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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188화 (188/188)

후작가의 그림자가 살아가는 법 188화

-네놈이 어떻게……!

목을 붙잡힌 해령궁주가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당연히 시안은 놈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가 해령궁주의 목을 틀어쥐곤 더욱 강하게 벽에 몰아붙였다.

쿠웅! 놈의 몸이 벽에 파묻히다시피 하며 해령궁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렸다.

-커헉!

해령궁주가 입에서 피를 토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있는 건 차가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는 시안이었다.

시안을 보는 해령궁주의 눈이 파르르 떨려왔다.

방금까지는 미처 모르고 있었지만, 이제는 알 수 있다.

풍기는 기운은 물론이고, 스스로 문을 열어 지옥까지 쫓아오는 것을 보고도 모를 수가 없었다.

상대는 단순히 자신의 몸에서 네메시스의 힘을 뽑아간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보다 깊은. 힘의 근원 그 자체를 손에 넣었다.

마치 과거 온전했을 때의 네메시스를 보는 것만 같은 기분.

-네, 네놈이……!

파르르 떠는 해령궁주를 시안이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만 죽어.”

놈의 목을 잡은 그의 손에 밤의 오러가 모여들었다. 그 새까만 기운이 해령궁주의 몸을 쥐어짜며, 이내 그대로 터뜨려 버렸다.

눈앞에서 터져 나가는 해령궁주를 시안이 일체의 감흥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야 이런 인형 같은 껍데기 하나 터뜨리곤 기뻐할 리가 없었다.

콰과과과광!

직후 해령궁이 크게 흔들리며 위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결코 자연적으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그 위쪽에서, 해령궁주의 본신이 입을 벌리곤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아직 회복이 덜 된 거대한 고래. 그 입에 나 있는 수백 겹의 이빨이 해령궁을 갈아버리며 오로지 시안 하나를 삼키기 위해 떨어졌다.

-시안 아그리드!

공중에서 떨어지는 고래를 보며 시안이 검을 잡았다.

빙정도 백화도 뇌명도 아닌, 가장 온전한 상태의 흑검.

과거 시안의 몸에 딱 맞도록 제작했던, 그리고 라비가 가장 처음 깃들었을 때의 모습.

시안의 얼굴에 잠시 쓴웃음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그 얼굴은 단단히 굳어졌다.

그가 떨어지는 해령궁주를 바라보았다.

“나는 시안 아그리드가 아냐.”

그건 지금은 죽고 없는 아그리드 후작의 진짜 아들의 이름이다.

자신은 아그리드의 핏줄을 잇지도 않았으며 시안이라는 이름도 아니었다.

‘그 이름에 추억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오랜 기간 그 이름으로 살아온 만큼 담긴 기억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결국 자신의 이름은 따로 있었다.

“내 이름은 엘디안이다. 저승 가는 길에 기억해 두도록.”

엘디안. 고대어로 제후란 뜻을 가진 말이지만, 다른 의미 또한 가지고 있었다.

홀로 오롯한 사람.

-허튼소리 말고 뒤져!

전혀 들을 생각이 없는 해령궁주를 보며 시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떨어지는 고래를 향해 일검(一劍)을 내질렀다.

그 순간 정적이 일었다.

그 무엇도, 시안도 해령궁주도, 흥미롭게 지켜보는 마룡왕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못했다.

잠시 후.

해령궁주의 본신이 길게 반으로 갈라져 힘없이 떨어졌다.

거대한 고래에게서 솟아오른 피가 다시 바닥으로 비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쿠웅-!

쿠구구구궁!

반으로 갈라진 해령궁주의 시체가 해령궁을 완전히 박살 내며 떨어져 내렸다.

시안이 피가 묻은 흑검을 들고 녀석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끝났군.”

어느새 다가왔는지 그 옆에 마룡왕의 영혼이 자리했다.

시안이 힐긋 그를 보았다.

분명 육신을 잃고 영혼밖에 남지 않아 힘이 절반이나 깎였다고 하였음에도 이전보다 더욱 정정해 보였다.

“자네는 볼 때마다 무척 달라지는군.”

마룡왕이 피식 웃었다. 처음 보았을 때는 에버웨일에서. 원시 마법을 가지러 갔을 때 계약자의 눈을 통해서 본 것이 처음이다.

그랬던 것이 어느새 지옥계에 쳐들어와 자신을 쓰러뜨리고, 지금은 해령궁주마저 넘어섰다.

“……여기는 뭐 하러 오신 겁니까? 해령궁주에게 볼일이라도?”

“딱히. 그냥 구경 왔을 뿐이라네.”

사실 해령궁주가 죽는 모습 따위엔 전혀 흥미가 없었다. 악마가 죽고 죽이는 모습이야 숱하게 봐온 그였으니까.

그가 온 진짜 이유는 하나.

네메시스. 그 지옥의 왕의 정당한 후계의 모습을 보기 위해.

시안이 피식 웃고는 다시 문을 열었다. 현계로 통하는 문이었다.

그가 문을 넘어 황궁으로 돌아왔고, 그 옆을 마룡왕이 따라 들어왔다.

다행히 황궁 쪽도 정리가 되어가는 모습이었다.

해령궁주가 불러들였던 마물들, 그리고 해령궁주가 토해낸 악마들이 가득했었지만, 베르페드가 뛰어다니며 대부분의 녀석들을 정리한 것이다.

얼마나 칼을 휘둘렀는지 입에서 단내가 풍기는 숨을 뱉고 있을 정도였다. 하이마스터의 경지에 다다른 그가 말이다.

-와아아!

-사악한 악마들을 토벌해라!

베르페드를 중심으로 황군이 모여 악마들을 토벌한다.

이미 놈들의 기세는 죽은지 오래였다. 남은 건 잔당을 토벌하는 일뿐.

직접 나서지 않아도 모두 정리되어가는 것을 보며 시안이 검을 집어넣었다.

흑검이 검은 기운으로 화하더니, 손목이 아닌 심장으로 수납되었다.

이제 그의 각인은 손목이 아닌 심장에 있었기에.

“시안…… 아니, 엘디안이라고 했나? 앞으로 어쩔 생각인가?”

마룡왕이 물었다. 엘디안이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글쎄요.”

무엇도 정해지지 않은 애매한 말. 그러나 말과는 달리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자신은 목적한 것을 모두 이루었다. 이제야 비로소 온전한 자신이 되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다.

자신은 자유로웠다.

“일단 당장은 지옥계에 가볼까 합니다.”

“호오? 관광하기엔 그다지 좋은 곳은 아니네만.”

“찾을 게 있어서요.”

엘디안이 스스로의 심장 어림을 쓰다듬었다.

라비는 네메시스의 힘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그냥 태어난 것은 아닐 터였다.

지옥계로 가서 네메시스의 흔적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녀가 남긴 유적이든 물건이든, 혹은 종족이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라비의 흔적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좀 도와줄까?”

“서쪽에 있겠다는 말은 어떻게 된 겁니까?”

“살아온 세월이,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세월이 몇인데 깐깐하게 그러나. 잠깐 정도 외유를 할 수도 있는 게지.”

마룡왕이 허허 웃었다. 엘디안이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혼자 할 수 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그가 다시 문을 열고 사라졌다.

한창 전투의 마무리로 바쁜 황궁에서, 그의 등장과 퇴장을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에필로그(Epilogue)>

“축하드립니다, 총장님. 이제야 겨우 아카데미가 다시 문을 열었군요.”

“그러게 말일세. 아직 완전하진 않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빠르게 복구되어 다행이야.”

에버웨일에 위치한 에버웨일 아카데미. 그곳에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입학식이 열리고 있었다.

이번 입학식은 매우 특별했다.

새로 들어오는 신입생뿐만 아니라 과거에 전쟁 탓에 흩어져 버렸던 학생들까지 함께 복학하는 기념적인 행사였기 때문이다.

제레흐의 시선이 학생들을 향했다. 신입생들과 복학생들. 저마다 담소를 나누며 즐거이 얘기하는 아이들.

그러나 아무래도 한 번의 눈길이 더 가는 것은 복학생 쪽일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앞주머니에 들어가 있는 작은 범새와 이야기를 하는 푸른 머리칼의 학생도 있었고, 재잘대는 동생의 옆에서 지루하게 턱을 괴고 있는 학생도 있었다.

팔에 하얀 뱀을 두르고 있는 학생도 있었고, 누구를 찾는지 계속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검은 머리칼의 학생도 있었다.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그의 학생들.

제레흐가 쓴웃음을 지었다.

복학생들은 모두가 다시 돌아온 것은 아니다. 개중엔 사정이 있어 오지 못한 이도 있었고, 심지어 전쟁 때 큰 부상을 입은 학생들조차 있었다.

그러나 오지 못한 학생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그 학생이었다.

“시안 아그리드.”

그날 황도에서 열렸던 전투를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모습을 감춘.

후일 아그리드 후작에게 전해 듣기로는 지옥계로 건너간 것 같다고 들었다.

해령궁주라는 강대한 적을 처치하고 또 다시 지옥계에 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그렇게 그가 쓰게 웃고 있을 때.

“제 이름은 시안이 아닙니다, 총장님.”

“왁!”

갑자기 근처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제레흐가 펄쩍 뛰었다.

전성기는 지났다고 하나 여전히 하이마스터의 위용을 가진 자신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에게 아무런 기척 없이 접근하다니?

그렇게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제레흐는 한 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방금까지 그가 떠올리고 있던 학생이 아닌가?

“시안! 대체 언제 온 겐가!”

자신을 시안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으며 남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한 번 더 정정하는 것은 일이 아니었지만 시안은 그냥 내버려 두었다.

이미 그는 스스로 자유를 찾아내었고, 이제 와서 호칭 하나하나로 일희일비할 시안이 아니었다.

엘디안이라 불리든 시안이라 불리든 자신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입학식이 열린다기에 잠시 보러 왔을 뿐입니다. 금방 다시 갈 겁니다.”

“허어, 그게 무슨 섭한 소린가. 그러지 말고 이대로 다시 복학하는 게 어떤가? 행정적인 절차야 내가 알아서 해줌세.”

시안이 옅은 웃음을 지었다.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생활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겠지.

아카데미는,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인생에서 정말 많은 부분을 차지한 장소였으니까.

“물론 우리 아카데미에 더 이상 자네를 가르칠 교관은 없긴 하다만 친우들과 함께 지내는 나날이 결코 쓸모없지는 않을걸세. 여차하면 수업은 나와 1:1 대련만 하는 걸로 해도 되고.”

“총장님이 직접 말입니까?”

“자네 정도의 학생이 들어온다면 그 정도는 해야지.”

시안이 피식 웃었다.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아직 저쪽에 남은 일이 많거든요.”

“쩝. 아쉽구먼.”

시안의 거절에 제레흐가 입맛을 다셨다.

그로선 시안을 향한 단순한 호의도 물론 있었지만, 시안이 있음으로써 아카데미가 얻을 이득도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다른 학생들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테고, 여차하면 오히려 시안을 교관으로 세울까 하는 생각도 스쳐 지나갔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몸조심하고, 언제라도 또 들르게.”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들어 잘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허허허.”

농을 던지고 떠나가는 시안의 모습에 제레흐가 껄껄 웃었다.

그러고 정신을 차리니 이미 시안은 사라져 있었다.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신출귀몰한 학생이었다.

‘아니, 이젠 학생은 아니지……. 응?’

그러던 중, 제레흐가 묘한 위화감을 발견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방금까지 보고 있던 학생들을 살펴보았다.

머지않아 그는 위화감의 정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분명 방금까지 입학식의 자리에 있던 학생 하나가 어느새 증발하듯 사라져 있는 것이었다.

제레흐의 머리가 잠깐 복잡해졌다. 교관들에게 알리고 찾아와야 하나? 대체 왜 식 중에 빠져나간 거지?

그렇게 생각하던 중, 사라진 학생이 누군지 떠오른 제레흐가 살짝 한숨을 내쉬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결국 그는 학생 하나가 빠져나간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입학식은 그대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시각.

“시안!”

홀로 아카데미를 떠나는 시안을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시안이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그와 같은 검은 머리칼의 학생이 서서, 그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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