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저도 열 일곱이며 대례를 치루어 두 해가 꼬박 넘어간 터인데 안즉도 그렇게 멍청하
단 말이야? 짐
이 그이를 대하여 이런 지경이니 재미가 도통 없다. 여하튼 골치꺼리라! 쯧쯧쯧. 그것이 너
무 어려 멀게
굴었더니 정궁 멀리한다 대신들이 난리가 아니더군. 인제 이렇게 가까이한 고로 이번서는
당사자인 저
가 짐더러 심하였다 자리보전하고 난리이니 대체 짐더러 어찌하라 이 말이냐? 답답이... 답
답이... 나가
보라. 짐이 수일 내로 환궁을 할 것이니 너는 다시 올 필요 없다. 도성으로 올라가라."
그렇게 차갑게 말을 자르시고 장내관을 내보내시는 전하이시다. 그러고서 지밀 상궁이 궁녀
들을 채근해
금침 펼쳐 내려드리니 비로소 침수 드시는데 그러나 왕은 자리에 눕지 않고 한동안 우두커
니 이불 위에
앉아만 있다. 문득 그는 한 손으로 이마를 괴었다.
강렬한 괴로움이, 혹은 뼈아픈 후회와 참담한 자괴감이 훤칠한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바로 그
때이다. 자신도 모르게 휴유- 하고 새어나오는 한 숨. 마치 부끄러운 일을 잊어버리고 싶다
는 듯이 왕은
두 손으로 북북 용안을 문질렀다.
짐의 기억 속에서 제발 그 밤이 지워져 버렸으면 좋겠다.
왕은 지긋이 이를 악물었다. 아직도 귓가에 생생한 어린 아내의 애처로운 흐느낌 소리를 떨
쳐 버리려는
듯이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다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리할 수만 있다면 짐은 여리고 가련한 그 사람을 그렇게
잔인하게 짓밟
지는 않을 것인데... 다정하고 한없이 그립게 사랑하여 줄 수 있을 것인데... 절대 그 밤서처
럼은 아니할
것인데...'
왕의 가슴에 깊이 박힌 대못이다. 평생 가야 잊어버릴 수 없고 용서받을 수도 없을 무서운
죄라 생각한
다. 왕이 준 모과 열매를 마치 보물인 양 가슴에 꼭 안고서 쓸쓸한 모습으로 노을 아래 서
있던 어린 아내
를 돌아보며 느낀 그 마음을 떠올리자, 왕은 자신이 망쳐버린 수줍고도 아름다운 초야가 다
시금 부끄럽
고 가슴이 터질 만큼 괴롭다.
어린 새를 잃고 상심에 잠긴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 오후에 전하께서 작은 모과열매
하나 뚝 따서
왕비에게 건넸을 때 그는 자신의 사무친 마음을 그녀에게 건넨 것이었다. 제발 우지 말고
웃어 보시오!
짐이 그대 안고 위로하고 싶소이다... 하는 그 마음을 건넨 것이었다.
'하지만 짐이 그 밤에 그이를 그렇게 잔인하게 대하였으니 인제 평생 가야 그 사람은 짐을
바로 바라보
아 주지 않겠지? 비는 아마 짐을 사나운 야수거나 괴물이라 생각할거야. 그렇지 않아도 짐
이 지친인 희
란 누이만 은애하여 저를 버려두고서 딴데만 돌아다닌 터라 짐을 옳은 사람이라 보아주지
않았을 사람
인데...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짓밟고 능멸까지 하였으니, 비는 짐을 인제 다시는 마음으로 지
아비라 섬
기지 않을 것이야. 짐은 평생 그 사람을 안지 못하게 되었어. 가까이 가지도 못하게 되었다.
짐은 그 사
람에게 그저 잔인하고 무도한 지아비가 된 것이니 짐은 인제 그 사람 곁에 갈 자격도 없
다.'
그런 생각을 하자 문득 젊은 왕의 가슴은 텅 빈 듯 허전하고 아프다. 왕은 너무도 가슴이
메여져 두 손으
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아무리 짐에게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라 하여도 그이가 짐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은 정말
괴로워. 그
사람이 짐 때문에 우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보기 싫어. 그 사람이 웃었으면 좋겠어. 그 사람
의 눈물을 짐
이 닦아줄 수 있으면 좋겠어. 인제는 그이가 짐에게 다정하여 주었으면 좋겠어...
'그대와 짐은 동류(同類)야. 외로움이 깊다는 점에서, 천지간 홀로인 듯 아득하고 쓸쓸하다
는 점에서 그
대와 짐은 동류야... 짐은 그대 옆에 있으면 쓸쓸하지 않을 것 같다 느꼈어. 여리고 작고 투
명한 그대 곁
이면은 짐은 편안할 것이다 생각하였어. 그대를 그저 안고 싶었어. 그냥 아무 말도 않고 그
대를 안고 편
안하게 같이 눕고 싶었어. 다정하고 따뜻하게 안아주고 사랑하고 싶었어. 짐의 이런 마음을
그대가 알아
준다면 좋으련만... 결코 그 밤의 일은 짐의 진심이 아니었다 함을 알아준다면 좋으련만...'
어둠 속에서 왕의 입술이 달싹였다.
미안하오... 하는 한마디.
그 잔인한 밤에 그저 방치된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없이 울고만 있던 어린 지어미
에게 말하고
싶었던 한마디. 그러나 차마 하지 못했던 그 한마디... 그는 마음속으로 다시 속삭인다. 미안
하오...
'짐도 편치 않소이다. 짐도 가슴이 아프오! 짐이 왜 그렇게 모질고 잔인하였는지 모르겠소이
다. 짐의 마
음은 그렇지 않았거늘, 짐의 행동이 왜 그리도 거칠고 차가운 것이었는지 짐도 모르겠소이
다!'
왕이 전날서 굳이 납시지 않아도 되는 재성에 행차를 하겠다 하신 것은 단 한시도 왕비의
곁에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치스럽고 민망한 터로 왕은 모든 것에서 눈을 감아버리고 싶고 도망
을 치고 싶었
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귓전을 맴도는 가냘픈 울음소리. 여린 몸에
가득하던
푸릇한 멍과 그리고... 여린 허벅지 사이에 흐르던 붉은 핏줄기...
못난 것!
또 다시 왕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 같은 원망. 그랬다. 그것은 원망이었다. 왕 자신 스
스로에 대한
민망함과 부끄러움 못지 않게 강렬한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지어미에 대해 장성한 사
내이자 지아
비인 왕이 가지는 원망이었다.
'인제 저도 나이가 그만하면 남녀간 정분을 나누는 것도 좀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 짐의
지어미라 중
전이니 사직에 대한 책무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라 짐을 받아들여 원자도 낳아주어야지! 꽃
씨 뿌려 아기
씨 가진다 하는 어린애라, 그 못난 것은 평생 짐을 이리 무안하게 할 것인가? 언제고 일어
나야 하는 일
이니 저가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달지면은 그 밤서 짐을 맞아 다정하고 부드럽게 대하여 주
어야하는 것
이 아닐 것인가? 이토록 무지하고 멍청한 계집은 실로 처음 보았다! 대체 언제나 되어야 짐
의 이 마음을
알아주고 어엿한 지어미로 행세할 것인가? 짐이 지금껏 그저 놓아둔 터로 안즉은 어린 계집
애다 싶어서
그런 것이거늘, 웬만큼 자랐다 싶어 손목잡은 것인데 아직도 이토록 무지하고 바보 멍충이
인 것이야!!
짐이 무엇을 어찌하였다고 기함하여 쓰려져서는 자리보전하여 며칠을 일어나지 못한다는 것
인가? 남들
이 보면은 짐이 저를 짓밟고 뭉개뜨려 사람 구실도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고 할 것이 아닌가
이 말이다!!
어찌 사람이 그리 여리고 작을까? 투명하고 어린 것이 꼭 유리인형이라 할 것이니 짐이 건
드리면서도
깨뜨릴까 그저 두려울 참이라... 숙부는 어찌 그렇게 섬약하고 못난 것을 짐에게 비라 하여
데려다 주신
것인가? 짐이 차마 무서워서 저에게 가까이 갈 수가 있나 이 말이다!'
왕은 자신도 모르게 한 손으로 자신의 입술을 만진다. 그 입술에 아직도 그녀의 향기가 묻
어있는 것 같
아서였다. 꽃향기 같은 그 사람의 체취. 맑고 정결하고 어여쁜 그 향기... 짐의 어린 비(妃)는
작고 여리
고 향기로운 사람.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을 정도로 투명하고 정결한 여인.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하고 어
진, 차마 가까이 갈 수조차 없을 만큼 깨끗하고 고운 사람. 하지만 무정하고 난폭한 짐이 짓
밟고 망쳐버
린 순백의 초설(初雪)같은 사람.
가슴이 아프다...
왕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 눕는다. 생각하지 말자! 그는 돌아누웠다. 그는 지긋이 이를 악문
다.
'그이를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않을 것이야!! 그이를 가까이한 터로 이토록 가슴이 아프고 괴
로우니 짐이
대체 무엇이 부족하여 그딴 것을 두고서 이리 괴로워야 한다더냐? 짐에게는 희란 누이가 있
지 않느냐?
계집의 아름다움으로도, 그 불타는 밤 재미로도, 또한 짐에게 일편단심 모다 주는 그 단심까
지 무엇 하
나도 모자라지 않는 누이가 있는데 짐이 무엇 때문에 그 못난 것에게 이리 마음이 기운다는
것인가? 잊
어버리자! 잊어버리면 되는 것이야! 월성궁만 가면 누이 말고도 야들한 열 일곱 열 여덟 꽃
같은 계집들
이 많고 많으니 짐이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 짐이 무엇이 부족해서 그 못난 것에게 이리 마
음을 기울여
야 한다는 것이냐? 하지만, 게서 보는 계집들이라 모다 나이는 비와 비슷하여도 다들 요염
있게 알아서
짐을 잘 모시었던 것인데... 어째서 그 사람만 그럴까? 짐이 너무 사나왔던 것일까? 아니면
은 짐이 너무
서툴렀을까? 그도 아니면은... 그이가... 짐을 싫어해서 그런 것일까?'
가슴에 박히는 또 하나의 가시. 왕비가 왕 자신을 싫어해서 초야에 그토록 수동적이고 심지
어 거부하는
모습까지 보였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자 왕은 숨이 막히도록 분하고 염치없고 그리
고... 가슴이
아프다.
싫어!
그는 마음속으로 악을 쓴다. 그는 벌떡 일어나 주먹으로 애꿎은 베개를 내질렀다. 그것은 싫
다 이 말이
야! 짐은 천하의 주인인 왕이니, 뉘든 짐에게 승복하고 고개 숙이고 짐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지! 감히
제가 무엇이라고 짐을 싫어한다 이 말이야? 하물며 저는 짐에게 종실과 천지신명이 지어미
로 정하여준
여인일진대 어째서 지아비인 짐을 그리도 꺼리고 싫어하는 것이야? 그는 싫다 이 말이야!
그는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어! 짐이야 무엇을 하든 저는 짐의 안해이니 짐에게 순종하고 받아들이며 섬
겨야하는 것
이지! 용서 못해! 그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단 말이야. 그이가 짐을 꺼리고 싫어한다 하는
것은 짐이 도
저히 참을 수가 없다 이 말이야!
그것이 진실이다.
왕은 비로소 깨닫는다. 그는 어린 왕비가 자신을 싫어한다 그 생각에 미치자 견디기 힘들
정도로 화가
난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은 그저 박대하고 별별 조롱에 능멸하여 차갑게 대하였으되 그러나 왕비는 자신을 사모
하여주기를
바라는 욕심. 외롭게 자라 다정함에 유난히 집착하는 왕이다. 보위에 앉으신 지존이니 그 위
엄이 비길
데 없이 높다. 장성한 사내로 남들보다 강하고 도도하시되 깊은 속마음은 누구보다 여리고
다정다감한
왕이었다. 누구든지 자신을 사랑하고 받들어야 한다 믿는 터이다. 그런데 자신의 가장 가까
운 사람이라
할 것인 왕비가 자신을 꺼려하고 미워한다는 생각하니 어찌 이리 분하고 안타까우며 노화가
나는 것인
가? 그는 그것을 참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짐을 사모하란 말이야!'
그는 베개가 마치 왕비인 양 집어 내던지며 마음속으로 고래고래 소리지른다. 그대는 오직
짐의 지어미
이니 지아비인 짐을 은애하고 짐의 성총 바라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그것이 올바른 일이지!
그러면 짐도
그대가 정궁이니 사직을 위하여서라도 못이기는 척 교태전 쪽을 돌아볼 것이 아니야? 그대
곁으로 다가
갈 것이 아니냔 말이야. 실상 짐은, 그대가 너무 소중하고 그리워! 짐은 그대 가까이 가고
싶어. 그대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 그러니 그대도 짐더러 교태전에 듭시오 하여 달라 이 말이야!
오래도록 잠 못 이루시고 상감마마 행궁의 침전에 누워 계신다. 상심하였다가 분개하였다가
노화 내었
다가 후회하고 짜증을 내다가... 이러한 별의별 생각으로 전전반측(輾轉反側). 그러면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