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
'아까.... 할배가 뭐라 했는데.... 음.....'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휘아의 눈이 번쩍 뜨인 것은 일각 가량이 흘러서였다.
'돌... 신발? 분명 돌, 신발.... 어쩌구 했는데....'
주위를 둘러 보았다. 하지만 돌로 된 신발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곳에서 신발을 신고 다니는 사람은 없다. 옷도 제대로 입고 다니는 사람이 없거늘 신발이라니. 게다가 돌로 된 신발?
미치지 않고서야... 아니지 미치긴 미쳤었지. 그래도 설마?
'이상하네?'
분명 돌, 신발이라고 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휘아의 눈이 어느 구석에 가서 멈췄다. 돌무더기가 잔뜩 쌓여 있는 곳. 도사할배가 정신만 들면 절을 하는 벽 앞이었다. 도사할배의 발이 묘하게 틀어져 뻗어 있다.
휘아는 도사할배를 돌아다 봤다.
'할배. 저기야?'
'그래.'
평온한 표정이 마치 ‘네 말이 맞아.’ 하는 표정이다.
다가가서 돌무더기를 하나하나 들어내 보았다. 상당히 많은 양이 쌓여 있었다. 수백개의 돌을 쌓아 만든 돌무덤 같았다..
돌을 들어내고 나서야 그 곳이 본래는 움푹 패였던 곳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생각보다도 많은 양을 들어내야만 했다.
그리고 휘아의 눈에 들어 온 것, 그것은 삭아서 문드러지기 직전인 한 짝의 낡은 가죽신이었다.
가죽신을 바라보는 휘아의 눈에 의혹이 가득 찼다.
"신발은 발에 신는 것이라고 했는데 저걸 어떻게 신어?"
그랬다. 휘아가 아는 신은 그런 것이었다. 한 번도 신어보지 않았고, 보지도 못 했으니 그저 짐작만 할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것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을 수 없는 신발이라니.
'가만? 할배가 신지도 못하는 신발을 신으라고 다 죽어가면서 말했을 리는 없는데...'
손을 뻗어 신발을 들어내려 할 때였다. 부스러지는 가죽의 촉감이 손안 가득 느껴졌다. 그리고 그 속에서 누런 무엇인가가 속살을 드러냈다.
'뭐지?'
삭은 가죽을 조심스럽게 털어내자 누런 물체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매우 얇으면서도 묘한 재질의 천 석장과 평범해 보이는 천 한 장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휘아는 먼저 평범해 보이는 천의 글을 읽어 보았다. 거기에는 적어도 이십년 전에 적은 도사할배의 글이 있었다.
[정신이 가물 가물 해진다. 그 동안 붙잡고 있던 정신이 흐트러지는 것을 느끼고 훗날을 기약하며 삼령문의 삼십칠대 제자 운몽이 글을 남긴다.
본문의 모든 정신이 담긴 삼신주를 찾아 무저뇌옥에 들어 온지 이십 년이 되었다.
백 오십 년 전, 본문의 삼십 삼대 문주 지양선인께서 삼신주를 지니고 행방이 사라지면서 본문의 맥이 끊기고 말았다.
일인전승의 문파는 아니었으나 본문의 전승을 이을 만한 제자를 찾기가 힘들었으니, 실질적으론 일인 전승보다도 더 어렵게 이어져 온 본문이었다. 나의 사부께서도 오십 여 년을 헤매어 겨우 세 명의 제자를 찾을 정도였으니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그것도 백 오십 년 전부터는 말뿐인 문파요, 대를 잇지 못하는 제자가 되어 버렸다. 그 모든 것이 선대에 잃어버린 삼신주로 인한 것이었다.
삼신주가 없이는 본문의 공부를 어느 경지이상 익힐 수 없고, 삼신주가 없이는 본문의 계승 자체가 인정이 되지 않음이니, 곧 삼신주가 본문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었다.
.................
나는 십수 년을 헤맨 끝에 마침내 선대 문주님께서 마지막으로 가셨을 만한 곳, 세 곳을 알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두 사제와 함께.......
....................
설마 무저뇌옥에 들어가는 죄수들에게 이렇게 심한 금제를 가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뇌호혈을 파괴하다니.....
본문의 공부 중 정신을 뒤바꾸는 방법을 써야만 했다.
이혼령(離魂靈)의 법(法)
뇌호혈에 꽂은 침으로 인해 파괴된 정신의 세계 안으로 멀쩡한 정신을 억지로 집어 넣었다. 그리고 반쯤 파괴된 정신을 멀쩡한 쪽으로 이동 시켰다. 한마디로 희석을 시킨 것이다. 그리고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을 한 쪽으로 몰아 넣었다.
이 법은 본문의 공부를 익히던 중, 잘못 되었을 경우의 부작용인 마성의 침탈에 대항하기 위한 마지막 수법으로, 최악의 경우가 아니면 써서는 안 되는 금단의 법이었다.
겨우겨우 삼할 정도의 정신을 한 쪽에 몰아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는 하루에 서너 시진 정도만 제정신으로 지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정신이 들어 있을 때에도 내 자신을 찾기가 힘들게 될 지도 모른다.
오오..... 하늘의 보살핌이 없다면.........
......................
여기에 들어 온 지 이십 년이 흘렀음에도 아무 것도 찾지 못했다. 분명 세 곳 중 이곳을 가장 가능성이 많은 곳으로 생각했거늘.... 하늘이 원망스럽기만 하구나.
진정 모든 것을 이대로 묻고 죽어가야 한단 말인가?
이 글을 보는 이여.....
그대가 이 글을 볼 때쯤이면 나는 이미 제 정신이 아니던가, 아니면 죽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대에게 이 글이 이어졌다는 것은 그대와 나의 인연이 이어져 있음이니... 그대에게 내가 가진 것을 남긴다.
당장 그리 큰 힘은 되지 않을 것이나, 참오하고 참오하다 보면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그대가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거든 본인의 두 사제를 찾아라. 두 사제 역시 삼신주를 찾아 두 곳의 금지에 들어갔으니...
그 곳은.....
부디 두 사제가 삼신주를 찾았기만을 바랄 뿐이로다.
하늘과 땅과 바람의 삼신이여, 삼령의 혼을 돌보소서.....]
기나긴 글이 끝났다.
휘아의 얼굴이 멍하니 굳어져 있다. 머리 속은 실타래가 얽힌 듯이 뒤죽박죽이다.
'그러니까 도사할배는 여기에 삼신준가 뭔가를 찾으러 들어왔지만 아무 것도 찾지 못하고 죽었다. 뭐, 그런 말인데...'
세 아버지들이 몇 년간 동굴을 뒤지고 다녔었지만 아무 것도 찾지 못했다고 했었다. 도사할배와 마찬가지로.
그렇다면 여기에는 삼신주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 아닌가?
'...가만?'
자신이 알기로 동굴 몇 개는 뒤지지도 못했다. 발을 못 움직이는 사람은 접근 할 수도 없을 정도로 험난한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혹시?'
삼신주가 뭔지는 모른다. 그러나 도사할배가 애타게 찾을 정도면 평범한 물건은 아닐 것이다.
바깥세상에선 보물이라는 것을 차지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기도 한다고 하던데... 그런 보물일까? 하지만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거라면 굳이 억지로 여기까지 들어올 이유가 없으니까.
'그럼 뭐지?'
머리를 털어 일단 복잡한 생각을 걷어 내고 다른 천에 적힌 글을 살펴봤다.
모두 석장이었다. 누런 색에 부드러우면서도 질겨 보이는 천이었다. 거기에 깨알같이 작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만일 일반적인 글씨라면 족히 수십 장에 적혀야 할 양이었다.
[태초에 세상이 만들어지며 하늘의 천신, 땅의 지신, 대기의 풍신이 있었도다.
삼신께선 세상을 혼탁 케 하는 삼악을 소멸시키기 위해 당신의 아들들에게 한가지씩의 힘을 주어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시니, 하늘의 양, 땅의 음, 대기의 풍이라.
.................
천양의 법은........
지음의 법은........
대기의 법은........
이 모든 힘은 삼신의 뜻으로 삼악을 누르기 위함이니......]
휘아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글씨부터가 평범하지가 않았다. 하지만 정 못 읽을 글은 아니었다. 헌데 문제는, 휘아가 조동인에게 배운 글로는 그 뜻을 해석하기가 힘들 정도로 난해하다는데 있었다.
위안이라면 신주령의 법문과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그럭저럭 읽을 수는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도사할배가 나중에 가르쳐 준 혼을 다스리는 방법이 따로 쓰여 있었다.
얼마가 지나고, 휘아는 천에 적힌 글을 다 읽고 나자 몸을 일으켰다. 옆에는 여전히 도사할배가 편안한 표정으로 누워 있었다.
"할배, 휘아가 삼신주라는 거 꼭 찾아 볼께. 알았지?"
그 날부터 휘아에게 두 가지 일거리가 늘어났다.
한가지는 물론 삼신주를 찾아 동굴을 헤매는 일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도사할배가 남긴 석장의 누런 천에 쓰인 글을 해석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휘아는 자신이 그리 똑똑하지 않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 지경이었다.
아버지들은 자신이 너무 똑똑해서 탈이라 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아부지들, 순 거짓말쟁이야!'
* * *
깡! 깡! 깡!
철광석을 캐는 일은 갈 수록 어려워진다. 가진 연장이라곤 오래 전에 내려 보내준 망치와 정이 전부였다.
헌데 그 마저도 이제는 많이 닳아서 손에 쥐면 그 끝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걸핏하면 손을 다치기 일쑤다.
그 뿐이 아니었다. 무저뇌옥에 신참 죄수가 들어오지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해선 아무도 모른다.
십이 년 전 휘아의 어머니가 들어온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것도 일 년만의 일이었다 한다. 그나마 먹을 것을 끊지 않고 있는 것이 다행일 정도다. 하기는 올려 주는 철광석이 있으니....
한 사람 두 사람 죽어가더니, 이제 남은 사람은 일곱 명 뿐이다. 그 바람에 남은 사람들이 더 일을 많이 해야 한다. 그래야 먹을 것이라도 풍족하니 먹을 수 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으면 대부분이 죽을 것이다. 그러다 결국 남는 사람은 휘아 자신뿐일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무서워 진다.
매일같이 일상사가 반복이다.
잠에서 깨면 뛰는 것부터 시작한다. 뛰면서 신주령의 법문을 암송하고 이빨아저씨의 다섯 걸음을 반복하며 뛴다.
처음에는 발이 꼬여 넘어지기 일쑤였다. 그 바람에 온 몸에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다.
너무 힘들어 포기할까 생각도 했지만 오기가 일어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수년, 이제는 자연스럽게 움직여진다.
아버지들은 내가 뛰는 것을 보면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눈이 나빠졌는지 흐릿하게 보인다고도 한다.
때로는 대여섯으로 보인다고도 한다. 왠지는 나도 모른다. 내가 뛰는 것을 나 자신은 멀리서 볼 수 없으니까.
"후우! 후우!"
지칠 때까지 뛰고 나면 온몸이 상쾌해진다. 특히 신주령을 암송하며 뛰면서부터 더 기분이 좋아졌다.
숨을 가라앉힌 휘아는 문득 구석진 곳의 동굴을 쳐다보았다.
"오늘은 이빨아저씨한테 가 봐야겠다. 많이 아프다던데..."
도사할배가 죽고 나서는 부쩍 신경이 쓰인다.
휘아는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천공을 한 번 올려다 보고는 이빨아저씨가 기거하는 동굴로 향했다.
누워 있는 이빨아저씨의 모습은 많이 초췌해져 있었다.
"많이 아퍼?"
"휘아... 왔구나..."
"응."
억지로 웃음을 짓는 이빨아저씨를 바라보는 휘아의 눈에 그늘이 졌다.
그가 얼마 살지 못하리라는 것을 본능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해 줄 수있는 일은 별 것이 없었다.
"먹을 거 갖다 줄까? 아니면 물 떠다 줘?"
이런 정도일 뿐이었다.
"아니.... 그보다...."
"말해. 뭐든."
"음.... 오보천환... 어디까지...."
"다섯 걸음? 그거... 한 걸음에 다섯...."
이빨아저씨의 눈에 만족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다섯을 또 다섯... 음 그럼 백 스물 다섯인가?"
이어지는 휘아의 말에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그것은 분명 경악의 표정이었다.
"....백... 스물... 다섯?"
"응. 더 하려고 했는데 아직은 잘 안돼."
"더.... 한다고?"
이제는 경악을 넘어 마치 못 볼 것을 본 것마냥 눈동자마저 흔들렸다.
'세상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는 자신이 그 정도까지 익히는데 어느 정도 걸렸는지 생각해 보려 했지만 머리가 빠개지는 고통에 생각을 멈추어야 했다.
"제.제법이구나."
"쳇. 할 것이 없어 그것만 하니까 그렇지."
'너는 모를 것이다. 지금 네가 해낸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운이 닿아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빨아저씨, 이진생은 안타깝기만 했다. 저렇게 총명하고 자질이 있는 아이가 동굴에 갇혀 지내야 하다니...
게다가 자신이 익혔던 심법을 가르쳐 주지 못한다는 것이 더욱 이진생을 답답하게 했다. 뇌호혈에 침이 박히면서 과거의 것은 그 무엇도 깊게 생각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오보천환(五步天幻)이나마 가르칠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이 평생을 몸으로 익혀왔기에 가르쳐 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참으로 천행이라 할 수있는 일이었다.
멍하니 있는 이진생을 바라보던 휘아가 몸을 일으켰다.
"나 갈께. 빨리 나아야 돼?"
"흘.... 그래. 알았다. 으음... 우리 휘아하고 놀기 위해서라도 일어나야지...."
동굴을 나온 휘아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높은 곳에 있는 동굴이 보였다. 다섯 개의 동굴, 높이만도 삼장 이상이 된다.
발 받칠 곳이나 틈도 없어 올라갈 수가 없었던 동굴들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올라갈 수 있을 터였다. 시간 날 때마다 정으로 쪼아서 구멍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
일단 오늘은 다른 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전부터 노리고 있던 곳을.
'그 전에 아버지들을 만나 봐야지...'
세 아버지들은 자신들이 아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는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먹을 것도 자기가 찾아서 먹고, 무공을 익히는 것도 오래 전에 자기들의 능력을 벗어나 있었다. 뭐 비록 삼류 무공이었지만.
감각이 뛰어나서 진맥하는 것도 조동인보다 더 세밀하게 한다. 무엇하나 자신들 보다 못한 것이 없었다.
그간 들려 준 세상사는 방법도, 이제는 할 말이 동이나 한말을 계속 반복할 뿐이다. 세상사는 방법은 직접 겪지 않고는 모른다고 하면서. 백 번 들어도 모자란 것이라고 둘러대면서.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힘없이 동굴에 누워 있을 때 휘아의 목소리가 동굴에 메아리쳤다.
"아부지!"
느닷없이 휘아가 불러대는 소리에 우르르 좇아 나오는 세 아버지의 표정들에는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말은 퉁명스럽게 튀어 나온다. 진형구가 먼저 튕겼다.
"웬 일이냐? 험."
"에이.... 물어 볼 것이 있는데 그렇게 딱딱하게 말하면 못 물어 보잖아."
휘아의 투정아닌 투정에 조동인이 뽀르르 앞으로 나섰다.
"음하하! 그래, 우리 사랑스런 아들이 웬 일이야? 뭘 물어 볼라구?"
진형구의 얼굴이 졸지에 일그러진다. 마치 믿었던 연인에게 배신당한 사람의 얼굴처럼.
'배신자! 조금 전만해도 아버지의 위엄을 지켜야 한다고 침 튀기며 말하던 놈이!'
그러던 말던.
"아버지가 우리 아들에게 어찌 딱딱하게 말을 한단 말이냐? 절대 아니지.... 고럼!"
한다한다 하니까 더 한다. 게다가.
"그런 놈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박치기로 받아 버릴 테니까!"
멍청한 여강두 놈이 불을 지핀다.
"니네들이 다 해 먹어라!"
빽 소리치며 돌아선 진형구를 바라보는 두 아버지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래두.... 아들이잖냐.... 헤헤."
별 수 있나. 세 사람에게는 감히 아들을 내칠 용기도 배짱도 없는 것을.
진형구가 손을 놀리며 일그러진 얼굴로 휘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들아. 나에게만 살짝 물어 봐라. 히히, 그래도 내가 제일 많이 아니까."
"....."
조동인과 여강두의 입이 쩍 벌어졌다. 어이가 없었다. 휘아가 한숨을 내쉬며 질문을 던졌다.
"후우.... 참 나, 아버지들도.... 그럼 하나만 물어 볼께. 저기, 호수동굴에 들어가 봤어?"
"어."
"건너가 봤어?"
"아니?"
"건너에 뭐 있는 줄 알아?"
"몰라."
"그럼 호수동굴에 대해서 아는 게 뭔데?"
"....."
진형구의 고개가 푹 수그려졌다. 그러더니 순간적으로 번쩍 들린다.
"너? 거기에 가려고?"
"응."
"건너서?"
"응."
"헤엄 칠 줄 알아?"
"......"
'짜식이, 헤엄도 못 치면서.'
"그럼, 헤엄부터 배워라."
".......응...."
얼마만인지 모른다. 아들에게 뭘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 뒷짐진 진형구가 기세등등하게 한껏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개헤엄부터 배워!"
"나는 송장헤엄을 가르쳐 주지. 험!"
조동인도 어깨에 힘을 줬다. 그러자 골똘히 생각하던 여강두가 소리쳤다.
"좋아! 나도 가르쳐 준다! 잠수헤엄!"
풍덩! 풍덩!
어둠의 세계에서 누만년을 조용히 잠들어 있던 호수가 진저리를 치고 있다.
아닌 밤중에 몰려 든 시커먼 인간들로 인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지금껏 살짝 살짝 적셔지기는 했어도 처녀지신 같던 뽀얀 살결, 아니 맑은 살결이 뿌옇게 흐려지다 못해 시커먼 먹물이 번지고 있는 것이다.
휘아가 언제 제대로 목욕을 해 봤을까. 진형구 등이 언제 제대로 때를 밀기를 했을까. 시커멓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지.
헌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물가에서 풍덩거리고 있던 휘아가 고개를 쳐들고 묻는다.
"아부지! 물이 시커멓게 됐는데 어떡하지?"
진형구가 신이 나있다가 되물었다.
"뭘?"
"우리가 나중에 먹어야 하잖아."
"....."
슬그머니 풍덩거리다 말고 물에서 나오는 진형구, 신나게 놀고 있는 조동인과 여강두를 바라보았다.
"니네들은 그 쪽 거 퍼 먹어라."
조동인과 여강두도 흠칫, 물에서 기어 나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휘아는 처음으로 물에서 노는 재미에 나올 줄을 모른다.
"휘.휘아야..... 너는 물 안 먹을 거야?"
"어차피 더러워졌는데 뭐."
"그...런가? 에라 모르겠다. 야호!"
풍덩! 다시 세 사람이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신이 난 세 사람이었다. 까짓 거 먹는다고 죽겠냐?다.
“이야! 재밌다! 왜 우리가 이런 걸 몰랐지?”
“바보야! 먹을 물에 뛰어 들어서 노는 놈이 이상한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