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86화
황궁을 둘러싼 알이 깨지기 시작했다. 갈라지는 껍질. 그 틈 사이로 위압적인 기운이 새어 나왔다.
“힉!”
그 기운을 쐬고 에르제가 멈칫거렸다. 강대한 악마의 기운.
그녀는 모르고 있었지만, 알 속에 들어있는 것은 지옥계에 있던 해령궁주의 본신이다.
그 어떤 악마라도 무릎 꿇리는 악마들의 군주. 절반뿐이지만 악마의 피를 가진 에르제에게도 그 위압은 충분할 정도로 전해졌다.
그리고 그녀가 느끼는 기운은 시안 역시 느끼고 있었다.
그는 악마의 피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악마의 기운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룡왕과 비슷한 기운…… 본신이 강림한 건가?’
지옥계에서 조우했던 마룡왕에게서 풍기는 기운과 흡사한 느낌.
그것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이 인간계에 해령궁주의 본신이 강림했다는 것.
시안이 검을 움켜쥐었다.
안개의 알은 황궁 전체를 감싸고 있었기에 그 크기가 무척 컸다.
그 탓인지 깨지는 속도도 빠르지 않았고, 그 시간은 모든 상황을 인식하기엔 충분할 정도의 시간이었다.
‘그동안 가만히 웅크리고 있던 건 이걸 위해서였군.’
황군을 밀어버릴 수도 있을 충분한 수의 마물이 모였음에도 며칠이나, 인간에겐 취약한 밤시간에도 가만히 웅크리고만 있었던 것은 모두 이 때문이었다.
지옥계에 있을 스스로의 본신을 이 땅에 강림시키기 위해서.
일순간에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시안은.
휙!
콰과과과광!
서슴없이 갈라진 알의 틈새 사이로 오러를 퍼부었다.
녀석의 본신은 아직은 강림하지 않았다. 지금보다 더 녀석에게 타격을 입힐 좋은 기회는 없었다.
동시에 시안뿐만 아니라 베르페드와 염노 역시 알의 틈새 사이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읏…….”
에르제 역시, 몸이 떨리는 와중에도 검을 들어 알의 틈새로 오러를 쑤셔 넣었다.
해령궁주의 기운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에르제를 짓누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검을 휘두르는 시안을 보며 어떻게든 꼿꼿이 서 있었다.
콰과과과과광-!
-크아아아! 이 버러지들이!
이내 콰드득 소리와 함께 안개의 알이 터져 나가며 무언가가 날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곤 시안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늘을 유영하는 거대한 고래.
황궁을 감쌌던 안개의 알도 충분히 컸는데, 참으로 기이하게도 그 알보다도 더 커다란 고래였다.
단순 크기만으로 따지면 지옥계에서 보았던 마룡왕의 본신보다도 더욱 컸다.
등에 나 있는 화산과 같은 수십의 분사구에선 열기를 동반한 안개가 상시로 뿜어져 나왔고, 벌린 입으로 보이는 수백 겹의 빼곡한 이빨은 보는 것만으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다만.
“꽤 상처 입었군.”
그 거대한 덩치의 전신에 잔 상처가 가득했다. 그 상처에서 떨어지는 핏방울들.
놈의 덩치에 비하면 몇 방울 정도에 지나지 않은 피였지만 땅에 떨어지니 호수를 이룰 정도였다.
-이 개 같은 놈들이 그새를 못 참아선……!
해령궁주가 그드득 이를 갈았다.
아직 알일 때 시안 일행이 퍼부었던 오러의 흔적.
그것은 저 거대한 덩치를 모두 상처입힐 정도는 아니었으나, 아무래도 강림의 순간을 방해받았기 때문인지 타격이 더욱 커 보였다.
“그렇게 중요한 일이었으면 더 잘 지켰어야지.”
-네놈……!
시안의 비아냥에 해령궁주가 시안을 노려보았다.
흡사 개미와 코끼리만큼이나 차이가 나는 덩치. 그 정도의 거체가 쏘아보니 그것만으로 압박감이 상당했다.
그러나 그 직후.
서걱!
해령궁주가 시안을 신경 쓰는 사이 어느새 땅을 박찬 베르페드가 해령궁주의 지느러미 하나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단칼에 베어내기엔 그것은 너무 크고 두꺼웠지만, 그래도 피부를 베어내고 혈관을 가를 정도는 되었다.
푸슉! 솟아오르는 피를 보며 해령궁주의 눈이 돌아갔다.
이미 전신에 상처를 입은 몸이라 상처 하나가 추가된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지만, 강림을 하였는데도 베였다는 사실은 그의 자존심을 상처 입히기 충분했다.
-모조리 죽여주마!
그러자 놈의 전신에 가득한, 그리고 흘러내렸던 놈의 핏방울이 기화하기 시작했다.
쇠가 연상되는 섬뜩한 냄새와 함께 핏빛 안개가 피어오른다.
그것은 기존의 안개보다 질척거리고, 그리고 날카로웠다.
“흡!”
핏빛 안개 속에 4명이 모두 각자 고립되었다. 혼자가 된 시안이 숨을 들이쉬다 급히 호흡을 멈추었다.
공기를 들이마시니 그 순간 폐부에 날카로운 통증이 달렸던 것이다.
‘젠장.’
그냥 들이마실 순 없다. 정화가 필요했다.
시안은 정화를 위한 마법이나 비술은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오러를 이용해 스스로에게 해가 되는 독극물을 걸러내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얼굴에 오러를 둘러 핏빛 안개를 중화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을 때.
-네놈이 마지막 조각이다.
“……!”
갑작스럽게, 기척 하나 없이 그의 눈앞에 입을 벌린 해령궁주가 나타났다.
시안이 뒤로 피해 보려 뛰었으나 소용없었다. 핏빛 안개는 어느새 거친 강과 같은 혈류가 되어 시안의 몸과 함께 이 장소의 모든 것을 해령궁주의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어떻게든 땅에 검을 박고 버텨보려 하던 시안이었으나.
‘……아니.’
이내 마음을 바꿔먹었다. 이대로 버티기만 했다간 결국 승리하는 건 해령궁주다.
그렇게 판단한 시안이 오히려 놈의 입속으로 점프했다.
-흐흐. 그렇게 나와야지. 최후의 전투를 벌여보자꾸나, 네메시스의 후예여!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해령궁주의 눈이 호를 그렸다.
대답 대신 시안은.
콰직!
-켁!
삼켜지면서 놈의 목구멍에 커다란 구멍 하나를 뚫어주었다.
* * *
핏빛 안개는 네 사람을 모두 갈라놓았다. 같은 공간에 있는 넷이었으나 이 안개 속에서는 서로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갈라져 있었다.
덕분에 시안이 놈에게 삼켜졌다는 것은 꿈에도 알지 못한 채, 남은 세 사람은 각자 해령궁주를 상대하고 있었다.
핏빛 안개를 조종하며 대지를 완전히 찢어발기는 해령궁주. 에르제도 염노도, 심지어 베르페드조차 손속에 곤란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
시안은 해령궁주의 뱃속에 들어와 있었다.
원체 몸이 거대한 녀석이라 그런지 뱃속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하늘은 어두웠고 땅에는 정체 모를 액체가 가득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보인 것은, 부서진 황궁의 잔해들이었다.
‘알 속에 있을 때 먹은 모양이군.’
황궁의 잔해들을 스쳐 지나가며 시안이 더 안쪽으로 향했다.
조금 나아가니 황궁의 잔해는 사라지고 정체 모를 양식의 잔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 지옥계의, 혹은 과거의 흔적들이리라.
“!”
그때, 발아래에서 핏빛 가시가 솟아올랐다.
시안이 한 걸음 물러나 피하고는, 그대로 검을 휘둘러 가시를 잘라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온 사방에서 꿀렁거리는 핏빛 액체가 덮쳐들더니 시안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쯧.”
시안이 혀를 차며 놈들에게 대응했다.
하나하나가 바깥의 마물, 아니, 어지간한 악마들보다도 까다로운 녀석들이었다.
한 번 벤 정도로는 쓰러지지도 않는 데다 쉼 없이 가시를 쏘아댄다.
심지어 눈앞을 가득 메울 정도로 마릿수조차 많았다.
[ 상천검(霜天劍) - 참(斬) ]
촤악!
시안이 검을 가로 그어 수십의 액체들을 베어냈다.
한 번 베인 정도론 죽지 않는 녀석들이었지만, 오러를 두른 검에는 픽픽 쓰러져 나갔다.
촤악!
시안이 페이스를 조절하며 천천히 앞으로 진행했다.
이 앞에 무엇이 더 있는지 알 수 없는 이상 이런 녀석들에게 모든 힘을 다 빼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시안이 찾는 것은.
‘놈의 심장.’
탈출 루트가 아닌, 몸속에서 놈을 저밀 수 있는 방법.
모든 생명체의 약점인 심장이었다.
‘아무리 놈이라도 심장이 부서지고 살아남을 순 없겠지.’
그가 놈의 입속으로 뛰어든 이유였다.
어차피 바깥에는 베르페드가 있다. 그가 있는 이상 바깥에서의 공격은 충분하고도 넘쳤다.
그렇기에 시안은 안쪽에서 놈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일종의 양동작전.
‘어떻게든 놈을 쓰러뜨려야 해.’
놈의 존재가 인류에게 커다란 해악이 된다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라비를 구출하기 위해서였다.
‘헥토르도 멀쩡히 살아 있었어. 그렇다면 라비도…….’
헥토르와는 경우가 다르긴 했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찾아보지 않을 수 없다.
시안이 핏빛 액체를 처리하며 차근차근 안쪽으로 들어갔다.
주위 풍경은 어느새 또다시 바뀌어 있었다.
이제는 얼마나 오래전의 것인지도 알 수 없는, 마치 고대의 유적 같은 흔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진짜일 수도 있지.’
어쩌면 진짜 고대의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령궁주는 고대의 대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며 깊숙이 들어가던 중.
무언가 강렬한 위화감이 들어왔다.
‘뭐지?’
위화감이 느껴지는 곳은 옆쪽의 유적 중 하나. 기이한 문자들이 가득 새겨진 폐허의 안이었다.
해령궁주의 뱃속에서 뭔지 모를 위험요소를 배제하고 지나칠 수는 없는 일.
시안이 확인을 위해 조심스레 폐허의 흔적으로 접근했다.
그곳에 있는 것은, 낡고 녹이 슨, 이제는 원형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 부서진 검의 파편이었다.
“이건…….”
시안이 검의 파편을 주워 들었다.
그러자, 그 파편에서 검은 기운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 익숙한 느낌에 시안의 가슴이 살짝 떨려왔다.
그것은 라비의 것과 쏙 닮은 기운이었다.
그 기운이 뭉치더니, 이내 한 사람의 형상을 이루었다.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이야.
시안을 보며 쓰게 웃고 있는 여성.
본 기억이 있었다. 일전에 해령궁주에게 한 번 쓰러지고 부상으로 기절했을 때.
그때 꿨던 꿈에 나왔던 여성이었다.
“너는…….”
-내 이름은 네메시스. 한때는 지옥의 왕이라 불렸던 존재다.
그녀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범상치 않은 정보를 툭 던졌다.
그러나, 시안은 의외로 놀라지 않았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그렇지 않을까 이미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군. 네가…….”
고대 시절 지옥계의 문을 틀어막고 있던 존재.
거인들과 해령궁주의 협공에 죽어 버리고, 후예를 위해 이 세계에 스스로의 흔적을 남겼던.
그리고, 라비를 탄생시킨 존재.
“네가 라비의 어머니로군.”
그렇게 얘기하자 네메시스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하하 미소 지었다.
-재밌는 표현을 쓰는구나. 어미라……. 그래. 그렇게 부를 수도 있을 존재긴 하지.
라비의 어머니라는 말이 썩 기분 나쁘진 않은 듯, 그녀가 훈훈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도 금세 사그라들었다.
-해령궁주를 죽이러 가느냐?
“그래. 라비를 구해야 하니까.”
결연한 말투로 그리 얘기하는 시안에게 돌아온 것은, 네메시스의 씁쓸한 대답이었다.
-안타깝지만 그를 죽여도 라비린스는 돌아오지 않는단다.
“……뭐?”
시안이 되물었다. 그런 시안을 보며 네메시스가 손가락을 들어, 시안의 심장을 콕 찍었다.
-그 아이는 해령궁주에게 죽지 않았다. 놈에게 죽은 너를 살리기 위해, 정확히는 네 심장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그 몸을 바쳤지.
네메시스의 말에 시안의 눈이 크게 뜨이며 몸이 굳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 속에서.
두근.
그의 심장만이 힘차게 박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