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200)

"왜 말씀이 없으시오? 우원전 침전에 가져다 둘 것이오. 짐이 항상 바라보게 말이오. 이 것 

을 보면 짐이 중전 마음이 생각날 지니 짐에게 선사하여주오." 

"마, 망극하옵니다. 달라하시니 드릴 것입니다만은, 성상의 안목을 즐겁게 할 정도로 고운 

것이 아니니 신첩이 부끄럽기 한량없나이다." 

"짐이 곱다 하면 되는 것이오. 핫하하. 이날부터 짐의 침전에 매화 향기가 진동하겠군. 자, 

허면은.. 그대가 짐에게 귀물(貴物)을 선사하였으니 짐도 비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 말을 

하여 보시오. 무엇이 필요하오? 원하시는 대로  짐이 그 청을 들어줄 것이오." 

제발 짐더러 교태더전에 자주 오라 청하여 주시오. 아니면은 짐더러 이 밤에 예서 머물러 

달라 청하시오… 

왕은 고개 숙인 중전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부탁하였다. 

'다른 계집들이 모두다 그러하듯이 그대도 짐의 성총 바라고 있다 하여 주시오. 짐 곁에서 

웃고 살고 싶다하여 주오…' 

그러나 중전은 한동안 입을 봉하고 말이 없었다. 고개만 수그린 채 침묵하였다. 

"어허! 말을 하여 보시라니까요? 장부 일언이라 중천금이거늘, 짐은 곤전께서 무엇을 청하든 

다 들어줄 것이오. 짐이 무엇을 줄 것이오?" 

그렇게나 부드러이 말을 하였어도 중전은 한참동안 망설이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다시 왕 

은 재촉하였다. 왕비는 난처한 지 손을 깍지끼고 비틀다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왕을 바라 

보는 작은 얼굴에 간절한 바람이 묻어있었다. 

"…그리하시면, 전하. 감히 간청하옵니다. 소첩에게 글 선생을 보내 주십시오." 

왕은 예상치 못했던 왕비의 말에 해연히 놀랐다. 기껏해야 고운 패물이거나 왕 당신의 발길 

을 중궁전에 청할 것이다 기대하였다. 또 그래주기를 바라였다. 그러나 뜬금없이 중전이 글 

선생을 바란다는 말에 너무 놀란 터로 그는 재우쳐 다시 물었다. 

"글 선생이라? 중전이 그리도 학문에 목이 마른 줄은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소. 글공부를 좋 

아하오?" 

"무에 학문이라 할 것도 없는 아낙네의 짧은 글줄이옵니다. 사가의 부친께서 병들어 조하 

일을 감당하기 힘드시니 물러나 집안에서 글만 읽으신 터라, 하냥 무료하고 적적하시어 장 

난삼아 소첩에게 천자문부터 하여 내전을 좋이 가르쳐 주셨나이다. 하찮으나 부친께서 공들 

여 가르쳐 주신 글줄이라 신첩이 그 것을 하루하루 잃어버림이 참으로 안타까웠사옵니다. 

중궁전에 올라앉아 홀로 서책을 펼쳐 놓아도 스승이 있는 만 못하여 한 줄 가다 막히고 두 

줄 읽어 가로되 답답하여 심히 괴로웠나이다. 이제 전하께옵서 신첩더러 보잘 것 없는 침선 

을 두고 상급을 주신다 하니 참으로 바랄 염치는 없사옵니다만은, 전하. 신첩에게 글 선생 

을 보내 주십시오. 오직 하나 소원이옵니다. 이 못난 촌 것이 감히 사직의 지엄한 정궁 자 

리를 차고앉아 황공하옵기 이루 말할 수 없음이니 글월이라도 다소 깨우쳐 이 큰 허물을 덮 

으려 하옵니다. 신첩이 알기로, 중궁전도 강학을 받음이 법도라 하니.. 전하. 이날부터 소첩 

에게도 글 선생을 보내주시사, 중궁전 강학을 하라 하명하여 주시면은 아니 되겠나이까? 오 

직 신첩의 소원은 그것입니다. 열심히 공부를 할 것이니 그 청을 들어주십시오." 

나직하고 조용한 목청이었으나 열기가 느껴졌다. 단단한 결심도 야무진 의지도 느껴졌다. 

왕 역시 학문을 좋아하시고 즐기시니 중전의 그 당차게 아뢰는 말이 뜻밖에도 대견하고 장 

하였다. 

"호오- 짐이 미처 중전의 숨은 학문을 알지 못하였군. 알고 보니 비(妃)께서 이리도 학문에 

목말라하심이라 실로 여군자라 할 것이야? 좋소이다! 그리하여 드리겠소. 당장에 며칠 내로 

짐이 성균관 진감 중에서 인품 놓고 학문 높은 선비하나 천거하여 중궁전에 보내주리오." 

왕은 흔쾌히 약조하였다. 그런 연후에 무슨 말 한마디를 더 할듯이 머뭇머뭇 중전을 바라보 

는 눈빛이 안타깝다. 제발 짐더러 이 밤에 교태전에서 침수하여 주십시오 말하여 주오.. 

그러나 그저 노염타랴 고개를 숙인 중전은 왕의 그 부탁하는 듯한 기색을 몰라보았다. 왕은 

가리개 위에 피어난 적요한 매화가지를 내려다보며 떡 하나 주듯이 이 밤에 예에 머물겠소 

하려다 그만 맥이 탁 풀렸다. 

그가 중궁에 들어올 때마다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 이 여자는 알까? 그저 전전반측 

우원전 침전에 누워 내일은 중궁전 들어갈까 말까, 그이가 짐을 기다릴까 아닐까? 항시 눈 

과 귀는 버려 둔 어린 지어미에게 가 있었던 지난 밤을 어찌 말하랴. 

망설이다가 망설이다 결국은 하지 못하는 많은 이야기들, 마음은 있되 이 곳으로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차마 오지 못했던 많은 밤들.. 

'저이는 결코 자라지 않으리라. 대체 언제나 되어야 여인으로 자라서 짐의 발길을 청할 것 

이던고?' 

고개를 숙인 채 그저 입을 봉하고 앉아만 있는 중전의 옆모습을 힐끗 바라보는 왕의 입맛은 

소태같이 쓰다. 

짐이 은근히 눈치를 보내면은 척하니 알아차려 싱긋 웃으며 다가앉아야지. 먼저 기수 배설 

하라 해야지 그 것이 지어미 된 도리이지 말이야. 어찌 저리 무심하고 짐을 외면만 하는 것 

이더냐? 초야에 짐이 저를 대함에 있어서 무정하고 난폭하였던 고로 이렇게 짐만 대하면 목 

석이고 잠자리를 겁내고 있는 것이겠지? 

은근슬쩍  예사로운 낯빛으로 들어는 왔으되 왕으로서도 긴장되고 불편하였다. 왕으로서는 

어려운 발길을 한 터였다. 어찌하든 중전을 가까이하여 한밤을 같이 보내면서 그이 마음을 

잘 달래볼 것이다 작정한 그 심사가 그런데 중전의 외면으로 딱 막힌 것이었다. 왕은 무안 

하고 노화치미는 대로 벌떡 일어서서 나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은 모르는 척 끝까지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인지 순간 헷갈린다. 

"중전마마전하, 밤수라 들일까나 하옵니다. 어데다 상을 올리리까?" 

바깥에서 아랫것이 고변하였다. 움직일 생각 없이 물끄러미 중전이 만든 창포침장만 어루만 

지는 왕을 바라보며 중전은 난처하여 어쩔 줄을 모랐다. 살며시 왕을 곁눈으로 바라 보았 

다.대체 어찌하여야 좋은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녀의 난처한 얼굴을 마찬가지로 곁 

눈질하는 왕으로서도 중전이 섭섭하였다. 그녀가 보내는 신호가 제발 나가 주십시오, 이런 

뜻이 아닐 것이더냐? 

"짐은 동온돌로 나갈 것이다." 

목청이 어느새 불퉁하였다. 일어서서 배웅하는 중전은 한번 바로 바라보지도 않고서 문을 

박차고 나가는데 실로 무안하고 노여운 전하이시다. 

'작히나 못난 것.' 

마루를 건너 동온돌에 펼쳐진 금침을 걷어차며 왕은 기어코 한마디 내뱉었다. 쯧쯧쯧 못마 

땅하여 혀를 차고는 어금니를 악무는 상감마마. 흘깃 서온돌 쪽을 돌아보는 눈빛이 칼날이 

었다. 심사에 담긴 면구함과 노화를 이기지 못하여 시퍼랬다. 

왕은 자신의 심화(心火)가 지금껏 한 사내로서 여인으로 여겨본 적이 없는 중전에게 감히 

외면당한 자존심의 상처임을 아직 알지 못하였다. 

지금껏 아무 것도 아닌, 발길에 걷어차이는 돌멩이만도 못한 존재라 여긴 중전에게서 외면 

당한 상처가 이리도 크다 함은 무슨 뜻일까? 전하의 심중에 이미 중전마마의 존재가 깊이 

자리잡고 있음의 반증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자신의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한 심 

사가 수줍은 외사랑의 다른 얼굴이라 함을 모르는 왕이다. 

'작정하고 짐이 한번 그 상처 난 여심(女心)을 어루만져 주려고 하였더니 이것은 저가 감히 

먼저 짐을 내치고 쌀쌀맞게 군다 이 말이라? 무에 저리 방자하고 고약한 계집이 다 있는가. 

짐이 상전이냐, 저가 상전이냐? 짐이 저에게 수침 곱다 칭찬하여 주고 사친도 입궐케 하라 

말하였고 글 스승도 보내준다고 하였는데… 이런 정도로 저를 위하여 마음을 쓴 것일지니 

저가 생각이 있달 것이면 짐을 이리 박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짐이 제게 무엇을 하여 주 

었으면 저도 짐을 위하여 하여주는 게 있어야지…' 

지금껏 희란 마마부터 시작하여 많은 계집들 모두 반드시 왕이 무엇을 주어야 화사하게 방 

긋방긋 웃고 교태부리던 가락에 익숙한 터이다. 중전을 위하여 마음을 써준 것이니 그녀도 

자신에게 웃어주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해주지 않아도 그저 고맙고 받음을 기 

대하지 않고 그저 주는 것이 사랑이라 함을 아직도 모르는 왕이다. 

단 한번도 진실한 사모지정에 빠진 적 없고 받은 적도 없는 분. 천하에게 가장 고귀하고 도 

도하나 지금껏 진실한 사랑을 모르는 불쌍한 분이 바로 젊은 상감마마이시니 어찌 하랴? 

"게 아무도 없느냐?" 

"몽상궁이옵니다." 

지밀이던 오상궁이 희란마마 끈줄이라 하여 쫓겨나고 대전의 지밀상궁이 된 몽상궁의 목소 

리가 새어 들었다. 

"비(妃)더러 수라합시고 공부 끝난 다음에 동온돌로 건너오라 하여라. 짐이 예서 침수하리 

라." 

"하, 하지만, 중전마마께서는 달 손님이시니 침수 시중이 난처......" 

"지아비 지어미 잠자리 같이 하는 일도 날가려 한다더냐? 같잖도다!" 

버럭 고함치는 소리가 벽력이었다. 마루 하나 사이 두고 수저질 하는 중전마마 귀에 아니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너 아니 들어오면 가만 두지 않으리라 이런 뜻이었다. 중전은 한숨 

을 푹 쉬었다. 월성궁 계집이 대전 나가 요염부린 터이니 게로 가실 줄 알았다. 예는 왜 들 

어오시어, 왜 몸도 정결치 못한 그녀더러 침수 시중 들라 하시는고?   

자리옷 갈아입고 동온돌 방문을 들어섰다. 몽상궁이 병풍 치고 뒷발로 물러나갔다. 은가위 

로 대황촉불 심지를 자르는데 뒤에서 붕?한 목소리가 그녀를 후려갈겼다. 

"...짐이 불러 드린 것이 아니야!" 

   

놀라 왕비는 돌아보았다. 금침을 목까지 둘러쓰고 왕이 벽을 바라보며 중얼중얼 궁시렁대고 

있었다. 

   

"짐이 들어 오라 한 것이 아니라고! 제 멋대로 들어온 것을 어찌 해? 함부로 가마를 궐 문 

에 들인 군졸 놈들, 모다 주리돌림을 하고 곤장을 늘씬하게 패 주었다고. 다시는 함부로 들 

어오지 않을 것이야." 

"......월성궁 여인이 궐 들어오라 하신 일을 말씀하시옵니까?" 

"짐이 오라 한 적 없다니까! 함부로 들어왔다고 호통질을 해 보냈으니 다시는 그런 일이 없 

을 것이야." 

병 주고 약 줌인가? 아무리 어진 그녀라 하여도 속이 뒤집어진 터라 좋은 말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왕비는 잠시 두려운 마음을 잊고 새침하게 되쏘았다. 

".......신첩이 그 일에 대하여 무어라 한 마디라도 하였나이까? 어찌 그런 망극한 말씀을 하 

시는고?" 

"흠. 그런데 어찌하여 차도 아니 끓여주고 휭하니 도망간 것인데?" 

따지는 목청이 저가 잘하였다 너가 잘못하였다 품새였다. 기가 막힌 중전마마. 몸을 반 돌려 

왕을 노려보았다. 이분이 지금 사람을 놀리나? 누가 한마디라도 하였다고 저 잘하였다 나를 

두고 따지는 것인고? 

"그 여인이 대전 들어와 시중 드는 참인데 신첩이 게서 무엇을 할 것입니까? 허고 전하께서 

마음주어 성총깊은 여인을 신첩이 무어라고 입질을 할 것인지요? 여인네 가장 큰 잘못은 투 

기라 하였는데 전하의 그 말씀은 신첩이 마치 그 계집을 투기하여 열분이라도 내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노화내는 것 아니었니?" 

"신첩이 왜 노화를 낼 것입니까?! 신첩같이 미천한 이가 또 노화를 낸다 하여도 전하께서 

무슨 상관인지요?" 

"흥, 말로만? 지금 노화는 혼자 다 내고 있구먼, 뭘. 안 그래?" 

"아니, 신첩이 노화내지 않는다 하였는데 왜 자꾸만 이러시는 것이어요?" 

   

능글능글 사람의 억장을 잘도 뒤집었다. 항시 왕을 대함에 있어 심약하고 어진 중전의 목청 

에도 슬슬 성깔이 돋아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 중전은 사람 얼굴을 바로 바라보지도 

않고 갉작갉작 약을 올리는 왕의 팔뚝을 지난밤처럼 또 물어버릴까 잠시 궁리를 하였다. 

   

"헌데, 어째서 짐을 피하는 것이니? 다정하자 약조해 놓고서.. 서로 좋이 지내자 약조를 한 

것이 불과 며칠되지도 않았었다! 헌데 찬바람만 씽씽 날리고... 짐이 오든 말든 침향정에만 

박혀서는... 들어와서도 짐을 바로 보지도 않으면서 노화를 아니 낸다고?" 

"...약조는 신첩만 하였나? 앞으로 절대로 중전 마음을 다치지 않을 것이야, 하잡는대로 하여 

주께 하신 분은 대체 누구이신가? 장부 일언 중천금이라 하였거늘, 그 약조가 얼마나 되었 

다고 천한 잉첩을 대전까정 부르시어 알현을 하시는가?"     

"짐이 부른 것이 아니라 하였잖어!" 

새암에 화가 단단히 난 터라 마음이 꽉꽉 꼬였다. 어린 중전도 겁 없이 종알종알 말을 끝까 

지 되받았다. 금침을 걷어차고 벌떡 일어나 왕이 고함을 뻑 질렀다. 중전은 바닥을 내려다 

보며 흥하고 비웃었다. 

   

"평상시 그 계집더러 대궐을 제 안방 드나들 듯이 내버려두었으니 그러하지요. 성총이야 장 

할 지 몰라도 첩지없는 같잖은 계집이 겁도 없이 지엄한 대궐에 상시로 출입하니 어떤 이들 

이 대궐 문턱 높다 할까? 정 일품 승록대부도 하명 없이는 넘지 못하는 곳이 대전이거늘, 

첩지도 없는 것이, 대낮부터 살살거리며 드나들라고 창화문을 만들었다던가?" 

어깨 뒤로 되받아치는 중전 말도 야무졌다. 왕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새치름하게 무릎 세우 

고 앉아 톡톡 쏘아 부치는 말에 벽 쪽을 노려보던 왕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짐이 우세하였다. 짐이 잘못하였다고! 어리석어 잘못만 저지르는 폭군이라, 인제 짐에 

게 오만 정이 똑 떨어졌겠구나?" 

"...붙은 정도 있어야 떨어질 정도 있지?" 

자기도 모르게 흘러나온 혼잣말이었다. 왕은 고개를 돌려 중전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그래 앙큼하게 눈 내려뜨고 어진 중전 행세하는 네 속내 한번 까뒤집어보자구나. 짐을 장히 

도 싫어하는 네 속내라, 짐을 싫어한다는 말을 하여봐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왕은 버럭 

소리쳤다. 

"흥, 그래? 말이 나온 김에 말하여 보자. 아주 너가 강새암으로 짐을 잡으려드는데 말이지. 

왜 장히도 소박주던 옛날에는 말 한마디 아니하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나 알아보자." 

"......신첩은 사람도 아닌가? 좋이 지내자 약조하여 마음을 돌이키니 실로 인제는 부부지간 

정분이로구나 결심한 터로, 그 밤에 별궁가고 대전으로 잉첩 불러들여 속을 뒤집는 분이라. 

신첩이 어찌하라고요? 그런 지아비 믿고 사는 지어미도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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