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하더니, 딱 그 짝이야. 어린 사람이라 미물도 작고 어린것을 좋아
하는 게지.
그대는 대체 언제쯤 자랄 생각이야?"
그러고서 문이 닫혔다. 바깥에서 두런두런 하더니 가볍게 덩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갑작스
럽게 다가
온 왕의 흔적이 너무 강하여 중전은 가만히 두 손을 모아 가슴에 갖다댔다. 모질고 퉁명스
런 말로 북 그
어진 가슴의 붉은 상채기가 다시 아물어지는 느낌이었다. 살며시 고개숙인 중전의 입술에
보스스 여린
미소가 처음으로 떠올랐다.
법도가 그러하니, 왕은 말을 타고 중전은 덩을 타고 일단 천추전의 앞마당으로 나와 조하백
관의 하례를
받았다. 행렬을 지어 사직단으로 가서 제사를 지내고 난 후 두 갈래로 갈라지는 일행이라.
왕의 일행이
선농단 쪽이고 중전께서는 잠사원 쪽으로 향하였다. 빈말이라도 한 마디 금일, 수고하오, 이
리 하시면
좋으련만. 일별도 아니하고 휭하니 가버리시는 전하이시다. 허나 중전마마 섭섭한 마음 꾹
눌렀다. 허기
는 언제 전하께서 이 몸 돌아보시기라도 하였더냐? 그나마 훤칠하시고 잘나신 용안을 한 번
곁눈질이라
도 하였으니 다행이지.
중전이 전하 용안을 뵈옵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한가위 때 종묘 사직에 제례를 올릴
때 뵈옵고 이
번이라. 근 한 달 만이었다. 같은 궐에서 부부지간으로 사는 분들이 이리 멀고 남들만 같으
니 어찌 하
랴? 가엾은 중전마마, 한해도 아니고 주야장창 바깥소박을 이토록 장하게 받으시는 것이다.
'그래도 금일은 한마디 못났다 대어놓고 조롱하시는 않으시니 다행이야. 아, 전하 용안 오랜
만에 뵈옵기
로 가슴이 설레눈구나. 참으로 잘나신 분이라. 전하께서 언제나 되어야 이 중전을 한 번이라
도 좋은 눈
빛으로 보아주실까? 단 하나 소원이 그것이니. 언제나 되어야 전하께서 이 몸 못났다 박대
하지 않으실
까?'
절로 돋는 우수(憂愁)가 하얀 볼에 홍조로 어렸다. 이미 중전의 나이 열 일곱. 가르치지 않
아도 방심(芳
心)에 싹이 트고 은근한 사모지정이 절로 분홍빛이 되었다. 세월이 그만치 흐른 것이다. 아
무 것도 모르
고 사내며 부부지간 일어나는 일도 그저 깜깜한데도 열 일곱 중전마마의 마음에도 자연스레
돋아나는
애틋한 그리움이 있으니. 이제 신첩도 여인네가 되어 가옵니다... 몰래 애원하는 깊은 속내였
다.
'그리도 이 몸 싫어하시고 수모주시는 분이 어찌하여 나를 중전으로 뽑으셨을까? 허긴 무슨
일을 하시
어도 내가 입 한 번 벙긋 못할 것이며 뒷곁도 없으니 허수아비로 놓아두실 작정을 하신 터
이겠지... 월성
궁 여인이 더없이 계집 요염이 장하고 수단이 기막히어 전하를 손아귀에 꼭 잡았다 소문이
장하니 이 못
난 것을 언제 돌아보실 것이던가? 이런 내가 중궁전 앉아있으니 전하께서도 부끄러우실 것
이다. 더 노
력하여 부덕쌓고 어질게 성정 다스리어야지. 전하께 부끄럽지 않은 중전이 되어야 해. 언젠
가는 전하께
서도 이 몸 일편단심 정성 알아주시고 깊은 사모지정 읽으실 것이니 그 때를 믿고 기다려야
지...'
스스로를 위안하는 서글픈 심사. 중전은 남몰래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보스스 내쉰다.
어리지만 늘 하시던 일이라 중전은 잠사원 행사를 능숙하게 마쳤다.
내외명부 모인 가운데 누에발을 걷고 베틀에 올라 작은 발과 손을 움직여 베를 짜는 시범을
보이었다.
그 자리에 모인 내전의 여인들을 위하여 중전마마는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 다음에 느지막히 환궁하시었다. 큰 행사를 주관하신 터이니 곤하신 터라, 주위를 둘러
볼 사이도 없
이 주무신 후였다. 그 밤에 삐약이를 보지 못하였는데 다음날 아침 나인이 들고 들어오는
새장을 들여다
보았더니 그것이 축 늘어져 도무지 기운이 없는 것이다.
"아이고, 이것이 어찌된 일이더냐? 삐약이가 어찌 이리 힘이 없는 것이야?"
"참으로 망극하옵니다, 중전마마. 아무 것도 모르는 이 년이 그저 먹잔다고 좁쌀이며 남새를
하냥 주었
습니다. 그저 많이 먹으면은 다 좋은 줄 알았나이다. 그것 죄다 주워먹고 배가 빵빵하여져서
밤서부터
비실거리더니... 기어코 이러하옵니다."
삐약이 돌본다 하였다가 다 죽이게 된 나인이 사색이 되어 눈물부터 글썽이며 고변하였다.
중전마마께서
얼마나 애지중지 하셨던 미물이냔 말이다. 적막한 중궁전에서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사시는
중전께서 그
나마 이 미물에 마음 붙이시어 몇 달 즐거움으로 삼으셨거늘 이리 다 죽게 만들어 놓았으니
어찌 할 것
이더냐? 어찌할 바를 몰라 눈물만 뚝뚝 흘리는 궁녀는 앞에 두고 중전은 한숨을 푹 내쉬었
다.
"그만 하여라.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이 놈 명이 오직 이것밖에 안 되는 모양이지...
나가 보아라.
아직 죽지는 않았으니 살 수도 있을 것이니라."
허나 도통 기운이 없는 삐약이 놈, 생기가 좀 도는가도 싶더니 오정 되어서는 몇 번 힘없이
눈을 깜빡이
고 만다. 스르르 명이 나가는 것이라. 금세 고개를 툭 떨어뜨리고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죽
어버린 것이
니 실로 허무하구나.
중전마마, 그저 망연자실하였다. 한 손으로 이마 짚고 하염없이 죽은 삐약이만 내려다보는데
커다란 눈
에서 흐르지도 못하는 눈물이 잔뜩 고였다. 윗전이라 하는 중전께서 겨우 미물 하나 때문에
옥루를 보였
다 하는 것도 망신거리라. 소리내어 울지도 못하였다. 손으로 입을 막은 채 하냥 입술만 깨
물고 또 깨물
고...
'참으로 가엾고도 안타깝구나...... 죽은 것은 삐약이 너이되 실상 내 마음이 그런 것이 아니
더냐?'
더없이 서글프고 참담하였다. 힘없이 죽어 자빠진 어린 새가 중전 자신의 팔자와 겹쳐져 가
슴에 사무쳤
다.
이 놈을 줍던 날, 만났던 왕이 무어라 조롱하였던가? 그깟 새 새끼 때문에 유난을 피운다
하셨던가? 그
런 모진 말을 듣고서도 기어코 내가 너를 살리리라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온갖 정성 들여
어엿한 새로
키워낸 것이었다.
그 때의 말씀은 그토록 모지셨으나 원래 어린 짐승을 사랑하시는 분이라 하더니 중전 없는
때 잠시간 들
어오신 전하시라. 결국 살아난 이 놈을 보고서 대견하셨던지 중전마마 편액 붙여 웃음거리
삼으신 게에
다 놀림하시지 않고 가희(嘉喜)라 어필까지 써주신 왕이시다. 실로 전하께서 중전마마 하시
는 양에 그
리 노염 타지 않으시고 이해하여 주신 첫 번째 일이었으니. 어린 새 정성으로 살리고 그 노
는 양 바라보
며 즐거워하기가 몇 달... 이 놈의 어리광을 즐길 복도 나에게는 없는가 싶으니 온 몸에 힘
이 쭉 빠졌다.
"전하께서 다 자란 네 모습을 보시었으면 대견해하셨을 것인데... 이 중전이 덕이 없어 중궁
전을 도통 아
니 찾아주시니 결국 너를 전하께서 한 번 보시기도 전에 죽어버리었도다. 어느 날이든지 전
하께서 너를
찾으시면은 할 말이 없게 되었으니...... 삐약아. 가엾은 모양이 어찌 그리 이 중전하고 똑같
은 것이더
냐? 나도 평생 뒷방 신세로 쓸쓸하게 피지도 못하고 늙어 죽어질 팔자인데... 목숨이 모질어
차마 죽지
도 못하고 이리 허수아비 신세로 살아가니... 죽어지어 새장 벗어난 삐약이 네 신세가 오히
려 부럽구
나... 좋은 데 가거라..."
흐르는 눈물을 억지로 옷고름으로 훔친 연후 중전은 쓸쓸하게 혼잣말하며 비단을 잘라 주머
니를 만들었
다. 죽은 새를 그 주머니에 넣어 들고 홀로 후원으로 나섰다.
옛적 족제비에게 물려 죽은 어미 새와 어린 새를 같이 묻어 주었던 바로 그 곳 근처, 두견
화 나무 곁에서
쭈그리고 앉아 막대기로 구덩이를 파고 있던 참이었다. 중전의 여린 몸을 덮칠 듯 긴 그림
자가 와서 옆
에 섰다.
"무엇이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왕이었다. 수라 받으시고 석강 들어가시기 전에 속이 차면 공부에
불편하다 하
시어 잠시간 산보 나오신 것이었다. 뜻밖에도 중전이 쓸쓸하게 앉아서 무엇을 하고 있기에
호기심이 나
고 궁금증도 나신 것이다.
"... 아모 일도 아니옵니다, 전하..."
차마 용안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들을락 말락 한 마디 하였다. 그저 왕이 지나가시기 기다리
듯이 발치에
만 시선을 주고서 우두커니 서 있는 중전이다. 왕은 잠시 쓸쓸하고 외로운 빛이 가득한 중
전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허리를 굽혀 구덩이 옆에 놓인 비단 주머니를 주워 열어보았다. 해연히 놀라시
니 삐약이가
죽은 것이라. 재우쳐 묻자오신다.
"아니 이것은 지난 번 그 새 새끼 아니오? 건강하게 잘 큰다 하더니 어찌 이리 죽었소?"
"어제 저가 잠사원 다녀오면서 나인에게 맡겼기로 그 아이가 먹잔다고 좁쌀이며 남새며 하
냥 주었다 합
니다. 그것을 다 주어먹고 어린놈이 배탈이 난 듯 하옵니다. 하도 가련하여 묻어나 주려 나
왔나이다. 성
상께서는 신경쓰실 일은 아니라... 망극하옵니다. 어보 옮기시는데 흉한 꼴을 보였나이다. 용
서하여 주
시옵소서."
나직나직 사정을 설명하는 목소리가 안개비처럼 아련하였다. 왕은 잠시 중전과 어린 새의
주검을 번갈
아 바라보았다.
"이리 주오!"
"에그머니."
왕은 중전이 들고있던 막대기를 잡아챘다. 어찌 이러시나? 중전은 그저 놀라고 당황한데 왕
은 아무 말
도 없이 무릎을 굽히고는 중전이 파다 만 구덩이를 더 깊이 파주었다. 어디 한 번이라도 험
한 일을 하셔
보신 적이 있으시던가? 허나 어수에 흙이 묻는 것도 아랑곳 않으시고 묵묵히 흙을 파헤치어
제법 깊고
큰 구덩이를 파시더니 중전을 돌아보시었다.
"이만하면은 쓸 만 하오?"
중전은 말도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전하께서
중전마마
를 대하시어 다정하시기까지 하고 망극하게 그녀를 위하여 구덩이를 파주기까지 하였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등뒤에서 왕이 보고 있는 가운데 구덩이에 주머니를 묻어주는데 긴장하
고 두려워 손
이 덜덜 떨렸다.
왕은 좁다란 중전의 어깨와 등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어린 새를 담은 주머니를 묻어
주는 양을 바
라보며 왕은 어쩐지 이 죽은 새가 어린 중전 같기만 하다. 둘 다 작고 쓸쓸하고 가련하다
싶었다. 드러내
놓고 한 번도 어엿한 사람으로도 취급한 적이 없지만, 심중 깊이 중전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뜩해지고 짠
하니 아린 마음을 어찌할 바를 모른다.
돌이켜 생각하여보니 이 어린 처자를 중궁전에 데려다는 놓았으나 지아비 도리는 한번도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