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하는 윤상궁과 김상궁에게 봉서를 간직케하고 궐 밖으로 내 보내시는데...
이 일로 상감마마와 그 분께서 화해하신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다. 항시 외롭
고 쓸쓸하신 마마께 진정 마음으로 의지할 분을 모셔다 드려야하는 것이다. 두
분 사이 박힌 못은 내가 중간에서 빼어 드려야하는 것이야. 홀로 앉아 방긋 웃
는 중전마마. 당신이 몰래 마련한 작은 일이 어떤 회오리바람으로 덤벼들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데...오호 통재라. 이것이 바로 운명이 마련한 악수(惡
手)로구나. 이로 인하여 살며시 피어나던 두 분마마 사이의 정분의 꽃망울이
피기도 전에 땅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니!
중전마마 일생에 있어 가장 혹독한 시련이 시작될 참이었다. 이는 내미지상 여
인이 진정한 행복을 찾기 전에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고난과 불행의 슬픈 고비
라...... 쯧쯧쯧. 이 일을 대체 어찌할거나.
홍의 11년. 삼월 열 사흗날.
성덕궁 연지(蓮池)앞 영회루에서 왕대비전하 진갑 잔치가 화려하고 장엄하게
벌어졌다.
이 날의 경사를 기념하여 몇가지 행사가 진작부터 행하여졌다. 대궐 앞 창화문
앞에서 기민들에게 쌀을 나누어주는 행사가 보름 전부터 거행되었다. 당일에
는 상감마마께서 전교를 내려 도성과 지방 12부의 세금을 감하는 조치를 명령
하시었다. 기쁨을 더불어 누리라는 뜻이었다.
묘시초에 기침하시어 강사포에 원유관을 쓰고 대전인 문정전에 나와 왕과 백
관들이 왕대비전하의 진갑을 축하하는 치사(致詞)를 올리는 행사를 치렀다.
그 행사가 끝난 후에 곤룡포로 갈아입은 왕은 왕비와 더불어 창희문에 앞에 직
접 나가시었다. 기민들에게 쌀과 포목을 나누어주는 행사를 직접 관장하신 것
이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들. 아기를 안은 아낙네들. 병들어 비틀거리는 병자
들에게 어수를 들어 직접 쌀을 나누어주시고 포목을 내리시고 약첩을 나누어
주시는 두 분 지존 마마의 자비 앞에서 백성들은 소리높혀 주상 전하 만만세를
외치었다.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돌아 들어가시는 두 분마마의 등뒤로 아침햇
살이 살풋이 어렸다.
진연의 자리는 화려하였다.
왕대비전하의 자리는 영회루 상석에 마련되었다. 연꽃 무늬가 새겨진 두터운
방석이 깔리고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 병풍이 둘러쳐졌다. 그 앞에는 옥주렴
이 드리워졌다.
잔치행사에 필요한 향로. 술병과 술잔. 주탁과 진채꽃이 꽂힌 화병이 놓인 탁
자. 휘건함과 하례를 드리는 신하들에게 나누어줄 꽃이 놓인 탁자들이 왕대비
전하의 옆옆으로 벌려졌다.
상감마마의 자리는 왕대비전하의 동편, 호피 방석이 놓였다. 중전마마의 자리
는 상감마마 건너편. 발이 쳐지고 모란꽃 방석이 놓여졌다.
의식이 시작되었다. 초대받은 의빈. 척신. 백관들이 융복을 입고 동편 각자 마
련된 자리 앞에 들어와 섰다. 잠시 후에 내명부와 외명부가 서편으로 들어와
섰다.
여민락이 연주되기 시작할 무렵, 예복을 갖춘 왕대비전하께서 상궁들의 인도
를 받으며 자리에 들어오싱 좌정하시었다. 융복 하신 상감마마, 원삼에 어여머
리하고 떨잠 곱게 꽂아 성장하신 중전마마께서 각기 상궁 나인을 딸리시고 따
라 들어서시었다.
여관의 구호에 따라 제일먼저 중전마마를 필두로 내외명부가 차례로 휘강전전
하께 절을 하였다. 낙양춘곡이 청아하게 울렸다. 연지의 푸른 물에 옥구슬 같
이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가 경사스러움을 한껏 더하였다. 그 다음에는 의빈과
척신이 절을 올렸다.
왕이 절을 하는 자리로 걸어가자 등 뒤에서 여민락과 낙양춘곡이 따라 울렸다.
의빈. 척신 백관들이 일제히 일어나 왕을 따라 다시 왕대비전하께 재배(再拜)
하였다.
잔치를 시작하는 의미로 왕대비전하께 휘건을 받치는 의식이 끝났다. 그 자리
에 초대된 모든 손님에게 찬안(음식상)과 관에 꽂을 꽃을 올리는 차례가 돌아
왔다. 함께 즐거움을 나눈다는 뜻으로 모든 사람이 관과 머리에 꽃을 꽂으니
삽시간에 영회루가 화려한 꽃밭으로 화하였다.
왕이 일어나 앞에 나아가 첫 술잔을 받쳐 올렸다. 할마마마의 경사를 맞이하여
치사(致詞)를 드리자 휘강전마마께서는 "전하와 더불어 경사를 함께 한다"는
선지(宣旨)를 내리고 그 술잔을 받아 드시었다. 천세만세곡이 연주되는 동안
왕은 세 번 고두하고 "만세 만세 만만세"를 불렀다. 모든 내빈들이 함께 하였
다.
왕대비전하께는 총 100가지의 푸짐한 음식이 차려진 큰상이 올려졌다. 왕과
중전 앞에는 81가지의 음식이, 각 내빈들에게는 41가지의 음식이 차려진 상이
놓여졌다. 음악이 연주되고 술과 탕이 차례로 받쳐지는 동안 춤(呈才)이 벌려
지고 음악이 연주되었다.
오래 장수하시기를 축원하는 의미가 담긴 헌선도 정재가 벌어지고 음악은 여
민락, 환환곡이 연주되었다.
참으로 이렇듯이 흥겹고 장엄하며 격식에 맞는 즐거운 잔치도 없는 것이다. 무
엇하나 모자란 데 없고 부족한 것 없으며 화락함과 즐거움만이 넘치는 시간이
었다.
사시 말에 시작한 영회루의 잔치가 파한 것은 신시 무렵이었다. 먼저 상궁의
인도를 받아 왕대비전하께서 물러나가시고 그 뒤를 내외명부가 따랐다.
잔치의 일이 무사히 잘 끝나 만족스러웠다. 한 잔 술에 용안이 대추빛이 된 전
하. 흐뭇하여 용안에 가득히 미소를 지으며 중전을 따라 교태전으로 들었다.
왕대비전하를 뫼시고 가까운 내외 종친들이 모두 모여 조촐한 잔치를 다시 마
련할 것입니다 중전이 청하였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모르고 왕은 서온돌로 들어섰다.
싱글벙글하던 상감마마의 용안이 갑자기 굳어졌다. 승복을 입고 고개를 숙인
채 서있는 한 여인을 보던 순간이었다. 웃음 짓던 얼굴이 삽시간에 찌푸려졌
다. 왕은 하얗게 질린 얼굴을 들어 중전을 쏘아보았다. 눈에는 분노의 불길이
줄기줄기 뻗어 나오고 있었다.
"가, 감히 그대가 어떻게... 어떻게 이토록 짐을 능멸하는가? 감히 어떻게!"
"마, 마.....마."
상글거리며 한마디 칭찬을 들을 것이다 기대하였던 중전의 얼굴이 파르라니
식어내렸다. 왕은 중전을 노려보며 씹어뱉듯이, 고통스럽게 내뱉었다. 치열한
배신감, 더없이 고통스럽고 민망하며 뼈시린 자책이 함께 뒤범벅이 되어 이윽
고 지독한 노염과 괴로움이 그의 얼굴을 뒤덮었다.
"믿었거늘. 그대를 짐은 믿었거늘! 그래서 속내를 다 털어놓았거늘! 그대만은
짐을 이해한다 어찌하든 짐을 보아준다 믿었거늘! 그런데 겨우 이런 짓인가?
결국은 짐더러 천하의 폭군이다 망신을 주는가? 그런가?"
"마, 마마. 신첩이 무슨..."
"나가시오! 꼴도 보기 싫으니 나가시오! 아니 짐이 나가리라! 다시는 예로 들지
않으리라! 허기는 짐 같은 불측한 폭군은 감히 예로 들 자격이 없음이라. 길러
준 어미를 머리털 자르고 쫓아낸 터라 강상을 어긴 인간이니 어찌 어진 중전을
상대하여 예에 서 있을 수 있을까?"
도망치듯이 한발 물러서던 왕이 갑자기 돌아섰다. 같잖고 건방진 것! 여린 볼
을 후려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왕의 손이 중전
의 얼굴을 세차게 후려친 것이다. 기막히고 망극하여 차마 눈을 둘 데가 없는
자리, 물 끼얹은 듯 적막한 공간에 비틀리고 자포자기한 왕의 나지막한 목청이
뚝뚝 얼음처럼 떨어졌다.
"중궁을 채우고 지존이라 이름붙으니 감히 눈에 보이는 것이 없더냐? 네깐 것
이 무엇이관대 짐이 들추지 말라 하는 것을 후벼파느냐? 남들 눈앞에서 이리
도 짐을 망신시키고 싶음이더냐? 짐이 승복 입은 저 이의 일을 입 밖에 내는
자는 지금껏 그 자리에서 박살을 낸 터이다. 네가 중궁이라 한들 그 일을 피할
것 같으냐? 당장 폐비하여 목을 벨 것이다. 기다리거라."
벼락치는 소리가 났다. 중궁전을 뛰쳐나가던 왕이 발에 걸치적거리는 문짝을
걷어차는 소리였다. 중전은 자신도 모르게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너
무 놀라 아픔도 채 느껴지지 않는 볼을 두 손으로 감싸안으며 실성한 듯 중얼
거렸다. 어찌 하여? 어찌하여?...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여 뚝뚝 떨어졌다.
"신첩은 다만, 다만...... 창빈 어마마마를 그리워하시는 줄 알았나이다. 민망하
고 참괴하여 차마 뵙지 못하리라 하신 줄 알았나이다. 신첩은 다만 그 뜻이었
습니다. 마마....."
************
<12>
봄이 되었다고는 하나 이상스레 스산한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지나가는
아침이었다.
대전에서 봉명상궁이 나왔다. 윤상궁을 보는 눈에 눈물이 글썽하고 얼굴이 새
파랬다. 간이 철러덩 떨어진 윤상궁. 말하지 않아도 짐작함이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천지신명님 하고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묻
는데 목청이 절로 덜덜 떨렸다.
"대, 대전에서 하,하명이 내렸는가?"
"예, 마마님. 참으로 망극하오니, 중전마마를......"
"어떤 처분을 하시었는가?"
"참으로 민망하고 망극하옵니다. 흑흑흑. 중전마마더러 교태전을 떠나시라 하
옵나이다. 연경당으로 거처를 옮겨라 하는 교서가 내렸나이다."
"뭐, 뭐라고? 중전마마더러 교태전을 떠나라 하시었다고? 허, 허면 참으로 중
전마마를 폐서인하신다는 어지(御旨)이신가?"
"그것까정은 안즉 아니옵지만은 절대로 경자년의 일을 발설치 말라 하신 상
(上)의 엄한 분부를 감히 어긴 처신이 심히 불쾌하다 하시었나이다. 주상의 위
엄을 욕보이고 망신시킨 무엄함이 극에 달하니 이는 절대로 용서치 못함이다.
교태전의 주인이 될 수 없음이니, 또 다른 분부가 내릴 때까정 연경당에 보내
라 하시었나이다."
윤상궁. 이를 으드득 갈았다. 대전의 용마루를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
다.
"참으로 잔인하심이야. 차라리 우리 중전마마 이꼴 저꼴 아니보고 딱 폐서인
되시어 궐을 나가심이 참으로 복이라 할 것이다. 열 다섯 어린 나이로 궐에 들
어오시어 지금껏 당한 수모 극에 달하였고 흘리신 옥루로도 강물이 넘칠 참인
데 이제 그것이 모자라도 옥안까정 후려치시고 폐서인하신다 협박하심이라?
댕겅 잘라 아예 사가로 내치시지 어찌하여 연경당으로 내보내신다던가? 깊은
금원에 처박아 두고 또 어떤 수모를 주시려고 그리하시는가?"
"망극하옵니다. 주상의 뜻이 엄하시옵니다. 이 날 당장 연경당으로 내보내라
하시었나이다. 서두르소서."
".....중신들의 기색은 어떠한가?"
"......월성궁 권속이 넘치는 조정 아니옵니까? 이기회다 하여 만면에 화색이라.
저들 불측한 주인이 다시 성총 회복할 기회가 왓다 하여 아주 난리도 아니지
요. 듣자하니 이미 교태전의 망극한 일이 소문 퍼진터라, 성동 대감께서 중신
움직여 아주 이기회에 중전마마를 폐서인시켜라 나설 작정인 듯 하옵니다."
".....바늘 끝만한 틈도 아니 놓치는 계집이 할만한 일일세."
윤상궁이 장탄식을 하였다. 어찌하든 중전마마와 대전마마의 살풋 돋는 그 정
분을 투기하여 음해하려고 작심한 그 계집이 아니던가. 이번의 날벼락같은 사
단으로 중전마마가 내침을 당하게 생겻으니 저는 손안대고 코를 푼 격이라. 붉
은 웃음 지으며 얼씨구나 좋다! 하고 있을 고약한 광경이 눈앞에 선연하였다.
어찌할 수 없는 엄한 분부라. 봉명상궁이 고변하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날벼락
같은 소식을 앞에 두고 마음 고생이 심하여 여윈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였을 뿐
이다. 물기 어린 듯도 보이는 커다란 눈을 들어 창 밖을 우울하게 바라보았다.
".....세해 내내 희망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이 곳이니. 허기는...... 다른 곳으로
보내주신다는 것을 은혜로 삼아야하겠지."
"망극하옵니다. 중전마마, 흑흑흑."
중궁전 아랫것들이 하나같이 안타깝고 통분하여 눈물바다가 되었다. 중전은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입을 다물라. 더없이 경망스럽다는 구설들이 날 것이다. 헌데 왜 연경당으로
나가라 하시는가? 그 밤에는 당장 폐비하여 주신다 하더니...... 차라리 폐비하
여 주신다 교서를 내려주시었다면 내가 실로 은혜를 입었다 할 것이야."
"어찌 이토록 망극한 말씀을 하십니까? 무어라 하여도 마마께서는 주상 전하
의 한분 정궁이시며 국모이십니다. 마음을 강잉히 가지시옵소서."
".....혼인하여 교태전에 앉은 지 세 해. 어리석어 성총 받지 못하는 정궁이 무
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그저 매시간, 매순간마다 살얼음판이었네 그려. 나는
왜 내가 이곳에 앉아 있어야하는 지를 알 수가 없었어. 차라리 날 쫓아내시고
명문대가 아릿다운 미인으로 하여 새로이 정궁을 맞이하면은 전하께서도 즐거
우시고... 금세 그이가 승은받아 잉태도 할 것이니 사직도 반석이라. 나는 이
기회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네."
목청은 담담하고 조용하지만 그 것이 사무친 설움이요 슬픔인 줄 누가 모를 것
인가? 중궁전 아랫것들이 모다 망극하여 다시 한번 한 목청으로 중전마마!!-
하고 울음을 터뜨리었다. 눈물바다 안에서 오직 중전만 눈물도 없이 꼿꼿하였
다.
"조용히 하라지 않느냐? 내가 당장에 쫓겨나는 것도 아닌데 어인 호들갑들인
가? 사람의 운명은 하늘이 정하시는 것이니 내가 고집 부린다 하여도 될 일은
될 것이며 아니 될 일은 아니 될 것이다. 허니 너무 수선을 피우지 마시게. 나
는 그저 운명에 순응할 따름이네. 윤상궁."
"예, 중전마마."
"차비를 하게. 연경당으로 갈 것이야. 다른 이는 딸리지 말고 자네와 김상궁만
따르게. 비록 폐비되지는 않았으되 대전마마께는 이 몸이 중죄인이라. 박상
궁."
"예, 중전마마."
훌쩍이며 박상궁이 대답하였다. 중전마마 손수 옥수 들어 어여머리에 꽂힌 호
접잠을 빼들었다. 담담하게 하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