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치우치면은 그저 천지분간 못하고 다 주나 평상시는 남에게 줄줄도 모르고 제 속내 털어
놓을 줄도 모
르고 변명도 못하니 그 하는 양은 몸만 컸지 그저 어린애라. 내가 주상을 보면은 항시 짠하
오. 형제라 하
나 없고 낳아준 부모도 어린 날 다 잃어버리고... 진심으로 보필하는 이들이라 다 쫓겨나고
곁에는 오직
제 사리사욕 채우는 간신배며 간악한 계집뿐이니..."
"상감마마는..... 외로우신 분입니다."
"그러합니다. 중전께서도 이해하시구려. 이제야 말하거니, 중전은 섭섭할지 모르나 실은 내
가 월성궁 고
것을 가납할 마음도 있었소이다. 주상의 외로움을 위로하여 주고 순후하게 그 격한 성정을
토닥거려 준
다 할 지면은 오히려 고맙다할 것이라. 헌데 고것이 간악하고 무도하여 주상 알기를 실로
우습게 여기니
주상의 그 순정이며 진심을 제 욕심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함이라, 바로 주상을 능멸함이 하
늘 끝에 닿은
것이 아니오? 주상이 불쌍하다 함은 바로 그것이오. 저의 진심을 다 주었으나 얻은 것은 하
나 없는 허수
아비 노릇이라. 내 그를 용서할 수 없음이에요."
중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당신께서 진심으로 사모하심이니. 어린 순정을 바쳐 얻은 고운 계집이라 모든
것을 주신 터
로 전하께서는 그 계집이 당신을 이용하고 있음을 모르심이야. 남들 마음도 다 당신 마음과
똑같다 생각
하시니 그 계집을 버리지 못하시는 게야.'
그 간악한 계집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음이야. 월성궁 그 계집은 자신이 왕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 지 알
고나 있을까? 중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새파란 빛이 중전의 까만 눈 안에 어렸다. 그녀
가 사모하는
아름다운 지아비를 욕보인 월성궁 악녀에 대한 깊은 분노가 너울졌다.
'제 하나를 얻자고 상감께서 그토록 실덕을 저지르고 폭군노릇을 한다 할 것이면 당연히 말
려야지. 정인
이 저 하나 때문에 천하를 적으로 돌리는 것을 안타까워하기는커녕 그를 기뻐하고 오히려
종용한다면
그는 진심으로 사모하는 정이 아닌 게야. 사모하는 분이 어엿한 성군 되고 바른 정사 펴나
가는 것을 돕
지는 못할망정 제 하나 사리사욕 채우자고 그 분을 부추겨 나락으로 더욱더 빠뜨리다니.....
월성궁 계집
은 진심으로 전하를 사모하는 게 아니었던 게야. 다만 제 욕심 채워주는 <왕>을 유혹한 요
녀(妖女)인
것이다.'
외롭고 정이 그리운 그분의 고독을 이용하여, 천지간 홀로인 그분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척
하며 눈을 가
리고 귀를 속여 잘못된 길을 가게 만드는 악녀. 정인을 내조하여 바른길을 걷게 하고 훌륭
한 일을 하게
하여야 그것이 사모하는 도리일 것인데 그 계집은 다만 천하의 지존이신 그 분을 이용하였
던 게다.
중전의 손이 꽉 주먹 쥐어졌다. 지긋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사모하는 그 분을 더 이
상 웃음거리
로 만들지 않겠다. 천하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그분을 더 이상 어리석은 폭군 소리
듣게 하지는
않을 것이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감히 상감마마의 순정을 우롱하고 불측한 정해를 이용하
여 천하를 어
지럽힌 그 계집을 내 용서하지 않으리라. 깨물려진 입술이 핏빛처럼 붉었다.
왕대비전하께서 중전의 손을 부여잡고 다시 한번 간곡하게 당부하였다.
"어진 중전께서 그저 우리 주상 가엾게 여겨 잘 보필하고 도와주오. 천하에 가장 고귀한 이
이나 또한 가
장 가엾은 분이 금상이오. 중전이 그동안 주상께 몹쓸 욕을 다 본 것을 알지만은. 그이 그런
것을 어미아
비 없이 자라 외로운 것이라 그저 불쌍타 이리 여기고 제발 상감을 버리지 마오. 이 할미가
제일 걱정하
기... 중전께서 주상을 도통 몹쓸 사람으로 보고서 마음을 닫아버리면 어찌 할까 그것이 걱
정이오. 중전,
제발 부탁하기, 대전을 아껴주오. 그이가 중전에게 박한 짓을 많이 하는 것을 원망말고 그저
좋은 마음
을 표현하지 못하여 괜히 심술 부린다 이리 이해하여 주시오. 실로 주상 마음이 은근히 달
라져 감이 눈
으로 보이니 보시오, 이리 귀한 옥지환도 중전에게 선사하고 그러지 않소이까?”
중전은 문득 왕이 자신에게 그리 매사 애먼 억지와 심술을 부리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드러
내는 법을 배
우지 못한 사내의 감정 표현은 아닐까 짐작을 하였다.
비내리는 마당을 바라보며 그대가 고와, 하고 얼굴 바라보지도 않고 무뚝뚝하게 내뱉던 그
말씀도 도무
지 멋이라 하나 없고 꼭 시비 걸 듯 하였었지 않더냐? 허나 먼저 용안을 붉히던 그 모습에
서 진심임을
짐작하였다. 혹시 왕은 도도하고 괄괄하며 격한 겉의 성질답지 않게 사실은 무척 수줍음을
타는 사람은
아닐까?
순간 순간 문득 왕에게서 느껴지던 강렬한 외로움과 그늘은 항시 중전의 마음을 짠하게 적
시었다. 저를
장하게 소박주고 능멸하며 조롱할 적에도 그런 그늘 같은 것 때문에 중전은 왕을 완전히 미
워할 수가 없
었다. 외로우신 전하를 내가 잘 모시고 잘 감싸안아 드리어야지 하고 다시 한번 다짐하는
중전이다.
"할마마마 말씀을 명심하겠나이다. 저가 충심으로 전하를 보필할 것입니다."
대답하는 중전의 목소리가 사뭇 야무지고 또렷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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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궁. 세상 인심이란 그렇듯이 고약한 것이라고 홀로 자탄하고 있는 희란마마. 아침부터
괜한 트집질
잡아 아랫것을에게 패악질을 부리고 있었다.
약속한 주상께서 발길을 끊은 지 벌써 두어 달. 눈치는 빠른 아첨군들이 월성궁마마의 위세
가 예전만은
못해간다는 것을 딱 꿰었나보다. 문전성시를 이루었던 대문 앞에 풀이 날 지경이었다.
"아이고, 또 왜 골을 내십니까? 고정하십시오. 마마."
내당에서 큰 소리가 나니 아연 놀라 달려온 정경부인이 시중드는 아랫것들 머리타래를 뜯어
놓는 무도한
딸을 만류하였다. 상감마마의 발길이 끊어지고 심사가 뒤틀려 있어 이렇듯이 매사 골을 내
고 마음이 불
안하여 안절부절못한다. 그래서 애꿎은 아랫것들에게 분을 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허구헌 날
못살게 닦달을 하고 패악질을 부리니 민망하고 안타까웠다.
희란마마, 면경 간수를 깨끗이 하지 않았다고, 저고리 소매에 얼룩이 졌다고 곁에 시립한 나
인년들 얼굴
후려갈기고 본때나게 머리타래 뜯어놓았다. 씩씩대다가 부드러이 위로하는 어머 앞에서도
골을 팍팍 내
었다. 지금껏 왜 입궐하여 내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느냐고 어미를 들들 볶아댔었다. 결국은
견디지 못한
정경부인이 입궐을 한 것은 오늘 아침나절. 마침 왕대비 전하의 진갑날이 며칠 남지 않았으
니 문안 인사
를 드린다는 핑계를 대고 대궐로 찾아간 것이다.
"그래, 어머니. 입궐하시었으니 무어라 하시던가요? 상감께서 이 몸의 근신을 풀라 하셨나이
까?"
"예, 마마. 전하께서 그동안 노염이 많이 풀리셨나이다. 큰마마께서 방정하게 근신하여 반성
을 많이 한
다 하였사옵니다. 웃으시더니 활달한 누이가 집 안에만 갇혀 살아 답답증이 났을 것이라 하
시면서 잠시
저와 함께 절이라도 다녀오시지요 하였사옵니다."
"전하께서 웃으셨나이까? 참말입지요?"
"예, 마마."
"흥 그것 보라지? 기껏 골을 내시어도 금세 말짱하게 풀릴 것을 꼭 큰소리 내며 무안주시고
벌컥 노화내
시더라! 여하튼 어린애이시라, 조금만 더 있으면 짐이 잘못 하였소이다 하고 내 앞에 설설
길 분이 말이
야."
어미의 말에 희란마마 찌푸린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나에게 벌컥 화를 내고 중전 고년에게 돌아가신 상감이라, 이러하다가 정말 성총을 못난 고
년에게 홀라
당 빼앗기는 것은 아니냐? 그 분이 정말 나에게 큰 노염 내어서 다시는 돌아보지 않으면 어
쩌나. 날마다
중궁전에 드나든다 소문은 장한데, 덜컥 중전 고년이 원자라도 회임을 할 것이면 나는 갓
떨어진 끈 신
세라. 전전반측 이 두어 달, 밥맛을 잃고 간을 졸였던 일이 다 거짓말 같았다.
희란마마 붉은 입술 사이로 오랜만에 흐드러진 웃음이 피어올랐다.
"아이고, 이제야 살 것 같습니다. 어머님. 무엇하고 계신지요? 당장 차비하여 일주암이라도
다녀옵시다
그려. 홋호, 조만간 왕대비전 진갑 잔치에 두고보라지요. 항시 그러하였던 것처럼 이 몸이
주상 옆자리
를 차지하고 앉아 성총 받는 모습을 볼 것이면 이 희란이 죽었다 입질한 고약한 년들 목이
쑥 자라목이
될 것입니다"
아랫것들을 재촉하여 당장 나들이 준비를 하는 희란마마. 면경 안에 비친 고운 제 얼굴이
오랜만에 만족
스러웠다.
모처럼 향물 욕간하고 분단장에 대국서 들여온 비싼 입술연지 곱게 발랐다. 색 고운 비단저
고리치마 차
려 입고, 온갖 패물로 단장한 그녀의 모습은 참으로 단국의 모란꽃이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
을 정도였다.
팔자에도 없는 소복에다 근신하는 척하던 이즈음. 아주 살맛이 나지 않았다. 비로소 제 욕색
찾고 상감
의 용서까정 받았다 하니 다시 기세등등해진 위세가 만만치 않았다.
앞마당까지 대령한 가마를 타고 불일산 일주암까지 내쳐 달려가는구나.
허나 희란마마는 아직은 모르니, 차마 정경부인이 차마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었다.
몇 번이고 알려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모든 일에 있어 매사 제 맘
에 들지 않고
조금만 못마땅한 점이 있으면 고약한 패악질이 장한 따님이라. 말 한마디 잘못하였다가 모
처럼 편안해
진 성질머리를 건드릴 것 같았다. 결국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정경부인이 아침에 대궐 들어가서 전하를 알현하였을 때였다. 예전 마냥 친절하시고 다정하
시었다. 헌
데 이상한 일이지. 웃음 진 용안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서늘하였다. 어쩐지 쌀쌀맞고 사이에
결코 넘지
못할 벽이 생긴 듯 싶었다. 비록 지존이시되 항시 사가의 살뜰한 조카인 양 격식과 위엄을
벗어 던지고
소탈하게 대하시던 그 태도가 아닌 것이었다. 다정하게 건네시던 그 말씀도 입에 발린 듯
의례적인 안부
라. 그녀가 고개 조아리고 희란마마의 가긍한 사정을 아뢰어서 근신을 풀라 윤허는 하시었
다. 허나 끝내
짐이 한번 월성궁으로 나가리오 하는 말씀이 없으셨다. 오히려 중전마마를 돌려 친 말씀으
로 무안을 주
시었다.
-"누이가 성총 받는 자의 순후함을 다시 찾았다니 다행이지요. 매사 조심하고 앞으로 후궁
사는 이로서
의 올바른 거동을 갖추기를 바랍니다. 이모님께서 모친이시니 항시 누이에게 경계를 하십시
오."
"명심 또 명심하겠나이다."
"중전께서 연치 어리시고 어질며 얌전하시나 은근히 결기가 곧습니다. 하여 짐도 종종 비의
일에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이가 법도에 어김이 없는 사람이니 남들이 체통과 법도를 어기는 일도 두
고 보지 않으
심이라. 내전의 수장으로 아래를 다스림에 있어 매서우십니다. 중전의 눈에 나지 않도록 누
이더러 반드
시 조심하라 꼭 이르십시오."
그 말을 듣는 순간 정경부인은 정신이 아뜩하였다. 상감마마께서 중전을 대놓고 칭찬하심이
처음이니
그 일에도 가슴이 덜컥 떨어졌다. 허나 그보다 더 살 떨리는 말씀은 그 다음이 아닌가? 전
하께서 먼저
단언하시기를 희란마마가 중궁전 아래라 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