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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84화 (184/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84화

시안이 막사를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막사가 세워져 있던 곳은 평원이었다. 지평선이 보이는 널따란 평원에 시안이 방금 나온 것과 비슷한 막사가 수없이 늘어서 있었다.

모닥불 앞에 병사들이 힘없이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돌아다니며 그런 병사들을 끊임없이 독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기사들 역시 표정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여긴…….”

“황군의 주둔지야. 황도 탈환을 위해 소집된.”

시안을 뒤따라 나온 에르제가 그렇게 얘기했다.

그녀의 말을 듣곤, 시안이 저 멀리 보이는 황도 루스카야를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황도‘였던’ 것.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라는 황도는 지금 꿈틀거리는 안개에 뒤덮여 있었다.

그저 존재할 뿐인 옅은 안개가 아닌, 마치 하나의 생물체처럼 꿈틀거리고 있는 기괴한 안개에.

심지어 그 근방에는 이형의 마물들과 악마들이 수두룩하게 포진해 있었다.

“일이 터지고 다들 다급히 도시를 빠져나왔거든. 민간인들은 근처 도시로 대피를 시켰고, 황군은 이곳에 소집됐어.”

“지휘관은 누구지?”

“황제 폐하가 계시지만 지금 누워계시고, 황녀님이 지휘하고 계셔. 하지만 황녀님도 이런 일엔 경험이 일천한지라 실질적으론 아그리드 후작님이 지휘하고 있어.”

대장군 로데릭이 죽은 지금 황도에서 가장 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자.

동시에 황족을 제외하면 그 신분도 가장 높다.

아그리드 후작이 황도 탈환군의 지휘를 맡는 것은 필연과 같았다.

‘가주가 지휘하는 부대라.’

시안이 허리춤에 패용한 검을 만지작거렸다.

왠지 어색한 기분이었다. 오랜 기간 라비가 깃들어서는 손발처럼 사용했던 검인지라 라비가 사라진 것이 익숙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 어색함이 오히려 시안의 결의를 끌어올려 주었다.

라비를 반드시 되찾으러 가겠다며.

‘……이미 늦었을 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이미 해령궁주에게 모조리 흡수당해 소멸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 가능성은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가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아직 라비가 살아있다면 구출해내고, 만약 이미 죽었다면 복수를 완수한다.

어찌 됐든 해령궁주는 반드시 처치해야 할 적이었다.

그러나 혼자서는 안 된다. 황군, 그리고 가주와 발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아직 완전하지 않은 녀석과의 1:1도 밀렸는데 저렇게 둥지를 튼 곳에 단신으로 뛰어들 수는 없었으니.

“보러 갈 수 있을까?”

“황녀님을? 아니면 후작님을?”

“둘 다.”

둘을 구분할 필요는 없다. 이 상황에선 반드시 함께 있을 터이니.

잠시 후, 시안은 에르제에 의해 지휘 막사로 안내되었다.

그곳에서 시안은 상석에 앉아있는 헬레네와, 그 옆에 보좌하듯 서있는 가주를 만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쌩쌩하군.”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베르페드였다. 시안이 살짝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일단 자신을 구해준 것이 그라고 하였으니.

“덕분에 살았습니다.”

“…….”

베르페드는 시안의 감사 인사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 탓인지 아니면 다른 탓인지, 둘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무척이나 어색했다.

이전에도 무겁게 내리누르는 공기는 있었지만 그건 아득한 상급자와 하급자 간의 공기로 오히려 자연스러웠었다.

그러나 이렇게 마주보고 있는 지금, 둘 사이에는 뭐라 형용하기 미묘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부자지간에 어색하기 짝이 없구나.”

기다란 곰방대에 연초를 태우며 헬레네가 그리 얘기했다.

나름 분위기를 풀어보려 농을 던진 것이겠지만 당연하게도 분위기는 전혀 풀리지 않았다.

후우- 헬레네가 작게 연기를 내뿜었다.

그것이 마치 한숨과도 같이 들려왔다.

“시안 아그리드. 대충 상황은 알고 있겠지?”

“해령궁주가 황도를 점령했고 그걸 탈환하기 위해 주둔지를 꾸렸다고 들었습니다.”

“정확해.”

탁.

헬레네가 곰방대로 테이블을 쳤다.

자연스레 시선을 향하니 황도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작전 지도가 보였다.

“일단 물어보겠다만, 네놈은 우리 편이 맞겠지?”

“-? 어째서 그런 질문을?”

“마룡왕의 사도라는 말이 들려서 말이야.”

시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이작 황자의 착각이 여기까지 이어지고 있었나.

“아닙니다. 그리고 설령 제가 마룡왕의 사도라고 하여도 달라질 점은 없을 겁니다.”

“무슨 뜻이지?”

“녀석이 해령궁주의 적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니까요.”

황녀의 말에 대답한 것은 시안이 아니라 옆에 있던 베르페드였다.

“해령궁주와 싸우다 쓰러진 것을 간신히 거둬왔습니다. 제가 없었다면 그대로 죽었을 겁니다.”

베르페드가 시안을 변호했고 헬레네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렇겠지. 그냥 확인 차 물어본 것이니 신경 쓰지 말거라. 지금 중요한 건 멀리 있는 마룡왕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 있는 해령궁주니까.”

그렇게 대강의 서론을 마무리하고, 헬레네가 본론을 꺼내 들었다.

본론이란 다름이 아니었다.

“황궁에서 너 혼자 해령궁주와 맞섰다지.”

“예.”

“넌 녀석에 대해 뭘 알고 있지?”

시안이 알고 있는 해령궁주에 대한 정보.

무엇보다 놈의 힘과 전력에 대한 정보였다.

이제부터 놈이 도사리고 있는 황도에 쳐들어가야 하는 군의 입장에서 당연히 파악해야 하는 정보로, 시안 입장에서도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다만 아쉽게도 시안도 별로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물을 주로 사용한다는 점. 그리고 하이마스터 이상으로 강하다는 점.”

로데릭과도 싸워보고 해령궁주와도 싸워본 시안으로선 해령궁주 쪽이 훨씬 까다로웠다.

“그리고 또…… 악마를 포식하고 강해지는 듯합니다.”

“악마를? 자기 동족을 먹어?”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으니 악마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그런가.”

대략적인 얘기를 하고 난 후는 시안이 해령궁주와 벌였던 상세한 전투 내용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아이작 황자의 얘기가 나왔지만, 헬레네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제 오라비보다 대장군 로데릭이 죽은 과정에서 탄식을 표하는 그녀였다.

“제국을 생각하는 그의 마음은 진심이었지만, 그보다 오빠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이 더욱 컸던 모양이구나.”

안타깝지만, 하지만 동정의 여지는 없다. 과정이 어찌되었든 황궁을 파괴하고 해령궁주에게 황도를 넘기는데 한몫을 한 셈이니까.

“길게 얘기하느라 고생 많았다. 몸도 좋지 않을 텐데 오늘은 들어가 쉬거라.”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지?”

“작전 결행은 언제입니까.”

시안의 물음에 헬레네가 대답했다.

“내일. 새벽 아침이 밝으면 쳐들어갈 예정이다.”

* * *

해가 지고 밤이 깊었다.

막사에서 쉬며 상처 치료에 전념하던 시안이 잠시 바람을 쐬러 바깥으로 나왔다.

사위가 어둑하고 달빛 하나만이 내리쬐는 늦은 밤.

시안이 꿈틀거리는 안개에 뒤덮인 황도를 보며 몸을 움직여 보았다.

‘상태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구해지고 며칠을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도망갔던 병력을 소집하고 이만한 주둔지를 차렸을 정도다.

아마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었으리라.

그동안 푹 쉬어서 그런지 처치를 잘 받아서 그런지 상처는 이미 많이 아물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밤 시간의 이 청량한 공기도 그의 회복력을 더욱 올려주었다.

본디 밤은 그의 시간이었으니까.

‘내일 새벽이라.’

시안의 입장에선 지금과 같은 밤 시간이 더욱 좋았지만 그리 얘기할 순 없는 노릇이다.

황도 인근에 포진해 있는 악마와 마물들을 밀어내기 위해선 군의 전력이 필요하고, 깜깜한 밤에는 병사들의 전투력은 급감하니까.

“잠이 안 오십니까?”

그때, 시안에게 다가온 이가 있었다.

유리로 된 병과 글라스를 들고 있는 염노. 그리고 그 뒤엔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베르페드도 있었다.

“염노? 그리고 가주까지…….”

시안이 두 사람을 바라보니, 염노가 손에 든 병과 잔을 들어 보였다.

“내일을 위해 결의를 다지려고 나왔습니다.”

결의를 다지는 게 한잔한다는 얘긴가.

시안이 헛웃음을 지었지만 이내 그러려니 넘겼다.

어차피 술 한 잔 가지고 취할 리도 없었고, 설령 취한다 하더라도 가볍게 마나를 돌리는 것만으로 취기 정도는 모두 날릴 수 있는 그들이었다.

“도련님도 한잔하시죠. 이미 성인 아닙니까.”

“……준다면야.”

황도가 훤히 바라보이는 널찍한 바위 위, 세 사람의 작은 술자리가 벌어졌다.

염노가 잔에 술을 따라 시안에게 건네주었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영롱한 호박색의 술을 시안이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그동안 마신 적 없으십니까?”

“처음이야.”

“그렇군요. 도련님의 첫 술자리에 함께할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염노가 시안과 가볍게 잔을 맞부딪쳤다.

그사이 베르페드는 이미 황도를 바라보며 혼자 홀짝이고 있었다.

그가 혼자 마시고 있는 사이, 잠시 시안과 염노의 잡담이 이어졌다.

주된 얘기는 에버웨일에서 벗어난 시안이 펼쳤던 모험의 이야기.

그날 여관에서 실컷 하였음에도 아직 못 다한 이야기가 많았다.

그러던 중, 문득 베르페드가 입을 열었다.

“내 아들이 살아 있었다면 지금의 너와 같은 모습이었겠지.”

좀처럼 보지 못하는 주군의 모습에 염노가 숨을 삼키듯 입을 다물었고, 시안 역시 말문이 멎었다.

잠시 침묵이 지나간 후, 시안이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의 아들이 아닙니다.”

“알고 있다.”

베르페드가 술잔을 내려놓았다.

어느새 다 마셨는지 잔은 비어 있는 채였다.

“내가 너를 어찌 불러야 할까.”

“…….”

단순한 호칭의 얘기는 아닐 것이다. 보다 본질적인,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그러고 보니 황녀님 앞이라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했습니다만, 구해줘서 감사합니다. 이걸로 당신에게 구해진 게 두 번째군요.”

“흥, 아직 치료하면 쓸 만해 보여서 데려온 것뿐이다.”

시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베르페드의 대답은 그가 상상했던 그대로였기에.

그러나, 단편적인 부분은 추측할 수 있어도 그는 베르페드의 본질을 알지 못했다.

알고 싶어한 적이 딱히 없기도 했지만, 애초에 두 사람은 서로 터놓고 이야기할 그런 관계가 아니었기에.

그때 베르페드가 가지고 왔던 검을 툭 시안에게 던졌다.

“이건?”

“내일 결전에 쓰도록 해라. 네가 가진 그 낡은 검보단 훨씬 좋은 녀석이니.”

시안이 지금 가지고 있는 건 라비가 없는 빈 정령의 검.

정령이 깃들 수 있다는 기능이 있지만 그걸 빼놓고 보면 검으로서는 그냥 조금 좋은 정도였다.

그에 비해 베르페드가 건넨 검은 척 봐도 명검이었다.

대륙에서 손에 꼽을, 아니, 어쩌면 대륙 제일이라도 해도 믿을 만큼 서슬퍼런 날이 서 있는 보검.

“당신은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난 따로 가지고 있는 검이 있다.”

하긴 검왕이라 불릴 정도의 사람이니 가진 보검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갑자기 검을 건네는 것일까.

그동안 시안이 보아온 베르페드의 모습이라면 내일 함께 싸울 이의 전력을 조금이라도 높이려는, 그런 합리적인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엔 문득 다른 생각이 들어왔다.

어쩌면 다시 가문으로 돌아오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그것도 좋을지도 모르지.’

시안은 딱히 가문 자체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염노도 있고 다른 사용인들과도 딱히 불화도 없다.

지금까지 그가 가문을 벗어나고자 했던 것은 그저, 시안 아그리드라는 이름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러니 그것만 아니라면, 다시금 아그리드 가문에 들어가도 딱히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감사합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시안은 검을 다시 베르페드에게 돌려주었다.

누군가 보면 탄식을 토할 일이었다. 누가 봐도 빈 정령의 검보다는 베르페드의 검이 훨씬 더 귀한 보물이었다.

그런 보물을 앉은 자리에서 걷어차다니.

그러나 시안에게 후회는 없었다.

“제겐 이 검이 훨씬 어울립니다.”

라비가 깃들어 있었던, 그리고 앞으로 돌아올 곳.

“……그런가.”

베르페드는 별말 없이 검을 회수했다. 그것을 잠시 바라보고는 그대로 다시 허리춤에 매달았다.

그 뒤로도 침묵의 술자리는 한차례 더 이어졌고.

이윽고 동이 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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