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200)

결코 좋은 뜻

으로 한 것도 아니면서! 그이더러 계집의 일도 모르는 것이라 안팎으로 소문내고자 함이지!! 

허고 고약

하기 이를 데 없구먼! 명색이 그이는 정비이니 지존이 아니냐? 감히 그런 터에 제가 아무리 

짐의 성총 

받는다 할 지라도 비의 속집을 두고 맛이 어떻느냐고 어떻게 그런 방자한 능멸을 할 수  있

느냔 말이야. 

말을 하면 다 말인가? 짐이 정궁과 교접하는 것까지 저가 손아귀에 놓고 간섭하겠다는 속셈

이니 웃기는 

일이지 무에야? 간섭하고 강새암부릴 일이 따로 있지...' 

생각하면 할수록 불쾌하고 열이 끓는 것이라. 왕은 자는 척 하면서도 이를 갈았다. 

'저가 무언데 감히 짐더러 교태전에 가라 말라 하는 것이야? 짐이 저가 가라하면 가고 가지 

말라 하면 

아니 가는 사람인가? 짐이 이 나라 강토의 주인이거늘... 짐  마음 내키면 가는 것이고 아니 

내키면 아니 

가는 것이지 감히 짐을 제 손가락 하나로 가라 말라  하여? 그래, 가라 하니 가 준다! 어차

피 짐도 궁금하

였다. 대체 그 것이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고 싶었거든.' 

돌아누운 전하, 입귀를 비틀며 심중으로 그리 중얼거리고 계신 것이다. 

어린 나이서부터 오직 한 분 원자로 떠받들음만 받고 자라오시고 또 보위에 오른 지존이시

니 왕은 뉘가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것을 딱  질색하시는 성미였다. 워낙에 희란마마를  총애하고 몽땅 

퍼주는 정해

이시니 웬만한 청을 다 들어주시니 겉으로 보기에 주상께서는 큰 마마가 시키는 대로 무작

정 하시는 허

수아비다 오해를 받으시는 것일 뿐이다.  실상 왕은 당신이 싫다하는 것은  죽어도 안 하는 

사람이었다. 

짐은 왕이다 하는 도도한 자의식은 아무리 뉘가 흠집을 내려고 하여도 절대 깨트려지지 않

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밤에 희란마마가 방자하게 전하의 그 자존심을 감히 건드린 것이라. 

명민하시고 총기 넘친다, 사리분별 척척 한다 어릴 적부터 소문나신 주상이시다. 

희란마마 저에 대한 천지분간 못하는  열정도 한때였다. 아무리 일편단심  사모한다 하여도 

처음서 경험

하였던 사춘기 불 물 못가리는 맹목적인 은애지정은 이제 슬슬 잦아지는 것이 당연지사. 약

관의 주상. 

이제는 슬슬 미혹에서 깨어나시는 중이 아닐 것이냐? 

하긴 그것이 당연한 노릇이라 할 것이다. 이미 상감마마께서  천지분간 못하고 희란마마 첩

첩한 치마폭

에서 놀아난 세월이 오륙 년인데 아무리 좋았던 정분도 시간따라 시들어 가는 것이 당연지

사. 게다가 왕 

된 노릇이 어느덧 십여 년이니 세상일 보아지는 눈이  갈수록 날카로우시다. 그런 전하께서 

희란마마 얄

팍한 속내를 읽지 못함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언제까지 누이는 짐을 열 다섯 어린애로만 보는 것이야?  그래. 짐이 청결한 누이 정조 헛

되이 깨어 그 

인생 망가뜨렸으니 그 실책 인정하여 웬만하면 오냐오냐하여 주었더니 이제는 아주 짐을 가

지고 놀려고 

하눈구먼. 흥, 어디 두고 보자!! 언제까정 짐을 가지고 이따위로 수작을 부리려는지... 언제고 

큰 코 한 

번 다칠 것이다!' 

하지만 왕은 마음속으로 갈수록 방자하여지고 간특한 계교만 늘어가는 희란마마에 대한  짜

증이 억지로 

넣었다.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 것이 다 짐이 자초한 일이니 누이에 대하여 화를 낼 수도 없다. 누이 인생을 짐이 망친 

탓이니 그 보

충은 짐이 하여주어야 그것이 도리라. 짐에게 사모지정 바쳤다가 별별 욕 다 들어먹는 이가 

바로 누이가 

아니더냐? 짐이 그런 누이 마음을 몰라주면 뉘가 알아 줄 것이냐?' 

왕 자신이 일편단심 참된 순정을 받친 터였다. 그래서 주상은 설마 희란마마가 당신과는 다

른 간교한 탐

욕으로 어린 상감마마를 유혹하였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만큼 순진하

고 정결한 

정을 아낌없이 사모하는 누이에게 주신 왕이었다. 

그 다음날 오후, 대전에서 조하 일을 마치시고 전하, 장내관을 부르셨다. 

"짐이 교태전에 들 것이다. 소란피우지 말고 너만 앞장서렸다. 그 못난 것이  세상에 망신이

라, 아기씨 얻

는다 하여 꽃씨를 뿌렸단다! 남들  보기 얼마나 어리석고 비웃음거리가 될  참이더냐? 짐이 

가서 한 마디 

경계를 할 것이다." 

전하 앞에 서서 길을 인도하는 장내관이 기가 막혀 한숨을 저절로 내쉬어졌다. 

'두 분 마마께서 가례를 치르신 지 벌써 한해가 넘어가시는데  주상전하께서 먼저 중전마마

를 찾아가는 

것이 오늘로 처음이시구나. 그것도 연분 맺으시려하는 뜻이 아니라 중전마마 어리석은 행동 

경계하시겠

다 함이라. 중전마마를 무안주시고 꾸짖음 내리려고 납시는  발길이라. 참으로 가엾으신 분, 

중전마마이

시구나. 어질고 바르시니 생보살이라 하여도 모자랄 분이 바로  우리 중전마마인데 이리 지

아비이신 전

하께서 정이 없으시니 만날 소박감에 조롱거리로  삼으시는 것이다. 휴우... 내가 주상  전하 

곁서 보필을 

하는 처지로 전하의 명민한 눈을 밝혀드리지 못한 참이니 천벌을 받을 놈이로다..' 

늙어 짓물어진 장내관 눈에 슬며시 눈물이 돋았다. 교태전 대문을 넘어가는 걸음에 힘이 자

꾸만 빠졌다. 

'선대왕마마께서 그저 너에게 동궁을 잘 부탁하마 몇  번이고 당부당부 하셨는데... 그저 세

자가 옳은 사

람 노릇하도록 너가 곁서 잘 일러드리고 보살펴드려라 그리 하교하시던 옥음이 아직도 쟁쟁

하거만... 선

대왕전하... 이 불충한 것이 저승에 가면 전하 용안을 다시 뵈올 면목이 없나이다.' 

사람이 육십이 넘어가면 어느 정도  눈이 트이고 사리분별이 되어지는  것이었다. 장내관은 

어리디 어린 

중전마마께서 가례 첫날로 대전마마께 소박 맞은 그때서부터 방탕한 왕의 잔인한  조롱거리

가 되는 모양

을 가장 가까운 데서 줄곳 보아왔던 터였다. 

뼈대있는 집안의 곧은 처자이셨다. 초간택  때 주상의 대숙 진성대군께서  지나치시는 말로 

자산(현성 부

원군의 호)의 따님이 들어왔다 하셨다. 

선대왕마마께서 살아 계실 적에 도승지로 입시하여 모신 이라,  선대왕께서 가장 아낀 신하

였었다. 고결

하고 민첩하여 아낌을 받았으되 병이 들어 조하를 떠난 지 오랜 터인데 언젠가 느지막히 외

따님을 얻었

다 하였다. 그이의 딸이 기이하다 하니 욱제(전하의 자)의 비로 올릴 것이다 선대왕께서 하

신 말씀을 기

억한 터로 반가와 일부러 찾아보았었다. 

첫눈에 보기에는 여위고 보잘것없이 수수한 용모였다. 그러나 자태가 기품이 있었고 총명하

나 순후한 

눈빛이 어질어 보이는 처자였다. 그 총명함이며 사리분별 밝게  내리는 면이 바로 군계일학

(群鷄一鶴)이

라. 둘러칠 인척이나 보아줄 뒷곁 하나 없으며 미색도 볼품없는 그 처자가 왕대비전 눈에까

지 뜨였다. 

다른 처자들 모두 제 아비 성명 적힌 방석에 무심코 앉은 터이니 오직 한 분 그 분  소저만

이 차마 자식된 

도리로 아비 이름을 깔고 앉지 못한다 하여 방석을 뒤로 물리고 맨바닥에 곱게 앉아있었다 

하였다. 

어질고 효심 지극하니 저 처자를 삼간택에 올려라 하신 분부가 바로 게에서 나온 것이었다. 

하물며 그리

하여 최종간택에 오르신 그 처자가 눈높은  주상 전하의 낙점을 받아 마지막에  중전마마로 

책봉이 된 것

은 더 놀라운 일이었다. 

장내관은 하루 조용하게 입궐하신 진성 대군께 여쭈어보았다. 

"대군대감마님. 어이하여 주상전하께서 자산의 따님을  중전마마로 간택하셨는지 쇤네는 아

직도 그 이유

를 도모지 모르겠나이다. 전하께서 선대왕마마의 유훈(遺訓)을 알고 계시는 것도 아니지 않

사옵니까?" 

"그것이 바로 타고난 제 복이라 하는 것일세! 이보게, 장내관.  내가 주상께서 그 처자를 중

전마마로 간택

하신 이유에 대하여 알고는 있지만 말은  아니 하겠어. 허나 나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새 중전마마

께서는 전하의 홍복이 되실 것이며 이 나라 사직의 든든한  반석 노릇을 하실 분일세. 비록 

초반 몇 년은 

주상의 괄세 받으시고 방자한 월성궁 계집에 의해 다소간 눈물 빼실 터이지만 반드시 이겨

내시고 주상 

성총 독점하실 분이라네. 내가 주상의 보령 높아져서 한시바삐  국혼을 치러야 한다는 종실

과 중신들 공

론을 몇 년씩이나 막은 것은 워낙에 전하께서 일념, 월성궁에 쏠린 총애를 어찌하지 못하시

고 혼인은 싫

다 도리질 치신 것을 존중한 것도 있으나  실상은 새 중전마마가 되신 김씨 소저께서 연치 

차지 않아 기

다린 것이었어. 초반에 다소 마음 고생을 하시고 힘든  일을 겪으실 터이지만 중전마마께서

는 반드시 의

젓한 국모가 되실 것이니 그대가 전하 곁서  항시 중전마마에 대한 좋은 말씀 많이 아뢰고 

중궁전에 발길

을 한 번이라도 더 하실 수 있게 옆에서 보필하여 주게나. 이는 돌아가신 형님 전하께서 당

부하신 뜻이

기도 하니 내가 부탁하네." 

진성 대군의 말이 아니었다 하여도  아름다우시구나 칭찬이 저절로 흘렀다.  어린 중전마마 

열 다섯 나이

로 교태전 주인이 되셨는데 그 분 야무진 덕성이며 어진 처신은 실로 나무랄 데가 없었다. 

영리하시고 알뜰하셨으며 또 다정하시었다. 

양반가 엄한 품위가 몸에 배인 터이니 법도 어긋난 행동은 추호도 없으셨다. 또 생보살이라 

하여도 모자

랄 것이니 아무리 천한 아랫것들도  웃음 머금어 이름을 불러주시었다.  아랫것들이 잘못을 

하여도 벌하

기보다는 찬찬히 잘못을 일러주시고  덮어주신다 윤상궁조차 감탄하였다.  어느 누구에게도 

모진 말 한 

번 아니하시고 나쁜 구설에 참여치 않으시며 잔잔한 낯빛에 항시 어진 미소 머금으셨다. 처

음에는 다소 

조촐하고 못났다 손가락질 받던 그 옥안이 자꾸만 귀하여지고 어여쁘게 느껴지는 것은 심중

의 덕성이 

그리도 빛이 나기 덕분이라. 

'그런데 오직 한 분. 이렇게 지아비이신 전하께서만 중전마마를 그토록 꺼리시고 싫다 내치

시니 이는 오

직 월성궁 큰마마께서 하냥 귀밑 속살거림으로 두 분을 이간질한 때문이겠지.  항시 중전마

마를 음해하

고 밉게 보라 충동질하는 것이니 어찌  전하께서 중전마마를 바른 눈으로 보실 수  있겠어? 

그저 애욕에 

취한 정분은 일시적인 것이고참다운 심덕에서 우러난 은애지정은 영원한 것일진대 명민하신 

전하께서 

어찌 여인네 일에서만은 이리 눈이 어두우신 것일까?..' 

혼인을 하신 지 일 년 만인데 전하께서 대조전에 듭신 것은 그야말로 쌀에 낀 뉘처럼  드문

터라, 중궁전 

나인들은 상감마마 맞이하사 황황히 고개를 조아렸다. 

"소동 피울 것 없다! 짐이 잠시 비(妃)를 보자 함이다. 어디 계시느냐?" 

"망극하옵니다, 전하. 지금 중전마마께서 뒤란 화계에 나가 계십니다." 

교태전과 금원을 구분짓는 언덕아래 석축을 쌓고 화계를 꾸며놓았다.  왕비는 그 한 켠에다 

밭을 일구고 

씨를 뿌렸던 터였다. 왕은 그리로 가자 하였다. 월동문 넘어 손바닥만하게 일군 꽃밭 안에서 

왕비는 호

미를 들고 서서 싹이 난 것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장히도 어여쁘게 돋아는 새싹일지라! 두고 보소! 꽃이 피면 반드시 아기씨가 올 것이오. 그

런데 어찌하

여 그대들은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모다 웃고만 있는 것이오? 내 말이 틀렸소? 아기씨가 그

렇게 생기는 

것이 아니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