져서 본체의 거의 모든 힘을 끌어낼 수 있게 되었으니까!”
공중에서 녀석의 몸이 순식간에 하얀 벼락으로 변하였다.
뇌신지체.
그 상태로 놈이 지붕 위로 사라졌다.
말 그대로 번개 같은 스피드였다.
“크하하하! 난 자유다! 자유라고!”
시안이 봉인되었던 그때.
솔직히 살짝 걱정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동안 지내온 정이란 게 또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역시나 자유가 되었단 기쁨이 더욱 컸다.
시안이 이렇게 무사히 살아 돌아오고, 가슴 한편에 쌓여 있던 일말의 걱정조차 모두 사라지고 나니.
남은 것은 자유를 향한 갈망뿐이었다.
건물의 지붕 위를 가로지르며, 그가 하늘을 보았다.
자유의 몸으로 보는 저 푸른 하늘.
어찌 이 황홀한 풍경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크하하하!”
그렇게 그가 하늘을 보며 크게 웃어젖히고 있자.
갑자기 하늘이 무언가에 가려졌다.
“하하…… 하?”
그건 시안의 모습이었다.
“좀 빨라지긴 했군.”
시안이 한마디 뱉으며 맨손으로 헥토르의 목을 붙잡았다.
헥토르의 눈이 커졌다.
자신은 지금 벼락으로 화(化)하고 있다. 당연히 평범한 물리적인 접촉은 통하지 않아야 하거늘.
그걸 시안은 아주 자연스럽게 붙잡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흡!”
허공에서 그를 메치며, 저 아래 땅으로 꽂아버렸다.
쿠웅!
“커헉!”
어느새 뇌신지체가 풀린 헥토르가 거칠게 숨을 토했다.
등부터 땅에 엎어진 그에게 저벅저벅 그림자가 드리웠다.
헥토르가 고개를 들곤, 꿀꺽 침을 삼켰다.
“너, 너, 그거 뭐야? 설마…….”
자신에게 드리워진 시안의 그림자.
그것이 참으로 신비하게도, 인간이 아닌 용과 같은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시안과 연관이 있는 용이라면 그는 단 한 개체밖에 알지 못한다.
아니 애초에 그 한 개체 외에 아직까지 살아있는, 진정한 의미의 용은 본 적이 없다.
“뭐,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마룡왕.
헥토르는 시안에게서 그의 그림자를 느꼈고, 더 이상 도주하겠다는 마음은 어느샌가 싹 사라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도주할 수 있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 * *
“어이! 헥토르! 갑자기 대체 뭐야?”
“그 친구는 대체 누군데? 빚쟁이라도 돼?”
여관으로 돌아가자 헥토르의 일행으로 보이던 이들이 질문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곤란해하는 헥토르를 두곤.
“난 먼저 올라간다.”
시안은 먼저 방으로 올라왔다.
아까 안내를 받진 못했지만 방 번호가 적힌 열쇠는 받아놨었다.
열쇠로 열고 들어가니, 방 내부도 적당히 만족스러웠다.
더럽지 않고 벌레도 별로 없다. 쥐들이 드나드는 구멍도 보이지 않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훌륭한 방이었다.
그가 여독도 풀 겸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여행 정도로 그렇게 피로감을 느낄 시안이 아니었으나, 잠은 잘 수 있을 때 자두는 게 좋다.
그렇게 한동안 단잠을 취하다.
저녁때쯤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또각, 또각.
들려오는 발소리.
여관의 점원이나 용병들이 신고 다니는 그런 신발의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들과는 명백하게 이질적인, 군홧발의 소리였다.
-똑똑.
-시안 아그리드. 안에 있나?
곧이어 방문을 두드리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잘 아는 목소리였다.
‘대장군.’
대장군 로데릭.
점심때 헤어졌던 그의 목소리였다.
“들어오시죠.”
끼익 문이 열리고 로데릭이 들어왔다.
그가 잠시 시안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방문을 닫고 테이블에 앉았다.
“쉬고 있는데 미안하군.”
“괜찮습니다. 충분히 쉬었으니.”
의례적인 인사치레가 오고 가고, 먼저 본론을 꺼낸 것은 로데릭이었다.
“황자님께 제안을 받았다고 들었네.”
아무래도 찾아온 용건은 아이작 황자의 건인 것 같았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분께 직접 들었지.”
시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종용하러 온 겁니까?”
“아니.”
로데릭이 대답했다. 그리고는 대뜸 검을 잡더니.
콰앙!
그대로 테이블 채로 시안을 향해 내려쳤다.
“……손속이 매서운데.”
충격음이 퍼져나간 그 자리에선, 흑검을 꺼낸 시안이 로데릭의 검을 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로데릭의 눈이 살짝 꿈틀했다.
정말로 죽일 생각으로 휘둘렀는데, 이렇게 간단히 막힐 줄이야.
“대장군은 농담이 참 거칠군요. 제가 아니었으면 죽었을 겁니다.”
그러나 놀란 것은 놀란 것. 그것과 별개로 할 일은 해야 했다.
“농담이 아니다. 그게 내 용건이니까.”
그리 말하며 로데릭이 다시 검을 들어 내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