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못난 것....
월동문 넘어서던 왕은 중전의 목소리에 그만 기가 막혀 발을 멈추고 말았다. 중전마마, 당의
도 아니 입
고 은조사 깨끼저고리에 물빛 항라 치맛자락 여미고서 그저 봉황잠 찌른 낭자머리 하였다.
손수 호미 들
어 김을 매었던 터인지 그 저고리 소매 하나는 동동 걷어올린 터였다.
못나고 여위어서 갈가마귀 같다 놀림받을 만도 한 터이다. 그러나 호미들고 파란 새싹 내려
다보며 순수
하게 미소짓는 있는 모양이 귀엽고도 애처로울 정도로 순진하였다.
의완 누이같다.... 왕은 문 앞에 서서 왕비의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다시 그 생각을 한다.
가례 첫날 밤에 왕 당신이 족두리도 내려주지 않고 철저하게 외면하고 박대한 터로 윗목에
그래도 쓰러
져 잠을 자던 왕비의 가련한 모습을 바라보며 느꼈던 첫인상이었다. 왕의 유일한 형제이나
이미 죽은 누
이 의완 옹주의 영상이 왕비의 얼굴과 겹쳤다. 너무 어려서 죽은 터이니 아른아른 아슴한
먼 기억이지만
저이처럼 작고 귀엽고 순진하였다 하는 인상만 왕의 가슴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 누이의 기
억 때문일
까?
'저렇게 어리고 어리석을 정도로 순수한 사람을 차마 건드리어 깨뜨리지 못할 것이다.'
스무 살 젊은 왕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였다.
하물며 저렇게 맑고 순수한 사람을 함부로 건드리고서 나중에 조롱거리로나 삼아 갈가마귀
속집 맛이
어떠합네 저떠합네 떠드는 것도 절대로 할 일이 아니다 싶으시다. 방자한 희란마마 항시 중
전 상대로 별
일도 아닌 것을 트집거리 비웃음삼아 술안주처럼 주구장창 씹어대던 것을 아는 왕이다. 이
밤도 중궁전
서 자고 나가면 희란마마 필시 다잡아 전하를 앉혀놓고 미주알 고주알 물어대고 박장대소
잔인한 놀림
감으로 삼을 게 분명하다 함을 알고 있었다. 차마 그런 일은 더 못할 노릇이다. 그는 천벌을
받을 것이
야. 왕은 그 순간 뉘우치는 것이다.
"주상 전하!! 망극하옵니다! 어찌 예까지 옥보를 하셨는지요?"
윤상궁이 제일 먼저 상감마마께서 문 앞에 서 계신 것을 발견하여 해연히 부르짖었다. 왕비
가 아연 놀라
왕 쪽을 본능적으로 돌아본다. 두 사람 눈이 마주친 순간 중전의 얼굴에 스미어있던 미소가
물에 씻은
듯 싹 가시고 그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린다. 항시 통박받고 무안하게 능멸받던 터이니 그
녀는 왕만 보
면 일단 놀라서 달달 떠는 것이 버릇이었다.
왕은 비웃음을 반만 물고 발을 옮기어 중궁이 일군 꽃밭 경계까지 와서 발을 멈춘다. 혹여
사나운 그 발
이 일껏 일군 밭을 짓밟아 버리지는 않을까 사뭇 두려워하는 작은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
았다. 꽃씨 뿌
리지 말고 짐더러 안아달라 하지. 입까지 밀려나온 한마디를 꾹 참았다.
"소문이 하도 장하더군! 궁금하여서 와보았다. 중궁전에 아기씨 본다 씨뿌려 밭을 일구었다
는 어떻게 된
것인지... 그래 밭에 아기씨가 열렸던가?"
"아직은.. 꽃이 피지 않아서 그런 터입니다."
새빨갛게 붉어진 얼굴을 차마 들지 못하고 왕비는 들릴락 말락 작은 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왕은 피식
웃었다.
"사람과 꽃은 생래가 다른데 꽃씨를 뿌린들 어찌 아기씨를 얻는다 이런 짓을 하는 것이야?
어리석고 멍
청하긴!!... 짐이 중궁전 들어도 이런 멍청한 짓이나 하고 있으니 무슨 보람이 있을 것인가?
헛된 짓 그
만 집어치우고 들어오라. 집이 서온돌 들것이다."
가례 치른 후 전하께서 서온돌 듭시겠다한 분부는 처음이시다. 드디어 전하께서 중전마마를
상대로 성
은을 주시려나보다 지레 짐작한 중궁전 아랫것들이 아연 난리가 난 것이다.
나인들에게 붙잡혀 욕간하고 분단장하여 밤시중 들 준비하는 중전마마 그러나 아무 것도 모
르고 그저
황홀하다.
"윤상궁, 전하 용안 보았소? 어찌 그리 늠름하고도 잘나셨을까? 나는 안즉까정 그리 잘난
분은 처음 보
았다오!! 헌데 처음서 전하 오신 것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오. 내가 꽃밭 만든 것
을 어리석다
꾸짖으려 오신 줄 알았거든."
오랜만에 사모하는 지아비 용안을 마음껏 뵈올 수 있게된 중전마마. 그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며 과묵
하신 분이 제일 믿는 윤상궁을 상대로 종알종알 수다를 떨었다. 발그레하니 볼에 능금물이
가라앉았다.
달포에 두 번. 반드시 상감마마께서 교태전에 듭시어 중저마마와 함께 지내셔야한다는 것이
궐의 법도
였다. 처음 가례를 치르고는 한동안, 법도고 나발이고 상관없다 하시며 발길도 얼씬 아니 하
였으되 예조
며 중신들 상소가 하도 빗발치니 귀찮아진 왕은 면피하는 의미로 해가 바뀌면서부터는 그날
이 되면 대
조전에 듭시는 척은 하였다.
하지만 희란마마가 하도 강새암에 단속을 하니 전하, 교태전에 듭시긴 하되 중전마마 계시
는 서온돌에
는 아예 건너가지도 않았다. 동온돌에서 잠만 주무시는 것이 버릇이었다. 아니면 조하 일이
바쁘다 하시
며 들어갔다 금새 다시 우원전 침전으로 건너가곤 하였다. 그래서 소박데기 어린 중전은 왕
이 교태전에
들었다 하여도 지아비 용안을 뵙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날 기별도 없이 갑
자기 밝은 시
각에 교태전에 들어오셨으니 중전마마 그 이유는 두어 두고라도 전하의 잘난 용안을 마음껏
훔쳐 볼 수
있든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하고 즐거워서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윤상궁은 좀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지금 그녀는 어린 중전마마에게 남녀간의 교접하는 일에
대하여 잠
시 귀뜸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었다.
눈치라 빠른 터이다. 늙은 그녀는 아직 전하께서 중전마마 상대로 그 욕심을 채울 뜻이 없
다 함을 직감
하였다. 아마 중전마마께서 아기씨 얻는다 하여 꽃씨를 뿌렸더라 하는 풍문 들으시고 하도
어이가 없으
시고 어리석다 싶으시니 중전마마 한 번 무안주러 나오신 것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나쁜 일
도 아닌데 대
놓고 능멸하고 꾸짖을 일도 아니라 말씀은 그만 두셨으리라.
그냥 나가시기 면구하시니 서온돌에 자리 펴라 하시는 것이 분명하였다. 항시 풍염한 희란
마마 품속에
서 물리도록 춘몽(春夢)을 꾸시는 분이다. 계집맛 무엇이 모자라서 못나고 아직은 어린 계집
아이에 불
과한 중전마마에게 사내 욕심을 느끼실 것이더냐?
간지러운 입을 몇 번이고 달싹이다가 윤상궁은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만 입을 다물고만
다.
전하, 동온돌에서서 자리옷 준비하시고 내관 안내를 받아 초야 이후 처음으로 중전마마 침
전인 서온돌
로 듭시었다. 지밀 상궁이 나인과 더불어 금침 두 채를 나란히 펴고 있었다.
"망극하옵니다, 중전마마께서 주상전하께서 이 못난 것 살 닿기 싫어하시니 금침 두 채 펴
라 하셨나이
다. 동온돌로 건너가실 것이면 게에다 자리 마련할 것입니다."
"웃기는 말이로구나. 짐더러 서온돌을 하냥 외면한다 또다시 구설들을 일 있다 하더냐? 되
었다. 예서 잘
것이다. 들어오든 말든 그것은 비의 마음이니라!"
퉁명스레 쏘아부치는 전하의 목청이 방문을 넘는다. 자리옷 갈아입고 상구들 부액받아 들어
오는 중전마
마 귀에 화살처럼 꽂히는 목소리이다.
'어찌하여 이리 기별도 없이 하냥 외면하시던 교태전에 듭신 것인 줄 몰랐더니... 아마 중신
들에게 중궁
전 외면한다 한마디 구설을 들으셨나 보구나. 자존심이 강하시고 도도하신 터라 아주 작은
쓴 소리도 듣
기 싫어하시는 부이니 이 날서 면피하려 억지로 듭신 것이라...'
수줍은 중전마마 여린 방심에 깊은 상채기가 또 하나 늘어난다. 하지만 왕비는 억지로 스스
로를 위로한
다.
'하지만 전하께서 주무시면 저 잘난 용안 마음껏 바라볼 수 있으니 얼마나 행운이더냐? 이
날서는 대놓
고 면박주시지고 않고 은근히 점잖으시니 휴우, 다행이다. 나는 그만 아까 꽃밭에서 전하께
서 큰 호령
주시고 짓밟아버리실 줄 알고 얼마나 떨렸는지... 그런 일은 아니하시니 참으로 다행이야.'
왕은 왕비가 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것도 아랑곳 않고 손수 금침 훨훨 걷고 대자로 드러누웠
다. 여인네
지분 아니 묻히고 그저 잠만 자리라 하는 것에 오랜만에 홀가분하시다.
흐드러진 모란꽃 마냥 만개한 희란마마 풍염한 여체를 끼고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하지
만 아무리 건
강하시고 그 재미 즐기시는 분이라 하여도 인간인지라 지치고 내키지 않을 적도 있으셨다.
늘상 모자라
다 앙탈하는 희란마마 불타는 육신을 안고 쓰다듬으며 항시 웃기는 하였다. 허되 그녀를 만
족시켜주지
못하면 어쩌나 부담도 솔직히 제법 있었다.
때때로 군입거리라, 야들탱탱한 열일곱 열 여덟 어여쁜 꽃을 새로 꺾으실 참에도 그러하였
다. 처녀진미
맛매 보시는 재미야 장하시지만 짐은 왕이니 그 일도 왕답게 일등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왕을 지치
게 만드는 이유였다.
궐 안팎 모든 계집들이 어찌하면 한 번 눈길 끌어볼까, 손목 한 번 잡아볼까 추파 보내고
은근한 시선 흘
리었다. 젊은 상감마마, 꽃밭 속에 단 한 마리 나비라 제 맘대로 즐기시기야 하시지만 항시
수많은 꽃들
이 흘리는 진한 방향에 취하여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녹신한 즐거움이 있다
하여도 늘상
밤마다 되풀이되는 계집들과의 밤일에 이제는 시들하다 물리는 면도 없다 말못하시는 터이
다.
그런데 중궁전에 드니 이 못난 안해가 하는 양 보소?
철이 없고 어리석어 안아달라 요구하지도 않는구나. 이렇게 아예 금침까지 두 개 펴고 살
닿는 것까지
저가 알아서 피해주니 전하, 더 홀가분하시다. 그리하여 일년만에 서온돌 처음 듭신 주상 전
하, 아무 기
대도 요구도 없는 중전마마가 옆에 있거나 말거나 그저 달게 잠만 주무신다.
주상 전하께서 주무시기 기다려 살며시 중전도 옆의 이불에 파고들었다. 지아비 왕이 모처
럼만에 아무
억지도 트집도 화냄도 없이 주무시는 것이 너무 고맙고도 황공하였다.
이미 잠이 드신 잘난 전하의 용안을 중전마마 오랜만에 볼 붉히며 실컷 바라보는구나.
참말 잘난 분이시라! 한 번만 만져 보았으면 좋겠다...
중전마마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이불 바깥으로 나온 전하의 어수를 살짝
만져본다.
크고 단단하고 정결한 손이다. 이 손으로 나를 안아주신다면 참 좋겠다... 어린 중전마마 그
생각만으로도 너무 부끄러워 화들짝 이불 뒤집어쓰고 숨어버린다.
그리하여 두 지존 마마. 가례 치른 지 한 해만에 간신히 한 방에서 주무시기는 하는데 오호
통재라! 또 그렇게 따로 잠만 주무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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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밤 왕은 꿈속에서 향기로운 꽃 한 송이를 보았다.
부용도 장미화도 아닌, 전설 속의 우담화가 그럴까?
오색의 서기가 서리고 어린아이 얼굴 만한 커다란 꽃인데 심신을 청량하게 하여주는 기이한
향기를 풍
겼다. 잡힐 듯 말 듯 손아래서 흔들리고 있는 그 아름답고 귀한 꽃을 잡으려 손을 내밀다가
꿈에서 깼다.
무엇인가 허전하고 아쉬워 돌아눕다가 따뜻한 그 무엇이 몸 가까이에 있다함을 느꼈다. 왕
은 눈을 번쩍
떴다.
나란히 펴놓은 요 두개. 각자 한 귀퉁이에 파고들어 남인 듯 웅크리고 잠이 들었던 두 분
전하이시다. 잠
결이리라. 몸을 뒤척이다가 아마도 서로에게 가까이 온 것이겠지. 왕비는 아무 것도 모르고
왕이 누웠던
요 갈피쯤에 반쯤 몸을 걸치고 들어와 있었다. 얌전한 얼굴과는 잠버릇은 다소 말괄량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