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적상은 유현명의 말에 고개를 올라오고 있는 세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특정 문파의 특징이 보이지 않는 데다 각기 다른 무기들, 낭인들 같습니다. 제법 괜찮아 보이는데요?"
어느덧 거리가 이십여 장이 되자 더욱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잠시 더 세 사람을 살피던 유현명이 조용히 말했다.
"기세가 제법이다. 쓸만할 것 같은 데... 한 번 물어나 봐라."
휘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십 여 장의 거리가 되자 그들 중 몇몇이 세 사람을 바라보고는 뭐라 쑥덕이는 것이 보인 것이다.
비록 관도이고 종남의 앞마당이긴 했지만 도검을 차고 지나다니는 이는 그리 쉽게 볼 수있는 모습이 아니었던 터에, 약간 특이한(?) 기운을 지닌 세 사람의 모습이 아무래도 그들의 신경을 건드린 듯했다.
십여장의 거리로 가까워 오자 쑥덕거리던 자들 중 하나가 일어서더니 세 사람에게 다가온다.
휘가 옆의 초평우에게 물었다.
"표국 사람들이 원래 저리 무사들만 다닙니까?"
초평우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쟁자수도 없고 전부 무사들만 있군요. 뭐 물건이 작다거나, 아니면 가끔 있는 일입니다만 사람을 보표할 때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휘가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다가 온 자가 말을 걸어 온다.
"나는 백풍표국의 장호라 하는 표사외다. 한가지 묻고자 합니다만..."
휘가 초평우를 바라보자 초평우가 앞으로 나섰다.
"무슨 일이오?"
날카롭게 보이는 초평우의 기세에 장호라는 표사가 약간 인상을 찌푸리더니 물었다.
"세 분은 어디서 오신 분들이신지?"
"작수에서 오는 길이오만..."
"이해를 잘 못하신 듯... 내 말은 사문이 어찌 되냐는 말이외다."
"그걸 꼭 말해야 하오?"
여전히 날카로운 말투에 장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 곳은 종남산이오. 그리고 우리는 종남의 속가인 백풍표국의 표사들이오. 칼차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묻는 이유를 짐작할 만도 할 것이라 생각하오만..."
그 말에 초평우의 표정이 굳어가자 휘가 먼저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종남산에선 종남파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 말이오?"
직설적인 휘의 말에 이 번엔 장호의 표정에 당황이 떠 올랐다.
"그건... 아니고..."
"그리고, 너희들 수상한 사람 아니냐, 그걸 묻는 것이오? 그렇다면 말해 주겠소. 우린 그냥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오. 됐소?"
"그게..."
일순간 어찌 할 바를 모르던 장호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꽤나 자신만만하군! 그대들이 수상한 사람인지 아닌지, 그대의 말만 듣고 어찌 믿는단 말인가?"
"물론 믿고 안 믿고는 그대가 알아서 할 일이오. 우리는 갈 길을 가면 되는 것이고. 초형, 갑시다."
휘가 장호를 무시하고 가려 하자 저 만치에서 한 사람이 또 일어나더니 그들에게 다가왔다.
"장호! 물러서라!"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 자에게선 제법 삼엄한 기세가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휘의 앞으로 오더니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장표사가 무례를 범한 것 같소."
그래도 이자는 좀 나은 것 같다. 휘가 바라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백풍표국의 표두, 오적상이라 하오. 사문을 물은 것은 귀하들에게 한가지 물어 볼 것이 있어서요."
휘는 오적상을 바라보다가 그의 말에 별 다른 악의가 없는 듯하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사문이라 할 곳은 없습니다. 그냥 낭인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흠,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오적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따로 가시는 곳이 있으시오?"
"낙양으로 가는 길입니다만..."
휘의 말에 오적상이 슬쩍 옆을 돌아 보았다. 휘의 눈도 그가 바라보는 곳을 향했다. 청의의 중년인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인다. 아마도 오적상이 움직인 것은 그의 명에 따른 것인 듯했다. 오적상이 정색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와 동행하지 않겠소? 우리도 낙양을 거쳐 갈 생각이오."
뜻밖의 제의였다. 표행에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을 합류 시킨다는 것은 웬만한 일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강호경험이 없는 휘가 생각해도 오적상의 제안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었다.
"의외로군요.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말 못할 것도 없소. 우리는 지금 표행을 하는 중이오. 헌데 그만 뜻밖의 일이 생겨 한가지 일을 더 맡게 되는 바람에, 길을 가던 중 일행이 갈라져야 하오. 그러다 보니 인원을 보충해야 하는데, 종남에 사람을 보내 도움을 청하기에는 시간이 없소이다. 해서 귀하들이 낭인이라면 임시로 고용을 할까 하는 것이오."
"우리를 고용한다고요?"
"그렇소. 대우는 섭섭치 않게 해 주겠소."
이들은 자신들을 어떻게 믿고 표행에 합류를 시키겠다는 걸까? 그러나 말투로 봐서 그냥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휘는 잠깐 생각을 하는 듯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군요. 어차피 낙양에 가던 길이니..."
휘의 대답에 오적상이 웃음을 지으며 중년인에게 고갯짓을 하자 초평우가 넌지시 휘를 바라보았다.
"형님, 표행과 같이 움직이다 보면 제약을 많이 받을 텐데요."
"정 안되겠으면 따로 가지요. 뭐, 돈 벌면서 가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슬픔이 배인 눈을 가진 여인.
오적상은 세 사람을 중년인에게로 데리고 갔다.
그들이 표사들 사이로 지나가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세 사람에게 집중이 됐다. 그러나 신기한 듯 여기저기 둘러보는 휘, 날카로운 눈빛의 초평우, 얼음장 같은 표정의 풍인강, 세 사람의 표정은 여전히 한점 변함없이 전(前)과 동(同)이었다.
"사숙, 데려 왔습니다."
"음, 수고했다."
중년인은 오적상에게 가벼운 치하의 말을 하고는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나는 표행을 맡고 있는 유현명이라 하네. 오사질에게 대충 말은 들었을 것이네. 흠... 사문은 그렇다 치고, 이름정도는 말해줘도 상관없을 듯 하네 만."
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휘라 합니다."
휘가 조동인의 성으로 이름을 말하자 두 사람도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초평우요."
"풍인강이오."
"음, 가서들 쉬게. 곧 출발할 것이네."
유현명의 말에 세 사람이 한쪽 구석으로 가자, 오적상이 유현명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유사숙, 저들이 꼭 필요 하겠습니까?"
유현명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 중... 두 사람은 오사질보다 강하다. 일이 안 터지면 안 터지는 대로 좋겠지만, 만일의 경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아무래도 이번 일, 마음에 좀 걸리는 게 있어..."
오적상이 굳은 표정으로 유현명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저자들의 무공이 제법 강하다는 말을 사숙이 할 때만 해도 그저 하는 소리라 생각했었다. 헌데 이제는 자신보다 강하다고 한다.
오적상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믿지 않기도 그랬다. 유현명이 비록 사숙들 중 나이는 제일 적다고 하나, 무공까지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종남십검의 이름은 거저 얻어지는 이름이 아닌 것이다.
오적상은 새삼스런 눈으로 휘 일행을 돌아다 보았다.
'두고 보면 알겠지...'
일각 후, 표행이 출발했다. 새로운 세 사람의 식구를 맞이한 채.
뒤쪽에 처져서 따라가던 휘의 눈이 흥미로운 빛을 띠고 반짝인 것은, 출발한 지 반시진 가량이 지난 후였다.
휘도 마차에 짐이 실리지 않았다는 것은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마차에는 사람이 타고 있었으니까. 넌지시 오적상에게 물어 본 바로는 표행의 목적 중 하나가 그 마차에 있다 했다. 초평우의 말대로 이들은 보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번도 밖을 나오지 않았으니 휘는 마차 속에 누가 타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로 여인이라 짐작할 뿐. 그런데 마침내 마차가 서더니 안에서 사람이 나오는 것이다. 천하없어도 소변까지 마차 안에서 해결할 수는 없었으리라.
마차에서 내려오는 사람은 두 명의 여인, 삼십 중반은 됨 직한 중년의 부인과 아름다움 보다는 품위가 돋보이는 이십 초반의 젊은 여인이었다.
두 여인이 근처의 숲에서 볼 일을 보고는 다시 마차를 타려 할 때였다. 젊은 여인의 무심코 돌린 눈이 휘와 마주쳤다.
헌데... 맑고 깊어 보이는 그녀의 눈에는 옅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왜 저런 눈빛일까?
휘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걸 누구에게 물어 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 수록, 왠지 그녀의 눈빛이 마음에 걸려 자꾸 시선이 마차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하루가 지나자 그마저도 잊고 그저 주위의 풍광을 구경하며 길을 갈 뿐이었다.
이틀간의 표행은 별탈 없이 순조롭게 이어졌다.
그간 휘는 오적상에게서 표행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본래 표행은 장안에서 태원에 보내는 표물 한가지였다고 한다. 그런데 출발 한 지 얼마 안돼서 느닷없는 거액의 의뢰 하나가 지급으로 들어왔고, 그 의뢰가 바로 마차의 여인을 보표해서 한 곳으로 안전하게 도착시켜 달라는 의뢰였다고 한다. 다행히 그 방향이 낙양 쪽이었기에, 일부 인원이 정주로 가는 길에 데려다 주면 되는 일이라 생각하고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한다.
그렇게 급히 움직이는 바람에 인원 보충도 미처 하지 못하고 길을 가다가, 유현명의 지시로 휘 일행을 임시 고용한 것이었다.
대체 마차의 여인이 누구기에 백풍표국에 보표를 의뢰했을까? 그것도 오적상의 말대로라면 상당한 거액을 들여서.
하루가 더 지나고 표행이 화산으로 꺾어지는 화음현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 곳에서 마침내 표국의 인원이 갈라졌다. 그리고 휘의 일행은 마차를 지키는 표행에 섞여 화음현에서 하루를 지내게 되었다.
화음현은 화산의 앞마당이었기에 표물에 대한 걱정없이 쉴 수있는 곳 중의 한 곳이었다. 그래선지 사람들은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술도 한잔씩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해가 넘어가고 어둠이 몰려 올 무렵, 오적상이 휘 일행을 불렀다.
객잔의 후원에는 제법 넓은 공터가 있었는데, 오적상은 그 곳에서 휘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오표두."
휘의 물음에 오적상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다름이 아니고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 지 모르니, 그대들의 실력 정도는 알아야지 싶어서 불렀소."
아마도 유현명의 말이 걸렸던 듯했다. 자신보다 강할 거라는...
휘는 오적상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같이 행동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 일행의 능력은 알아야 할 것이니까. 그러나 그의 말투에서 꼭 그것만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풍형."
휘가 나직이 부르자 풍인강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이미 오적상의 말을 들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오적상의 이장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스르릉...
아무런 말도 없이 검을 잡아 뽑았다.
창 밖의 달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여인은 문득 들리는 말소리에 고개를 돌려 후원의 담 너머를 바라보았다.
흐릿한 달빛아래 몇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뭐라 말을 나누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나서더니 검을 잡아 뽑는다.
"아!"
그녀의 입에서 가벼운 탄성이 흘러 나왔다. 순간, 가만히 서있던 사람 중 하나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고있다.
휘는 담 너머 쪽에서 들리는 탄성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보였다.
지난 사흘간 그녀가 마차에서 나온 것은 오직 생리현상을 해결할 때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녀를 볼 수 있을 때도 그 때 뿐이었다. 그리고 슬퍼 보이는 눈을 볼 수 있을 때도 그 때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창문에 몸을 기대고 있는 모습이었다. 커다란 눈은 여전히 슬픈 빛이 떠돌아 다니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쩡!
휘가 잠시 이층의 창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풍인강과 오적상의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후원을 울렸다.
휘가 바라보자 뒤로 한 걸음씩 물러선 두 사람이 눈을 빛내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 버릇 남 줄 수야 없겠지...'
풍인강은 임가형과 싸울 때처럼 검을 치켜 세우고 오적상을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독오른 살모사처럼.
오적상은 일격의 부딪침으로 상대의 검력이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흔들리지 않는 눈빛...
이를 지그시 깨물고 검을 중단으로 올리며 한 걸음 내딛었다.
풍인강도 뒤질세라 한 걸음 나아갔다. 순간 오적상이 죽 미끄러져 오며 세 개의 검영을 그려 온다. 어깨, 가슴, 허리. 천하삼분세.
그러자 풍인강의 검이 순간적으로 휘돌았다. 세 개의 검영이 검의 회오리에 말려 들었다.
쩌저정!
말려든 검영을 좌우로 떨쳐 낸 풍인강의 검이 일직선으로 뻗어 간다. 단순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일검, 그 끝에선 푸르스름한 검기가 맺혀 있다.
오적상의 눈이 부릅떠졌다. 검기라니... 그것도 한참 겨루던 중에 순간적인 발현이라니...
몸을 비틀며 상대의 검을 후려쳤다.
쩡!
강력한 반진력에 손이 부르르 떨려 온다. 그런데도 상대의 검은 여전히 방향을 바꾸며 달려든다.
몸을 뒤로 눕히며 발을 내찼다. 철판교에 이은 일자번신.
계속되는 공격에 끝내 뒤로 이장을 물러나고 서야 상대의 검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 오적상의 이마에서는 한 방울 땀이 맺혀 떨어졌다.
검을 거둔 풍인강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휘에게서 신법에 대한 것을 배우고 난 다음부터 상대의 움직임이 훨씬 잘 보인다. 전이었다면 일격에 내칠 수는 있어도 물러서는 상대를 따라 잡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흥이 돋은 풍인강이 다시 검을 들어 올리며 오적상을 향해 다가서려 할 때였다.
"그 정도면 됐습니다."
휘의 음성이 풍인강의 발걸음을 세웠다.
"생사를 가르기 위한 것이 아니니 더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오적상의 굳어진 얼굴이 휘를 향했다. 조금은 얕보던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심전력을 다 한다 해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도 없는 것도 사실이다.
잠시 망설이던 오적상이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검이었소..."
그 말에 휘가 넌지시 한가지 사실을 알려 줬다.
"웅패검 임가형대협하고도 정면대결을 했던 사람입니다. 비록 밀리기는 했지만."
오적상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웅패검 임가형이라면 그도 들어 안다. 섬서의 호랑이, 철혈성의 한중분타주. 종남의 장로들과 같은 배분의 고수. 비록 졌다 해도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새삼 풍인강이 다시 보이는 오적상이었다.
휘가 임가형을 들먹인 것은 오적상의 체면을 세워 주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며칠간 같이 길을 가야할 테니, 적어도 임가형과 맞붙었던 사람이라면 그도 자신이 밀렸던 것에 대해 크게 마음을 쓰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음... 가서 쉬시오."
휘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뒤돌아 섰다. 풍인강도 묵묵히 휘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초평우도 꿀 먹은 늑대처럼 조용히 뒤를 따랐다.
후원을 나서며 휘는 담장 넘어 객잔 이층의 창문을 쳐다 보았다. 창문은 굳게 닫힌 채 옅은 유등의 불빛만이 창문 틈으로 비치고 있었다.
귀혼유사
다음 날, 해가 동쪽의 산 머리 위로 둥실 떠오르자 표행이 출발했다. 인원은 총 열두 명.
유현명의 지시로 휘와 두 사람이 마차의 후방을 맡게 되었다.
간밤의 소란을 알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의 바라보는 눈빛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 중에는 놀람의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장호의 눈빛도 있었고, 오적상에게서 풍인강의 무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유현명의 호기심 어린 눈빛도 있었다.
순조롭게 빠른 속도로 나아가던 표행이 대별산맥의 북쪽 끝자락인 궁호산 아래에 당도했을 때는, 구름 속 석양이 서산을 붉게 물들이며 넘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붉게 물든 구름이 하늘을 덮으며 산속의 어둠을 재촉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비라도 오려는 것 같은 날씨였다.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니 숲으로 들어가는 샛길이 나왔다. 그 곳에 도착하자 표사들은 망설임 없이 관도를 벗어나 샛길로 빠지더니 거침없이 나아갔다. 아마도 자주 다녀 본 길인 듯했다.
마차 두 대가 겨우 비켜나갈 길을 따라 관도에서 이백 여장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아담한 장원이 한채 보였다.
오적상이 휘를 돌아 보고는 설명을 해 주었다.
"우리 표국에서 가끔 지날 때마다 묵는 곳이오."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백풍표국과 관계가 있거나, 아니면 약간의 금전을 주고 쉬어 가는 곳. 헌데 기분이 묘하다. 마치...
휘가 장원을 보며 이마를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장호가 앞으로 나서더니 문을 두드렸다.
탕!탕!
"장주님! 백풍표국의 장홉니다! 계십니까?!!"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한지 장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오적상을 돌아 보았다. 오적상이 눈살을 찌푸리며 장호에게 고갯짓을 했다.
"다시 한 번...."
그 때였다. 오적상이 장호에게 다시 불러보라는 말을 하던 중에 느닷없이 마차 안에서 젊은 여인의 떨리는 말이 흘러나왔다.
"없어...요."
휘의 눈이 반짝였다. 그 때 또다시 여인의 말이 들렸다.
"생기가.... 없어요..."
문득 휘는 조금 전에 들었던 묘한 기분이 뭣 때문이었는지 생각이 났다. 빈집.
'장원 안에 인기척이 없다.'
옆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초형, 풍형. 마차를 잘 지키십시오."
"엇? 형님?"
미처 초평우가 물을 사이도 없이 휘의 신형이 삼장을 날아가더니 유현명의 옆에 내려섰다. 유현명이 휘를 돌아본다. 그도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은 듯했다.
휘가 말했다.
"장원 안에... 사람이 없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유현명의 눈이 굳어졌다. 급히 장원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그의 입에서 지금까지 보아 온 것과는 다른 위엄있는 명령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