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중전이 부덕하와 윗전의 쓸쓸한 심기를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나이다. 이제 종종 자리를
마련할 터이
니 할마마마의 작은 즐거움이 되기를 바라옵니다."
"허어, 어찌 그것이 중전의 탓일까요? 하루살이가 두려운 곤고한 백성들도 많다 합니다. 궐
내의 웃음
소리 드높이고자 날마다 잔치놀음은 바로 백성들의 눈물이 아니겠소? 괜한 허물 하지 마시
구려."
"장하고 거한 잔치는 베풀지 못하되 이토록 궐내 식구들이 모여 조촐한 자리를 가짐은 작은
즐거움이 아
니겠나이까? 신첩이 삼진날에 다시 이 자리에서 화전놀이를 베풀 것이니 부대 참석하시어
하루 즐거이
놀아주십시오."
"화전은 소손도 좋아하나이다. 잊지 말고 중전께서는 삼진날에 화전을 부쳐 주구려. 그날 궐
내 식구들
모여 한번도 즐거운 시간을 갖도록 하시지요."
옆에서 상감마마, 웬일인지 다정하게 말을 덧보태었다. 왕대비전하, 오랜만에 들어보는 주상
의 알뜰한
당부라 벙싯 웃음을 머금으셨다.
"주상께서 이 할미의 낯을 보아 마음을 써주시는 것이오? 감사하오. 허면 그날 우리 다시
한번 모여 꽃
잔치를 벌여보십시다. 사가에서도 다들 꽃놀이하는 터이니 그날의 잔치는 허물은 아닐 것이
다. 중전 그
럼 그날을 기대리겠소이다. 헛허허."
그러고서 두 분 마마. 왕대비전의 가마를 배웅하고 돌아선 후였다. 서온돌에 금침 펴놓고 밤
단장하러 간
중전마마 기둘리는 우리 상감마마 거동 좀 보시오. 자리옷하고 상투에 금동곳 하나 꽂은 터
인데 책상다
리 한 채 홀로 씩씩대고 있었다.
"무어라? 풍신이 늠름하여? 어질고 인품이 좋아?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 막히고나. 아니 사
직의 안주인
이며 짐의 비(妃)가 된 이로서 체모를 지켜야할 것이 아니더냐? 어데서 감히 외간 사내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고 짐 앞에서 들어라 하는 듯이 칭찬을 하는 것이야?"
아무리 속으로 진정하자 하여도 보진재에서 한귀로 얼핏 들은 이야기로 비롯된 심화(心火)
는 꺼지지 않
았다. 으드득 이를 갈아보기도 하고, 주먹을 허공에 휘둘러보기도 하는데 도대체가 마음이
가라앉지를
않는 것이었다. 하필이면 그때 기억난 것이 홍준의 이야기였다. 여인은 마음이 열려야 몸이
열린다는 말
한마디가 가시처럼 콱 박혀 종내 빠지지 않았다.
의심할 바는 아니지만, 혹여 중전이 왕 자신에 대하여 그토록 차갑고 쌀쌀맞으며 목석같이
굳어진 것은
그 마음에 다른 사내를 담고 있어서는 아닐까?
한발 떨어진 채 다정하니 걸어가던 그때의 중전 모습과 뭐 그런 대로 훤칠하니 잘난 도령
얼굴을 새삼스
레 떠올리며 왕은 자꾸만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흥. 그때부터 알아보았다. 둘이서 다정스레 잘도 걸어가고 있더구나. 내외하는 법도이고, 또
연치어린
터였으니 망신스럽게 속정까지 들지는 않았다 하여도 지금껏 이름까정 기억하고 있다함은
둘 사이 눈정
은 들었던 게야. 얼떨결에 간택되어 중궁전에 앉혀진 터로 딴 마음 감히 품지 못하고 허튼
수작은 하지
못하였되 여적 그 놈을 은근히 심중에 품고 생각하고 있었음이 여기서 드러난 게다. 같잖은
계집!"
중얼중얼.... 중얼중얼. 중전이 자리옷 차림으로 다가올 때까지 왕은 비설거지 하는 종놈처럼
궁시렁궁
시렁. 쓰잘 데 없는 투기와 별의별 꼬인 생각에 미치고 환장할 참이었다.
"뭐라? 사가에 있을 적에 혼약을 하여? 그 무엄한 놈이 대체 뉘더냐?"
등뒤에 앉아 뜬금없이 사람을 후려잡는 목청이 무서웠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자리끼 대접 받
쳐 올리던 중
전은 눈이 동그래져서는 왕을 건너다보았다.
"예에? 전하. 그것이 대체 무슨 말씀이시온지?....."
솔직히 중전은 왕이 지금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도, 어떤 것을 추궁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좋은 잔치 끝, 즐거이 놀고 웃음지으며 돌아왔다. 이 밤에 혹여 손목 잡으시면 모르는 척 안
겨 드려야지.
약방상궁이 말하기는 오늘밤이 길일(吉日)이라, 잘하면 배태를 할 수도 있습니다. 허니 주상
께서 옷고
름 푸시면 모르는 척 안겨 드리십시오 몇 번이고 당부를 받고 들어왔다. 6년 만에 처음으로
왕대비전에
문안인사를 드리러온 것만으로도 중전은 모질게 구박하고 못되게 굴던 왕을 반 이상 용서하
고 말았다.
이제 도리를 아시고 행동하시는 성군이 되실 것이야 가냘픈 희망에 여린 방심이 그저 떨렸
다. 그야말로
관옥 같은 용안이시다. 심술기 가시고 의젓한 풍모인데다 벙싯벙싯 웃으시며 유쾌하게 잔치
를 주관하시
던 모습이 너무 늠름하고 아름다워 잠시 훔쳐만 보아도 두근두근 가슴이 떨렸다. 참고 기대
리면 좋은 날
이 온다 아버님과 할마마마께서 당부하시더니 참으로 나에게도 이제는 지어미로서 주상께
쓸모가 되는
날이 온 것인가? 가마타고 중궁전 돌아오며 홀로 가슴이 떨리고 방긋이 웃음이 머금어졌던
참이었다.
헌데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날벼락이 이 밤에 기다리고 있음에랴!
말끝마다 중전 우리 중전 하면서 존대하여 국모 대접하던 아까와는 천양지차라. 말꼬리는
어디로 떨어
뜨려 두고 왔는지 예전마냥 딱 반토막 난 반말을 시작하였다.
오늘밤은 또 무슨 억지로 나를 괴롭히려 드시는가? 아득하고 눈앞이 캄캄하였지만은 일단
오늘의 사단
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를 알아야한다 싶었다. 강잉하게 정신을 차리고 중전은 떨리는 목
청으로 되물
었다.
"마, 마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옵시는지요? 신첩은 도통 알아듣지 못하겠나이다."
"오호? 요렇게 말짱한 얼굴로 이젠 시침까정 뗀다 이 말이라?"
단번에 찬물 대접 비운 왕이 냅다 저만치 던져버렸다. 다짜고짜 중전의 손목을 움켜쥐더니
금침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억센 두 손으로 어깨를 딱 부여잡고 무섭게 을렀다.
"너 바른대로 말하여라, 그 놈. 재응인가 하는 그 놈이 대체 누구냐?"
"재응 오라버님을 전하께서 어찌 아십니까?"
그렇지 않아도 동그란 중전의 눈이 더 동그래졌다. 무섭다기보다는 오히려 신기하고 놀라웠
다. 재응 오
라버님은 물론 중신의 아드님이나 이제 겨우 진사시 합격한 새파란 후기지수라. 궐 밖을 거
의 나가지 않
으시는 지존께서 어찌 재응 오라버님을 아시노? 게다가 중전더러 그 사람이 누구냐 하문하
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흥, 내가 모르는 일이 어디 있다고 감추려 드는 것이야? 궐 들어오기 전에 너, 그놈하고 정
분났던 게
지?"
"에구머니, 망측하여라! 해도, 해도 너무 애먼 말씀이오니 도무지 신첩이 할말이 없습니다."
중전은 자지러졌다.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다른 것은 모르되 국모이자 중궁전인 자
신더러 외간
사내이름을 앞에 두고 정분났느냐 하시나 참으로 기함하여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다른
것은 모르되
오직 한 분 지아비만 바라보는 일편단심 그녀더러 다른 사내 보았다 트집을 잡으시니 이것
은 죽어도 항
명(抗命)할 일이라. 내 예서 죽더라도 아니라 하련다. 끝까지 강하게 부정하였다. 아니 인정
하자 하여도
오간 것이 있어야 있다 말을 하지.
"재응 오라버님은 오직 신첩에게 친동기간과 같은 분이라. 사친과 절친한 학우이신 두곡 아
저씨의 자제
분이니 어렸을 적부터 오간 사이올시다. 이제 성가(成家)까정 하신 분을 두고 구중심처, 오
가지 못하는
조롱 속의 새 신세인 신첩과 어찌 연이 닿았다고 억지 잡으시어 신첩 속을 뒤집으시뇨?"
"요것이 앙큼하여 끝까지 아니다 시침을 똑 따는구먼? 흥 그래? 짐이 말을 하자면 할말 없
는 줄 아니?
거짓부렁 하지 말아라! 그래, 어디 한번 말을 하여보까?"
왕은 눈을 부라리며 가엾은 중전 혼백을 쥐잡듯이 몰아세웠다. 거짓부렁 말라 머리통까지
쥐어박으며
진심을 토하여라 난리를 쳤다.
"내가 본 것이 거짓이더냐? 예전에 짐이 사냥터에서 돌아올 적에 너를 보았었다. 너도 부인
하지 못하리
라. 내외하는 법도도 잊고 둘만 같이 잘도 동행하여 가더라? 집안 알음알음하여 오간 인연
이 오래다 하
니 누든 짐작하지 못하랴? 비록 속정까지는 아니 들었다 하여도 은근슬쩍 눈정은 든 게다.
게다가 무어
라? 집안간 내밀한 혼약을 하였던 사이라? 그래놓고 무엇 아무런 일도 없다고 앙큼스레 시
침을 똑 따는
것이니? 짐과 혼인하여 세 해이되 여적 그 놈 이름까정 기억하고 있으며 풍신이 늠름하고
인품 훌륭하
다 짐 앞에서 겁도 없이 종알종알 말도 잘하지!"
"아이고. 전하. 제발 신첩의 말을 들어주십시오. 아니옵니다. 사대부집 처자가 감히 오데서
함부로 사내
를 눈짓하여 눈정이 들것입니까? 신첩은 천지신명과 종실에서 정하여준 마마의 비(妃)올시
다. 오직 한
마음인데 어찌 이리 날벼락같은 애먼 말씀으로 신첩을 능멸하시옵니까? 믿어주옵소서. 재응
오라버님
은 그저 신첩의 사가시절 동기간처럼 지내던 분이라 금일 반가운 소식을 귀동냥하여 듣자와
한마디했을
뿐입니다."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은 금시초문이었다. 아니 구중심처 주상전하의 지어미로 부덕쌓고 조
용히 지내시
는 분더러 아닌 밤중에 홍두깨이지. 갑자기 재응 도령을 들먹이며 그녀더러 눈정이 들었네.
외간사내 곁
눈질하고 마음에 담았네. 이러면서 난리를 치다니. 말 그대로 억울해서 미치고 환장하고 싶
다는 말뜻을
똑똑히 알게된 중전이었다.
아무리 하여도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헛된 구설로 나를 후려잡으신다 하여도 이는
너무 심함이
다. 중전은 떨리는 목청으로 똑똑히 되받아쳤다.
"참으로 너무하시옵니다. 어떻게 신첩더러 외간사내 보아 눈정들었다 하시는지요? 신첩이
은장도로 가
슴갈라 보여지이까?"
"웃기는 소리. 짐이 하고싶은 말을 저가 하고 있구먼. 참말로 은장도로 갈라 속내 보이고싶
은 자는 바로
짐이니라! 흥, 같잖도다. 말짱한 얼굴로 어진 중전 칭송 듣고있되 깊은 마음에는 짐이 아닌
딴 사내나 품
고 있었다?"
거칠고 무정한 왕의 손이 중전의 가슴 한쪽을 꽉 움켜쥐었다. 저절로 아야 하는 비명소리가
흘러나올 참
인데 왕이 입꼬리를 비틀며 음산하게 웃었다.
"이제 알만하구나. 항시 짐더러 쌀쌀맞고 무정한 이유를 몰랐거니, 그때부텀 짐이 알아보았
도다. 무어
라? 그 놈 풍신이 늠름하고 인품이 좋아? 혼인을 잘 하였다 칭송까정 받아? 아나! 쑥떡! 그
래보았자 너
는 이미 짐과 혼인한 터이니 아쉬운 소리하여도 소용없느니라."
"마마. 마마 제발 신첩의 말을 믿어주십시오. 아니옵니다! 참으로 천지신명에게 맹세하느니
신첩은 오직
마마의 비(妃)올시다! 신첩은 평생 그리 알고 사옵니다."
"그래? 허면 말하여 보아라. 너는 짐을 진정한 지아비로 여기고 있느냐? 지어미라 하니 하
는 말이다. 눈
내려깔고 아무 말도 아니하는 앙큼한 네 속에 짐이 들어있기는 한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