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이, 짐이...... 잘못하였다 하지 않니? 짐이 말이야. 얼마나 한 것이 많나 헤아려 보아라?
흥, 부원군
들어오시게 하여 주었지? 네 말대로 화봉이년 용서하였지. 음음. 월성궁 쪽은 고개도 아니
돌리었다. 어
제는 대삼작 노리개 갖다 주었지, 쌍금가락지도 가져왔잖어?"
손가락까정 꼽아가면서 철없는 주상 전하. 어린 지어미 중전마마의 마음을 돌리려 했던 일
을 줄줄이 꿰
었다. 그런데도 지금껏 찬물 한 사발 얻어먹지도 못하고 내쳐짐만 당한 설움과 섭섭함이 겹
쳐 목청이 절
로 높아졌다.
"게다가 중궁전 내탕금 배로나 올려라 하였지. 내일은 일가친척까정도 보게 해주는데 너가
참말 이렇게
쌀쌀맞을 줄은 몰랐다. 흥. 짐처럼 하릴없는 사내도 없음이라, 날마다 짐이 비루먹은 개처럼
중궁전에서
외소박 당하는 줄은 천하에서 아무도 모를 것이다."
목청이 높아졌다 하지만 힘은 없었다. 힐끔힐끔 눈치를 보는 품이 잘못했단 말이야 하고 떼
를 쓰는 격이
었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저가 그 날 저지른 실책이 장하고 미안한 마음은 끝이 없었다. 위
신과 체통을
잊을 정도로 민망한 짓을 한 것을 사실이며 어린 지어미를 상대로 하여서는 절대로 아니 되
는 짓을 한
것도 사실이기에 끝내 저자세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도 더 잘할 생각이구먼. 그 맘도 몰라주니? 흥."
"날이면 날마다 변덕이 죽을 끓는 분이라. 아침이 다르고 저녁이 다르며 어제 한말과 내일
하신 행동이
다르니 대체 무엇을 믿고 살란 말인가? 신첩은 이제 몰라요. 그저 폐비시켜만 줍시오. 희망
은 그것뿐이
어요."
"원자 낳고 나가거라!"
"새 중전 얻으시어 원자 얻으실 일이지, 못난 박색 하냥 밉다 하시더니, 신첩 태에서 아기씨
얻어보았자
밉다 하실 것 아닙니까?"
"기가 막혀서! 짐이 얼마나 아기씨 바라는지 잘 알면서 감히 니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니?
원자 낳고 보
자구나. 그때 소원대로 폐비시켜 줄 것이다. 흥! 잉태 잘하라고 보약 보냈으니 시각 맞추어
잘 마시란 말
이다. 아니 마시기만 하여봐, 경을 칠 줄 알아라."
마음 속에 검은 물처럼 고인 말들을 한바탕 쏟아내고 나니 중전이나 왕이나 어느새 미운 정
이다. 서로를
향해 눈 흘기고 입을 삐죽이며 세모꼴로 눈 치켜뜨고 앙살부리고 억지쓰고 떼를 부리며 골
을 내는데 왜
그사이 몸은 한 무릎씩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이야? 참으로 모를 일이지. 지분지분 손가락 내
밀어 중전을
건드리는데, 그 손길 뿌리치며 새초롬이 돌아앉아 중전마마 상감을 한번 더 물어뜯어 말어?
곧 죽어도
싫다는 손 꽉 부여잡고 손가락에 끼여진 가락지 가지고 장난질 치면서 왕이 속터져 죽겠다
는 목청으로
내뱉었다.
"당국서 바람을 공물로 바치란다."
"네에? 그것이 무슨 얼토당토아니한 말씀이셔요?"
"제길. 짐인들 아니?"
왕이 울컥 노화가 돋은 목청으로 내뱉었다.
***********
다시 생각해보아도 분하고 모욕감이 사무쳤다. 하잘 것 없는 사신 놈에게 당한 수모가 뼈에
사무쳤고 나
라의 힘이 약하여 짐이 이날 이런 모욕을 당하고도 입 한번 벙긋 못하는구나 싶어서 열불이
났다.
"당국 왕이 짐을 망신주려 난제를 보냈구먼. 잘난 척 보란 듯이 사람들 앞에서 턱하니 내어
놓으며 짐더
러 풀어라 하는데......."
"그런데요?"
".......음음음. 짐이 지기 싫어서, 풀었다 큰소리를 쳤지."
도도한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것은 알았지만 스스로 감당도 못할 일까정 무조건 입 밖으
로 내어놓고
뒤 수습을 하지 못하여 이렇게 끙끙 앓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이고, 이 어리석은 주상마마
야. 중전은 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격하고 성급하여 앞뒤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일을 치고 보자는 성미인
지라, 중전
저한테 하듯이 조정 일도 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니 어찌 하명에 위엄이 설 것이며 중신
들이 주상전하
를 알기 진정으로 승복하여 두려워하겠는가?
"조하에 사람들이 몇몇입니까? 지혜롭고 학문 높으신 분들 많으니 난제쯤이야 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짐이 무엇을 걱정하니? 푼 놈들이 하나도 없음이니 그러하지. 대놓고 짐은 이미
다 풀었도다
하였으니 모다 짐 입만 바라보고 있더라. 젠장. 사신놈들이 떠나는 날이 사흘 후인데 그때에
답을 하여
준다 하였거든."
"답을 못 찾으시면 어쩌하시는데요?"
"......음음음. 저기 말이지, 짐이 좀 경솔하게 말을 한 것 같기는 하여."
"풀지 못하면 어찌 하시기로 약조 하셨나이까?"
캐묻는 중전 앞에서 한없이 면구하고 민망하였다. 중전 손을 놓고 왕이 바닥이 내려앉도록
한숨을 내쉬
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어물어물 대꾸하였다.
"......짐이 관을 벗고 사신놈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하기로 하였지 뭐."
"에그머니! 망극하여라."
저도 모르게 중전이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그러하여도 그렇지, 일국의 지존께서 천한 사신
들 앞에서 관
을 벗고 무릎을 꿇고 절을 하기로 하였다니. 이것은 주상 당신의 망신이고, 단국의 수치가
아니더냐? 왕
이 중전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짐이 경솔하였지? 하고 자신없는 목청으로 되물었다. 그럼
잘했다고 묻
는 것이니? 가능하다면 저 철없는 상감마마 면상이라도 한 대 쳐주었으면 싶었다.
"상감마마 위엄은 대체 어디로 간 것입니까? 일국의 지존께서 망신을 당함은 바로 아국의
망신이라. 어
찌 그러하셨어요?"
"......순간적으로 울컥 하여서 그러했지 뭐. 아니 그 건방진 것들을 보았나? 아국이 저들보다
다소 약소
국이라 하여도 그렇지, 감히 짐을 능멸하여 시험을 들게 해? 같잖게스리. 언제고 짐이 잘난
척 하는 당
국 국왕 그 놈 수염을 잡아 뜯어버릴 것이다! 흥."
곧 죽어도 저가 잘못하였다곤 하지 않았다. 오로지 나라가 약한 탓, 상대인 당국 국왕이 음
험하고 교활
하고 같잖아서 그렇다고만 하였다. 이러니 평생 당신은 어리석은 어린애라. 중전은 기가 막
혀 난리를 피
우고 골을 내는 왕을 가만히 건너다보았다. 왕이 어깨를 들썩였다. 다시 울적하니 깊은 한숨
을 내쉬었
다. 곁눈질하면서 어물어물 손을 내밀었다.
"도와 주어. 비(妃)가 짐보다 영리하잖어. 부부지간은 일심동체라, 짐 마음은 곧 비의 마음이
니, 요것을
달리 말하자면 짐이 망신당하면 비도 망신당하는 것 아니야?"
"아니, 이보셔요. 내전의 어리석고 멍청한 아낙네가 무엇을 안다고 주상께서도 풀지 못한 난
제를 풀어낼
것입니까?"
"짐이 다 기억하고 있구먼. 간택 받을 적에 중전이 중신들 앞에서나 할마마마 앞에서 기가
막힌 계교를
내어 난제를 풀었다 하였잖어. 이번도 생각을 좀 짜내어 보아. 그대는 짐이 중신들 앞에서
망신스럽게
건방진 사신놈들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을 보고 싶으니?"
"......신첩이 생각하기 은근히 집히는 데가 있습니다만은, 이는 전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신
하답같사와
요."
반쯤은 이미 풀었다는 말이었다. 반갑고도 고마워서 왕은 한 무릎 더 다가앉았다. 빨리 말하
여 보라 보
챘다. 여하튼 중전은 영리하거든? 지혜롭거든? 이것봐, 짐이 말하자마자 금세 턱하니 풀어내
는 것이야.
요런 신통방통 꾀주머니를 곁에 두고 짐이 지금껏 엉뚱한 데서 난리를 피우고 있었고나.
"바람을 가져오란 말은 직접 바람 그것을 보내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사와요. 가둘 수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바람을 어찌 공물로 보낼 것입니까? 제가 생각하기로 당국에서는 바람을 일으키는 물
건을 보내라
고 돌려친 것 같습니다."
"허면 부채를 보내란 뜻이야?"
"전하의 말씀이 옳다고 보아집니다. 아국의 부채는 아름답고 질이 좋아 각 국에서 탐내하는
물건이 아닙
니까? 그를 이르는 듯 싶어요."
"부채라? 바람을 일으키는 물건을 보내라? 이야아. 참으로 절묘한 하답이로구나? 비의 말이
참으로 신
기하구나."
"부채를 찾아낸 분은 신첩이 아니라 전하이신걸요."
왕이 실쭉 웃었다. 괜히 기분이 좋아 흐흐거렸다. 하루종일 골치를 아프게 만든 난제를 절묘
하게 풀어낸
중전의 답도 그러했지만, 부채란 답을 금세 가려낸 저를 칭찬하는 중전의 말이 곱고 기뻤다.
요런 고운
사람이 있나? 짐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슬쩍 돌려쳐 짐더러 답을 찾아내게 한 것이거든?
중전 손을 꼭
붙잡고 가락지를 가지고 장난질 치면서 다음 것을 물었다.
"하나 더 있거든. 똑같은 나무토막을 두고 아래위를 가려내라는 것이야."
"신첩이 읽은 경전에 보면 근본은 무겁고 말단은 가볍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흠, 짐도 읽은 글줄이다. 그래? 음, 어찌하여 보까? 아, 물에 띄워보면 알겠구나? 무거운 쪽
이 가라앉을
터이니 그 쪽이 뿌리라 이 말이지?"
"성상의 말씀이 참으로 사리에 맞고 타당하여 보입니다."
한동안 가슴에 쟁여져 있던 체기가 쑥 내려갔다. 오장 육부에 바람이 드나드는 듯이 속시원
하였다. 겨우
요런 것을 가지고 짐이 골머리를 썩였구나. 이제부터 난처한 것이 있으면 중전에게 물어보
아야지. 왕은
흐뭇하여 금침에 바로 누웠다. 톡하니 야속하게 다정한 지아비 손길을 끝까지 뿌리치는 중
전을 끝까지
끌어당겼다. 싫다 요동치는 작은 몸을 꾹 눌러놓고 팔베개하여 주었다. 머리통을 한 대 쥐어
박으며 윽박
질렀다.
"요것이! 뉘가 옷고름 푼다니? 짐도 반성하고 있다 하지 않았니? 비가 싫다 하는 일은 아니
한다 이 말이
다! 같이 침수나 하잔 말이다."
"......만날 말씀은 그러하시면서? 한번 속지 두 번 속나?"
말꼬리에 묻은 원망. 그래놓고 무작정 저 하고잡은대로 다 하시는 분이라. 그 변덕 어찌 믿
나? 약조하시
어도 나는 믿을 수 없고 싫소이다. 종알종알 잔소리하고 바가지 긁는 것이 사뭇 야무졌다.
말이 없고 어
질다 하는 것은 순전히 거짓부렁. 끝까정 사람을 잡아채서는 매듭을 짓고 마는 짓거리가 매
서웠고 당당
하였다. 찬바람 나게 돌아누우면서 흥 하고 비웃음을 날렸다.
"혈서라도 쓰랴? 짐이 다 잘못하였으니 중전 뜻이 아니면 옷고름도 풀지 않으리라. 이렇게
쓰랴? 엉?"
"방금은 원자 낳으라면서요? 도대체 신첩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고? 장부일언 중천금이
라, 헌데 우
리 상감께서 원하시는 바라, 시시각각 장단이 하도 자주 바뀌니 신첩이 따라갈 수가 없나이
다."
"흥, 아주 짐을 잡아먹어라? 짐더러 어쩌란 말이니? 허구헌 날 짐이 밤자리 안에서 중전더
러 외소박 당
하는 줄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지난 닷새동안, 너 짐한테 눈길 한번 주었니? 손가락 끝도 못
대게 하였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