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가 막히도다. 차마 눈뜨고는 보지 못할 고약하고 방자한 계집! 저가 성총받는 희첩이면
다이더냐? 아
무리 그리하여도 할 말 아니할 말은 가려서 해야하고 법도가 엄연하니 당연히 해야할 도리
가 있는 것이
지. 흥, 열흘 붉은 꽃이 없다 허더라. 저토록 천지분간 못하고 날뛰니 주상의 그 성총이 언
제까지 이어질
것인지 어디 한 번 두고 보자구나! 타고나기 영명하시고 나날이 장성하여 지시는 분이라,
전하께서 영원
히 네 간교한 치마폭에 싸여 미혹하고만 계실 줄 알더냐? 성총 떨어진 그 훗날. 내가 간특
한 너의 운명
이 어찌 몰락할지 한 번 똑똑히 두고 볼 것이다!'
엄상궁은 섬돌 내려서서 따라나온 나인이 신겨주는 신발을 신으며 이를 갈았다.
대전의 제조상궁이라 할 것이면 조정의 관직으로 치면 영의정이라 할 만치 위세 높은 자리
이다. 전하의
가장 가까이에서 궐 안의 사사로운 모든 일을 관장하는 이가 바로 제조상궁인 엄상궁 저라.
조하 신료들
저차도 엄상궁 저에게는 함부로 하대를 못하는 형편이 아니더냐 이 말이다.
사랑하는 누이가 생일을 맞이하였으니 엄상궁 너가 선물 안고 나갔다 오너라 특별히 전하께
서 하명을
하시었다. 서찰 나르고 봉명하는 전언을 놓아두고 굳이 제조상궁인 저가 나온 것이다. 오직
월성궁 마마
에게만 대하는 왕의 특별한 사랑이었다. 조금이나마 사람의 예의를 안다 할 것이면 얼마나
그녀를 귀하
게 맞이하고 감격하여야 하는가?
아무리 월성궁 마마 저가 위세 당당하고 전하를 손아귀에 넣어 이래라 저래라 한다 하지만
사람으로서
의 도리가 있음이다. 주상 성체를 모시는 잉첩이니 궐의 법도를 따라야 그것이 기본이었다.
헌데 중전마마도 감히 하대하지 못하는 제조상궁인 저를 앞에 두고 앉으란 말도 없이 욕간
통 안에 오만
하게 앉아 맞이하는 것에서부터 엄상궁은 기가 막힌 터였다. 아무리 그러하여도 그렇지 어
찌 의대도 갖
추지 않고 제조상궁인 저를 맞이한다 이 말인가? 천하의 지존이신 전하야 거칠 것도 가릴
것도 없으니
그런 일을 하신다지만 그러나 겨우 잉첩인 주제에 대전의 제조상궁인 나를 이리 대접해? 세
상 어떤 이
가 그리 방자하고 오만할 것인가?
'게다가 전하께서 하사하신 선물을 제 손으로도 아니 열어보고 아랫것 시켜 열어? 같잖은
것! 휘황찬란
한 패물도 시답잖다는 듯이 모자라다 앙탈이라. 감히 제깐 것이 무엇이라고 보패 떨잠 세
개 하겠다 난
리인 것이냐? 중궁전에 앉으신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위세이니 그러니까 저가 바로 중전이다
대놓고 방
자한 위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더냐? 흥, 이러다가 언제고 주상 성총 홀라당 빼앗기고 말지!
사람 눈이라
하는 것은 다 똑같은 것이다. 나날이 장성하사 명민하시고 눈이 밝아지시는 전하께서 이 고
약한 작태를
모르실 것인가? 그때가 오면 저 계집이 어찌할지 두고보자! 이날 제게 당한 수모를 반드시
갚을 것이
다!'
엄상궁은 속으로 이를 갈며 타고 온 가마가 서있는 월동문으로 나갔다. 대전에서 제조상궁
님이 나오셨
다 하니 좌의정 정실이지 희란마마 모친인 부부인이 대접한다 상을 들고 나오다가 깜짝 놀
라 부르짖었
다.
"아이고, 마마님! 어찌 이리 빨리 돌아서시는지요? 별찬은 없으되 정성껏 상을 장만하였으니
잔치집에
와서 아침상은 받고 가셔야지요!"
"생각 없나이다. 전하께서 성정이 급하시니 제게 심부름 보내놓고 들어오나 아니 들어오나
그저 기다리
실 것입니다. 빨리 돌아가야지요! 얘들아, 가자!"
기분이 불쾌하니 좋은 얼굴이 될 리가 없다. 엄상궁은 부부인은 바로 바라다보지도 않고 도
도하게 가마
에 올라탔다. 구종들이 금세 가마를 매고 월성궁을 떠나버렸다. 멍하니 서있던 부부인, 직감
하기로 몹시
도 그 제조상궁 얼굴에 불쾌함이 크니 필시 별당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다 싶었다.
급히 별당으로 들어가서 희란마마에게 물었다. 대체 제조상궁께서 그리 황황히 뒤도 아니
돌아보고 가
시는 이유가 무엇이오? 하였더니 제 방자한 딸년이 엄청난 결례를 한 것이라. 부부인이 희
란마마를 앞
에 두고 나직하게 탄식을 하였다.
"근심이오! 큰마마. 다른 분도 아니고 주상 전하 선물 안고 오신 제조상궁님을 그렇게 무심
하게 대접을
하여 보내시는 것이오? 걱정이외다."
"아니, 우리 어머님께서는 소녀가 무엇을 잘못하였다 이 좋은 날 아침부터 꾸지람을 하실
까? 홋호호. 별
일 아니옵니다 그깟 상궁이 노여워보았자지요!"
"... 큰마마. 그리 생각을 하시면은 아니 됩니다. 엄상궁은 전하의 가장 가까이 같이 계시고
항시 곁에서
도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까? 그런 분이 마마에게 못마땅하여 대전마마께 항시 속살거리
기를 이간
질하여 음해라도 한다면은 어찌 하시려오? 선대왕 전하시절부터 모시던 분인지라, 전하께서
예전부터
오직 신임하는 이가 제조상궁과 장태감 두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이가 이번 일로 마마께 앙
심을 품어 자
꾸 큰마마에 대하여 좋지 못한 소리를 전하 귀에 속살거리기라도 하여 보시오. 거짓도 자꾸
들으면 참이
된답니다. 이번서는 정말 잘못 하셨소!"
"아이, 어머님은 이렇게 쓸 데 없는 걱정을 자주 하시더라? 어머님, 제가 누구입니까? 전하
께 큰마마라
하는 칭호를 받은 희란이예요! 전하께서 이 몸 성총 주시기 하냥 일편단심인데, 그깟 늙은
상궁 하나 이
간질에 깨여질 정분인 줄 아십니까? 그만하세요! 홋호호. 그리 그이가 꺼리면은 전하께서
이 밤에 오신
다 하였으니 저가 그것을 제조상궁서 끌어내리렵니다? 대전의 홍상궁이 이 희란의 편이니
그이를 제조
상궁으로 앉힐 것입니다. 두고 보시어요!"
끝까지 제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희란마마 대수롭지 않다 넘기었다. 엄상궁 그 것이 나를
음해한다 할
것이면 주상을 움직여 그년을 내쫓아 버리지요 자신만만 장담하는 딸 앞에서 부부인은 쯧쯧
하였다.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하였는데... 큰마마. 이 어미가 자꾸만 근심이오! 성총 장할
적에 대전이
고 중궁전이고 창희궁이고 모두다 잘하여서 인덕을 쌓아두어야지요. 그래야 훗날, 만에 하나
라도 전하
의 성총을 잃어버리는 일이라도 생기면은 그 때 쌓아둔 인덕으로 마마의 안위를 도모하시는
것이거늘...
이리 자꾸만 자신만만하시어 뒷날은 생각지 않으시고 전하 근처에 있는 사람들을 적으로 돌
리시오? 어
찌 할 것입니까? 내가 자꾸 걱정이 드오!"
그러나 희란마마 한참 무슨 의대 내여 입나 그 궁리인데 찬찬한 제 어미 말이 귀에 들어올
것인가? 좋은
날, 잔소리는 듣기 싫으니 나가시오 앙칼지게 고함질까지 어미에게 치는구나.
"어머니 그 되풀이되는 걱정소리에 아주 귀에 딱지가 앉았어요! 그러니까 어머니 그 말씀이
대체 무엇입
니까? 훗날 이 희란이 주상의 성총을 홀라당 잃을 것이니 지금서 후사 도모하오 이런 뜻입
니까? 어머니
께서 촛불켜고 성총 잃어라 치성을 들여도 이 희란은 주상 성총 아니 뺏길 것이니 근심말고
나가소서.
오늘 같이 좋은 날, 꼭 이리 사람 기분을 상하게 하여야 속이 시원하십니까?"
교만하고 방자한 버릇이 하늘에 찔렀으니 누가 충고하는 소리인들 귀에 들어올 것인가? 부
부인은 앙칼
진 딸년의 패악에 그만 기가 꺾였다. 쫓기듯이 별당을 나오고 말았다. 돌아서는 늙은 어미의
얼굴에 첩
첩히 서린 근심이 먹구름이었다.
한편 궁굴로 돌아간 엄상궁은 전하께 돌아왔다 고변을 하였다. 마침 조수라를 받으시던 참
이다. 왕은 윗
목에 앉은 그녀에게 기분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기대하는 빛이 용안에 역력하였다.
"그래, 누이가 기뻐하더냐? 짐이 특별히 대국에서 맞추어 온 패물이라 전하였지? 아주 눈이
휘둥그레졌
을 것이다. 핫하하, 그이가 모란 꽃처럼 어여쁘니 그 떨잠을 꽂을 것이면 더 고와 보일 것
이야."
그러나 윗목의 엄상궁, 잠잠히 대답이 없었다. 전하, 의아하여 어찌 입을 봉하고 있는고? 하
고 되물으셨
다.
"엄상궁. 누이를 만나지 못했느냐? 아니면 무슨 일이 게서 있었던 것이냐?"
"망극하옵니다, 전하. 큰마마를 뵙기는 하였사온데......"
"누이를 보았기는 하였는데?.... 그 다음은 무엇이냐? 짐작하기로, 무엇인가 짐에게 고변할
말이 있는 것
이다. 말을 하라. 무슨 일이 있었더냐?"
"...망극하옵니다. 이른 시각이라 그러하였을 것이지만.... 욕간 중이라 하시어 기다린다 하였
더니 그냥
들어오라 하시는 것입니다. 하여 욕간실에 쇤네가 선물 안고 들어갔나이다. 명색이 아무리
쇤네가 천것
이나 주상 전하의 선물을 안고 간 처지가 아니옵니까?"
"뭐라? 누이가 너를 욕간통 안에서 맞이하였다고?"
".....몇번을 생각하여 보아도 민망하기 이를 데 없나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의대는 갖추
시고 손을
맞으셔야 한다 이리 생각을 한 터입니다. 헌데 큰마마께서 실로 저를 무안하게 하시니 앉으
란 말도 없이
손을 내미시는 것입니다. 패물함을 드렸더니 손수도 아니고 아랫것을 시켜 열게 하는데 감
탄은커녕, 떨
잠이 어째서 세 개가 아니냐고 노염을 내시는 것이라. 쇤네가 망극하고 기가 막히어 그저
말도 못하고
돌아서 나왔나이다."
전하의 용안이 갑자기 굳어졌다. 눈을 치뜨고 되물으시는 옥음에 노한 기가 어렸다. 참으로
그 계집, 웃
기고 가당찮다 하시는 뜻이라.
"무어라 하였다고? 누이가 떨잠이 어째서 세 개가 아니고 두 개냐고 노염을 내여?"
"예, 전하. 떨잠 셋은 오직 중전마마나 하시는 것일지니 대체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저가
모를 일입니
다. 민망하고 망극하여 할 말을 잊은 차이나 더없이 망극한 말씀이라. 버릇없다 생각하였으
되 간언을 드
려야 할 지니. 그런 말을 듣고서 쇤네가 어찌 입을 봉하고 있을 것입니까? 천하에서 오직
중전마마께서
나 세 개를 꽂으시는 떨잠인데 어찌 큰마마께서 그 욕심을 내시느냐 아뢰었더니... 팩하니
신경질을 부
리시고..."
채 말도 끝나기 전에 전하께서 들고 계시던 수저를 탁하고 상에 놓으셨다. 용안에 불쾌감이
서리서리 내
리셨다. 희란마마가 주상 전하의 선물을 하찮게 여겼다 하여 노염이 나신 것이냐, 아니면은
아무리 그래
도 사랑하는 사람이 아랫것에게 비난을 받아서 기분이 나쁘신 것이더냐?
"그만 하라. 짐이 들을 것은 다 들었다!"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로서 고변을 하나이다. 쇤네는 물러 가리이까?"
"알았다. 너가 수고하였다. 나가 보아라."
차수 대접 올려라하시었다. 옆에 앉은 기미 상궁이 아무리 권하여도 반도 비우지 않으신 수
라상을 물러
라 하시었다. 그러고서 전하, 서재인 기오헌으로 나가셨는데 서안에 팔을 괴고 한참 생각에
잠기시는 용
안이 굳었다. 실쭉 입꼬리가 심술맞게 비틀어졌다.
'감히 누이가 짐의 선물을 안고 간 엄상궁을 그리 무안하게 하고 박대를 해? 저이가 입이
무겁고 짐의
어떤 일에도 입을 열지 않는 속 깊은 사람인 줄은 짐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헌데 엄상
궁이 저리 노염
이 심할 참이면은 월성궁에서 보통 무안을 당한 게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