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원군께서 입궐을 하신 것은 내전의 일이오. 허니 경들은 입질을 그만 하오! 아니, 짐이
지존인데 누구든 부를 수 있고 알현할 수 있는 것이지. 그것을 두고 경들이 왜 이래라 저래
라 하는 것이오? 짐이 죄인인가? 마음대로 장인 어른도 뵙지 못하는 신세이게?"
손짓을 하며 신경질적으로 내뱉는 왕의 목청은 이미 격앙되어 있었다. 훤한 이마에 시퍼런
심줄을 세우고 짜증스럽게 뇌까렸다.
"짐의 의지가 굳으니 누구든지 보위를 위협하는 적수는 절대로 만들지 않겠다 함이라. 그리
하여 집안도 보잘 것 없고 권세에 도통 관심이 없는 저이를 부원군으로 뽑은 것이 아니오?
헌데 좌상은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다 감히 짐더러 타박을 하는 것이오? 실로 그 말이 가당
찮소! 그 입 다물고 하던 일이나 제대로 하시오!"
평소 때 같으면 좌위정 정안로 그의 말이라 할 것이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하여도 옳다 하
시던 주상이다 헌데 오늘은 어쩐지 매서운 타박이었다.
보위에 앉은 지존으로서의 자의식이 강하고 도도하신 분이다. 젊은 상감마마. 솔직히 정안
로의 한마디 말에 자존심이 심히 상한 참이었다. 아무리 정승이라 한들 그래보았자 저도 녹
을 먹는 신하인 주제에 말이야. 짐이 궐안에서 사사로이 처분하는 일조차 간섭당하고 일일
이 허락을 받아야하나?
왕은 정안로의 말에 기가 막히다 못해 어이없기까지 하였다.
음해를 하여도 기가 막히는구나. 늙은 부원군이 두 해만에 한 번 겨우 입궐을 한 것을 가지
고서 조정의 일에 권세잡아 사람 부리려든다 입질을 해? 설사 그런 구설이 있을 지라도 짐
이 하고 싶으면 하는 것이지 저가 지금 무엇이라고 짐더러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야?
대놓고 무안을 주는 왕의 말에 이제 등골이 오싹해진 사람은 좌의정었다. 하지만 짜증과 불
쾌함이 왕의 훤칠한 미간에 너무 뚜렷이 나타나 있으니 어지간한 정안로 그로서도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고 신이 실언하였나이다 사죄하는 그의 머리 속에는 별별 생각 온갖 셈
속이 다 떠돌고 있었다.
갑자기 이렇게 자신에게 짜증을 부리고 중궁전 사정을 보아주시는 전하의 심중이 대체 어떤
것이냐?
'중궁전 일이라 할 것이면 죽든 살든 아무런 관심이 없었으며 만사 귀찮아하고 능멸뿐이던
분이 전하가 아니신가? 갑자기 이날부텀 중전마마 사정을 보아주어 부원군을 입궐케 하고
나더러 당신의 일에 간섭말라 쏘아 붙이시니 참으로 기함할 노릇이로다. 따지고 보자 할 것
이면 조하 일에서도 그래. 자꾸만 요 근래 들어 전하께서 내 말에 토를 다시고, 그저 고개
끄덕이던 옛적과는 달리 당신이 먼저 나서서 조하 일을 판단하고 움켜쥐려 하시는 기색이
역력하단 말이야? 인제 보령으로 따져도 약관이 넘으시사, 당신도 장성하셨다 이런 뜻인가?
벌써 보위 오르신 지 십여 년. 인제는 내가 필요 없다 하시는 뜻은 아닐 것인가?'
아직도 왕을 열 서넛 먹은 어린애처럼 허투이 여기는 정안로, 심중의 결심이 이토록 방자하
였다. 제 딸년 희란마마와 똑같이 왕을 제 손아귀에 든 허수아비처럼 쉽게 생각하는구나.
영안도 감사가 보낸 장궤 두루마리를 읽고있는 용상의 전하를 곁눈질하는 눈빛이 음흉하였
다.
'흥, 안즉 멀었다. 그나마 조하 일을 이만큼 이끌어 오신 것은 오직 어린 주상 당신 곁에서
노심초사, 견마지로(犬馬之勞)한 나의 덕분이 아니냐? 전하께서 이럴 수는 없는 것이야. 내
가 날 잡아 단단히 한번 큰마마와 더불어 전하께 오금을 박을 것이다. 나를 박대하시다니!
이 나라 정승으로 지금껏 몸이 부서져라 조정 일을 독점하여 전하께 일편단심 충성을 바친
나를 무시하시어? 단단히 경계하여 저 불길하고 기분 나쁜 늙은이가 다시는 궐에 얼씬도 못
하게 만들어야지!'
열흘 붉은 꽃은 없다 하는 속담을 조금이라도 생각하였을 것이면 정안로, 이날의 방자한 언
행을 조금 줄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만 제 권세와 제 딸년에게 붙박이라 여기는
주상 성총을 너무 믿고있는 아닐 것인지…
이제나저제나 사친께서 듭시기 바라며 중전은 몇 번이고 월동문을 내다보았다. 마침내 부원
군께서 듭시었다는 고변에 그만 체통도 잊고 손수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내달리신다.
섬돌 올라서는 늙고 여윈 사친을 보고는 오직 한마디, 아버님!!- 하고는 말을 잇지 못하시
는 중전마마. 큰 눈에서 투둑 눈물이 떨어져 비단 치마 자락을 적시었다.
그 눈물 속에는 지난 날부터 지금껏 중전마마께서 경험한 피맺힌 설움과 가슴앓이와 고통이
전부 스며
들어 있었다. 어찌 점잖으신 체면이라 하여도 부원군 눈에서조차 피눈물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냐.
마마!! 오직 그 한 마디. 부원군 또한 말문을 잇지 못하고 마루바닥에 엎드려 여윈 어깨를
들먹였다. 그 눈물이 당신의 조복 깃을 적실 정도이니 사친의 피눈물 보는 중전마마 여린
심정은 또 어떠하실 것이더냐? 다시 한번 아버님!! 하고 애끓는 목청으로 사친을 불러보는
데 연신 커다란 눈에 눈물이 줄줄 흘러 볼을 적시는 것이었다.
부원군 김익현, 실로 지금 창자가 끊어지고 억장이 무너졌다.
나이 사십 넘어 늘그막에 겨우 한 분 얻은 따님. 게다가 이레만에 어미까지 잃은 가엾은 아
기였다. 어린 것 젖동냥이야 아니 다녔다 하여도, 가난한 살림이라 고기 반찬 한번 못 먹이
고 비단옷 한번 제대로 입히지 못하였던 가엾은 딸아이었다.
그러나 늙은 노모와 어진 유모가 정성을 다해 키우니 어질고 효성 지극하고 또한 총명하셨
다.
자식을 제일 잘 알기는 그 부모였다. 타고나기 어린 그 따님 소혜아씨. 실로 아름다운 덕성
이며 깊은 지혜로움이며 남의 어려움 먼저 헤아리는 그 따뜻함이 인중의 일등가는 보물이었
다. 게다가 손끝이 매서워 침선 또한 소문났으며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아듣는 그 총명함
이라 감히 누구에게 견줄 것이더냐?
장중보옥. 금이야 옥이야. 김익현, 어린 그 따님 사랑하기 그저 금자동이가 따로 없고 은자
동이가 예에 댈 것이더냐? 드나드는 학우들이 모다 탐내어 며느리 주오 하였던 것도 부지기
수. 심지어 가까이 지내던 두곡 윤형원의 열 일곱 먹은 아들이 당당한 장부라, 아기가 자라
면 필시 저가 예로 장가들 것입니다 이런 맹약까지 하였던 차이다.
그런데 날벼락이니 그 따님을 중궁전 간택에 올려라 하였다.
만으로 열 다섯도 아니 된 어리디 어린 그 따님을 어찌 간택에 올릴 것이냐 김익현 단번에
찾아온 진성대군의 말에 거절을 하였다. 이미 왕께서 이미 사촌누이라 불측한 계집과 연분
이 장하여 죽고 못한다 하는 것을 귀가 있으니 부원군인들 아니 들었을 것이냐? 입궐하면
맡아놓은 당상이 소박데기요 눈물빼는 허수아비 신세라. 비록 중전이라 겉으로의 위세 광영
은 장할 지 모르나 조롱 속의 새라, 그 헛되고 가슴 아픈 살얼음자리에 내 귀한 딸을 왜 앉
힐 것이더냐?
허나 싫었어도 운명이 그리하였다. 김익현 그 굳은 뜻을 접은 것은 진성대군이 가져온 서찰
때문이었다. 펼치니 아직도 그리운 선대왕전하의 어필이라. 부대 경의 딸을 욱제(전하의 자)
의 비로 올릴 것이니 간택에 참여케 하라 하신 간곡한 유훈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김익현은 따님을 궐에 보내놓고도 제발 눈에 뜨이지 마시오 얼마나 바래었는
지 모른다. 그 마음을 진성대군도 알았던 것인가?
"자산께서는 제발 따님을 두고 간택받지 마시오 하고 기원하지요? 허나 나는 제발 그리되시
오 기원하고 있소이다. 저승서 형님마마께서도 그리 바라고 계실 것이니 운명이라. 두고보
시오. 따님께서는 필시 중전마마가 되실 겝니다."
그 밤에 재간택에 올랐으니 아씨께서 나오지 못한다 기별을 받았다. 그 때 김익현은 운명이
라… 운명이라… 하고 중얼거리며 얼마나 애를 끓였는지 모른다. 아침서 들어갈 적만 하여
도 밤에 나와서 담가놓은 녹두로 죽을 끓일 것입니다 하셨던 그 따님. 그렇게 하여 졸지에
삼간택까지 올라가 중전마마가 되시었다.
그리하여 한 분은 구중심처 궁궐에서 또 한 분은 담벼락 바깥의 서인이라. 그 다음에 뵙자
하니 이미 따님께서는 마주 바라보지도 못할 높은 분이었다. 부녀지간인데도 발을 치고 마
주 앉아 공대로 말씀을 나눌 참이었다. 게다가 사가가 초라하니 지존을 게로 내보내지 못할
것이다 하여 왕대비께서 친영날까지 당신이 직접 끼고 앉아 가르치시며 사가로 다시 돌려보
내 주시지도 않으셨다. 그러고서 생이별이었으니 어느덧 그 세월이 두해가 꼬박 넘었다.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였을까?
김익현은 따님의 불쌍한 형색을 보고는 애간장이 끊어져 눈물을 그칠 줄 모른다.
아무리 비단의대로 몸을 감고 온갖 패물로 꾸몄으면 무엇하랴? 맑고 총명한 눈에는 빛이 꺼
졌다. 피지도 못한 채 그늘이 진 얼굴은 아프도록 야위었다. 매사 능멸에 박대만 받고 산
터이니 조그만 소리에도 깜짝 깜짝 놀라고 마음을 편안히 진정치 못하여 안절부절하는 기색
이 역력하였다.
두해를 중궁전에서 갈고 닦은 덕성이며 자태이니 의젓하시었다. 연치가 찬 터이니 여인으로
피어 수수한 얼굴이 그나마 고와졌다고는 하되 솔직히 김익현은 열 다섯 궐에 들여보낼 적
그 모습이 훨씬 더 곱다 생각하였다.
'생기가 넘치고 총명하며 눈빛이 아름다워 누가 보아도 귀엽다 하였던 분이었는데… 키도
한참 더 자라시고 여인으로 피었다. 하지만 진귀한 패물로 꾸밈만 하면 무엇을 하나? 도대
체 생기라고는 하나 없고 매사 불안한 터이며 옥안이 우울하니 피지도 못하고 시들은 꽃의
형색이라. 실로 내가 한 분 얻은 우리 따님. 그저 금지옥엽, 애지중지 하며 키운 터인데…
저렇게나 야위시고 서러운 표정이라니… 인세의 일등가는 보물이 바로 우리 아기이거늘, 주
상께서는 눈이 어두워 이 귀한 분을 이리도 하찮게 막 대하셨구나..'
김익현은 솔직히 이 자리에서 당장 가엾은 따님 손을 잡아끌고 나가고 싶었다.
궐 밖으로 나가 죽어도 좋으니 더 이상 이 자리에 너를 그냥 두지 못하리라 말하고 싶었다.
하루를 살아도 마음 편안하게, 사람답게 살아야하는 것인데 어찌 너는 이렇게 가엾은 생활
을 하고 있느냐 하는 안타까움이 늙은 아비의 마음에 사무쳐 자꾸만 눈물이 흐르는 것이다.
'천하의 보석이라, 귀하게 아낄 고운 우리 마마를 눈이 어두우시사 전하께서는 하찮은 타구
로 쓰시는구나. 인세의 가장 귀한 분을 저리도 말라 죽이시는구나.'
아무리 부녀지간 흐르는 그 정이 살갑고 애끓는다 하여도 궐의 법도는 지엄한 것이다. 얼마
후 진정하신 부원군께서는 윗문으로 들어와 발 하나 사이 두고 멀찍이 중전마마와 마주 앉
으셨다.
"강녕하시옵니까?"
사친의 한마디 말에 든 뜻이 그 얼마나 많으랴. 중전마마, 애써 눈물 감추며 곱게 웃었다.
속은 문드러지는데도, 아버님 소혜가 많이 아프고 힘이 드옵니다 앙탈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 사친이 근심하시리라 싶어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구중심처, 날마다 보살핌 받는 이 몸이 강녕치 못할 것이면 누가 강녕할 것입니까? 아버님
을 근심하옵니다. 이 몸이 곁에 있어 날마다 문안하고 뵈어야할 것인데, 법도가 무서우니
오가지 못하는 이 마음만 꺼매집니다, 아버님."
"항시, 항시...... 조심하옵시고 윗전을 공경하시며 삼가하소서. 허면은 저절로 복을 부를 것
입니다."
"명심하옵니다."
"강잉하게 견디시옵소서. 마마께서는 단국의 태양이시며 상감마마의 단 한 분 안곁이시고
사직의 안주인이올시다. 이 나라 기둥을 태로 품으실 분이옵고, 주상 전하의 마음 기둥이
되셔야 할 분이옵니다."
"알고 있나이다."
"이 아비가 죄인이올시다. 마마, 마마.......어찌 이리...... 어찌 이리...... 야위신 것인고? 어찌
이리......"
차마 말을 잇지 못한 터로 김익현. 주르르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 고개를 바닥에 박았다.
이리 고생하고 박대 받으라고 내가 너를 키웠더냐? 하나뿐인 내 딸 소혜야. 죽느니만 못하
게 사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참아라, 참아라 해야하는 이 입을 돌로 찧고 싶구나. 어린 네
눈물 값으로 죽어 마땅한 늙은 아비가 부원군 이름 달고 구차하게 사는구나. 하루를 살아도
사람답게 살아야 함이니, 우리 둘이 궐 밖으로 나가 죽는 것이 차라리 나으리라.
입벌려 말하지 못하는 아비의 그 속내. 중전마마인들 읽지 못할 것이더냐? 사친의 눈물을
차마 바로 보지 못하여 상심한 얼굴을 푹 숙이는데 방울진 눈물이 뚝뚝 떨어져 비단치마 자
락에 짙은 흔적을 남겼다. 차마 소리내지는 못하는 부녀의 눈물이 중궁전을 흠뻑 적시었다.
커다란 파루 소리가 울렸다. 궐 문 닫는다는 신호였다. 거뭇거뭇 땅거미가 내리고 해가 서
산 아래로 자취를 감추었다. 궁궐 이곳 저곳으로 환한 등이 걸려지기 시작하였다.
편전에서 나와 우원전으로 듭신 상감마마, 수랏상을 물리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대제학
과 영의정을 앞에 두고 석강까지 마친 다음이다.
단 한번만 옥보를 옮기시어 상사병(相思病) 든 이 누이를 어루만져 주십시오. 그저 고개 조
아리고 간청하는 월성궁 희란마마의 전갈을 가져온 아랫것들을 알현하사 분주하여 못나가리
라 단번에 거절하시고는 서재인 기오헌에 들어가 앉으시었다.
지필묵 내려라 하시었다. 시원시원한 어필로 삭주 지방의 대장군에게 밀지를 쓰시던 대전마
마, 문득 윗목에 앉아 먹을 갈아드리는 장내관을 건너다보셨다.
"참, 부원군이 궐에서 나가셨더냐?"
"예, 전하. 한참 전에 중전마마와 밤것 상 함께 하시고 일가와 함께 나가신 줄 아옵니다."
장내관의 말에 왕은 고개를 끄덕끄덕 몇 번하였다. 다시 덤덤한 용안으로 교서 쓰기에 골몰
하였다.
명색이 장인이었다. 가례 치른 지 겨우 두 해만에 처음 입궐을 한 분이 아닌가 이 말이다.
이런 처지이면 사위이신 전하께서 마음이 아무리 없다 하여도 하다못해 다담상이라도 보내
주시어야 그 것이 예의가 아닐 것이냐? 하지만은 김익현이 문안인사를 위해 알현을 한 그때
말고는 그이가 중궁전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 또는 하루종일 중전과 부원군이 무엇을
하였는지 그저 무관심하셨던 전하이시다. 중궁전 쪽 일이니 짐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런 용안이셨다.
그런데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마디. 시답잖듯이 물음을 하시는데 나가셨느냐 이런 말씀이
시다. 장내관은 속으로 참으로 무정하시고 야속하신 처분이로다 혀를 끌끌 차는 참이었다.
전하께서 문득 다시 고개 들고 또 하문하신 것은 그때였다.
"그런데, 모처럼 만나 부녀간에 무슨 말을 하고 하루를 보내신 것인고? 짐이 바빠 중궁전에
미처 들지 못하였기로 그 일이 궁금하구나."
이 날이야 참례도 없는 날이다. 그저 오전 중에 삼정승 마주하여 몇마디 의논 마치신 연후
에 나가라 하셨다. 그리고서 어쩐지 불편하신 용안이었다. 짐이 다소 미령하다 하시면서 사
람들을 물리치시고는 하루종일 빈둥거리셨다. 아까만 해도 그렇다. 강학도 받는 둥 마는 둥
머리가 아프니 반절도 못하시고 그만 하오 하셨다. 기오헌에 앉으시어 서책 두어권을 건성
으
로 읽다말다, 뜬금없이 사냥이나 갈까 혼잣말을 하시었다. 석수라 전에는 짐의 활 내려라
하시더니 활줄을 새로 매신 것뿐이 아니던가?
가례 치른 지 세 해 만에 처음 입궐하신 부원군이니 아무리 무심하셔도 그렇지. 다담상 하
나 내리지도 않고, 부원군께서 돌아갔는지 아니 나갔는지 군입으로도 묻지 않으신 분이 갑
자기 밤이 되어서야 이런 말을 하시다니 대체 이런 변덕은 무엇이냐?
그러나 전하께서 묻자오시니 대답은 해야 할 것이다. 장내관은 찬찬히 자신이 아는 대로 아
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