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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쓰는 밸런스 파괴범이 되었다-11화 (12/36)

제 11화 대련(1)

내 초상능력을 말해달라는 태산호 교관의 요청은 당혹스러웠다.

핵을 가지고 게임 속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꼭 말해야 합니까?"

교관의 심기를 자극할 법한 무례한 대답에 교실 전체의 관심이 내게 쏟아졌다.

생도들은 어이없다는 듯 나와 태산호 교관을 번갈아 쳐다보며 눈치를 보기 바빴다.

하지만 그는 되려 호탕한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하하하! 올바른 자세다. 본 교관이 묻는다고 타인의 시선 앞에서 스스로의 능력을 밝히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지."

국제 영웅 아카데미는 주기적으로 대련을 통해 생도들의 성적을 채점했다.

각자 순위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이들로 하여금 상대를 붙이기 때문에, 학기 첫 날에 행하는 배치고사는 그 의미가 컸다.

배치고사 이후 순위를 올리려면 몇 배로 고생을 해야하는 구조였으니.

그래서 생도들은 하나같이 이 날을 위해 칼을 갈고 나왔다.

게다가 1학년들은 고학년들과는 다르게 서로에 대한 정보가 사실상 전무한 상태.

클라디스나 올리비아 같은 유명인들이야 대략적인 능력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지만, 나머지는 아니었다.

전체 수석으로 입학한 나에 대한 정보 역시 아직까지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 능력을 공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무작정 자신의 능력을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마라. 방금 보였던 그레이 생도의 태도가 알맞은 거다."

"하지만 교관님, 영웅은 의무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시민들에게 알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럴 리가 있나.

초능력 공개여부는 철저히 개인의 선택이었다.

특히나 현역 영웅들에게 있어 빌런들에게 정보가 새어나간다면 치명적이었다.

이미 알려진 유명 영웅들은 어쩔 수 없지만, 갓 데뷔한 새내기들에게는 비장의 한 수가 될 수도 있으니까.

새삼 게임의 설정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똑똑히 들어라. 그런 가짜 소식의 출처는 주로 언론가 찌라시들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편하게 정보를 얻고 싶으니 그런 말을 퍼트리겠지."

"예, 교관님."

"영웅들의 능력은 오직 하나로 한정되어있다. 드물게 2차 각성을 하는 경우도 있다지만, 극소수에 불과하다.  우리 입장에서는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과연, 아카데미 제일의 교관이란 이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깜빡하고 사소하게 넘어갈 수도 있을 법한 문제지만 실은 중요한 조언이었다.

김호락은 여전히 입을 벌린 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하지만··· 교관님, 이시아 영웅님이나 S급 빌런 '차르봄버' 같은 경우 이미 능력이 널리 알려져있지 않습니까? 어차피 활동하다 보면-"

"아니, 핵심을 파악하지 못했군."

"예···?"

"S등급의 강자들과 너희들을 비교하지 마라. 그들은 능력을 파악하고 있다 해도 동급의 실력자들이 아니면 상대할 수 없는 자들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닌, 살아 남은 자가 진정으로 강한 법이다.

죽고 죽이는 일이 빈번이 일어나는 영웅 사회에서 유명 인사로 자리잡았다는 뜻은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었다.

'태산호 교관은 그 정도는 되야 능력의 공개 유무가 별 상관이 없을 거라고 말하는 거겠지.'

"김호락 생도, 당장 오늘 있을 대련을 생각해보도록. 만약 상대에게 네 능력에 관한 정보가 있다면 그에 맞는 공략법을 준비해 올 텐데, 괜찮겠나?"

"아, 아닙니다."

"그에 반해 네게는 그 어떤 정보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넌 상당히 불리한 위치에서 싸우는 셈이다. 뭐, 그런 정보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놈들이 있긴 하겠지만···."

왜 하필이면 그런 말을 하면서 내 쪽을 흘깃 바라보는 건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태선호 교관의 눈빛은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이제 슬슬 시간이 됐군. 자, 다들 대련장으로 이동한다!"

* * *

대련이라 함은 무력을 사용하여 서로를 제압하기 위한 모의전투다.

경쟁심이 불타올라 투쟁심이 필요 이상으로 과열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서로의 실력을 교류하는 목적이었다.

물론 엄연한 교육 기관이기에 당연한 점이었지만, 내게 있어서는 되려 불리한 조건이었다.

난 적당히 제압하는 데에는 자신이 없었으니까.

핵 파일, 뉴클리어 런쳐는 제약이 없다면 단신으로 네임드 보스마저 잡아죽일 수 있는 파괴력을 자랑했다.

S급 빌런 연합이나 하물며 '왕'급 빌런조차 상회하는 힘을 생도에게 함부로 썼다간 시체도 찾기 힘들 것이었다.

'대충 기권해야 하나···?'

그럴 수 있다면 제일 편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일정 순위권을 유지하지 않으면 다가올 에피소드에 참여할 수 없었다.

만약 기권해서 B반으로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주조연들과의 연결고리가 약해질 테니.

"자, 지금부터 호명되는 두 사람은 대련장 위로 올라와서 마주보도록. 올리비아 그란데, 그리고 김호락!"

이름을 불린 두 사람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곧장 대련장으로 걸어올라갔다.

겉으로 보기에도 훤히 드러나는 둘의 자신감.

황금 세대에서도 클라디스 다음가는 천재이자 현자의 대제자인 올리비아는 이미 1학년의 레벨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김호락 역시 만만치 않았다.

중등부에서부터 주목을 받으며 당당히 입학 순위 5위를 차지한 걸출한 인재였다.

'하지만 상성이 나쁘다.'

김호락의 각성 능력은 흔하디 흔한 거대화.

얼핏 보기에는 단순하지만 그는 드물게 발현되는 2차 각성자였다.

거대화에 그치지 않고 신체 경화를 통하여 속도와 파괴력, 그리고 내구도까지 삼박자로 모두 갖추었기에 후반에도 든든한 탱커로서 활약했다.

하지만 올리비아의 각성 능력은 더욱 특별했다.

4원소 계열의 각성.

2차 각성도 아닌 주제에 물, 불, 흙, 공기를 모조리 다룰 수 있었다.

S급 영웅인 현자조차 그녀의 재능을 보고 경악했다고 했었나.

"자, 시작!"

태산호 교관의 외침이 떨어지자마자 김호락의 육체가 지면에서 튕기듯이 솟구쳤다.

마력을 끌어올려 온몸을 금속의 갑옷으로 감싼 김호락이 올리비아의 안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여유를 부릴 뿐이었다.

그녀는 김호락의 주먹이 닿기 전 바람을 일으켜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이윽고 그녀의 손에서 휘몰아치는 돌풍.

매서운 바람의 칼날이 김호락의 전신을 유린했다.

그는 올리비아를 땅으로 끌어내리기 위해 공중으로 몸을 박찼지만, 피할 틈도 없이 날아오는 불덩이를 막느라 급급했다.

"올리비아를 상대로 선공을 하다니 멍청하네."

내가 나지막히 읊조리자 옆에 서 있던 태산호 교관이 귀를 쫑긋거렸다.

"오호, 그레이 생도. 왜 그렇게 생각하지?"

"올리비아는 4원소 계열의 힘을 모두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중 불은 몸을 금속으로 감싸는 김호락에게 있어 약점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김호락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근접전을 유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올리비아가 바람의 힘으로 민첩성을 대폭 증강시킨다면 둘의 거리가 좁혀지긴 힘들 겁니다."

그 말에 태산호 교관의 표정에 흥미가 깃들었다.

어느새 모여든 다른 생도들도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련의 양상이 어떻게 될 것 같나?"

"김호락이 전략을 바꾸지 않고 돌격을 남발한다면 제 풀에 지쳐 쓰러질 겁니다."

"과연···."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미츠키는 은근히 날이 선 말투로 반박해왔다.

"그렇다면 저 멀티 캐스터를 상대로 샌드백이라도 되야 한다는 거야? 그 편이 오히려 불리할 텐데."

흠, 후에 '영리한 사냥꾼'이라는 칭호가 붙여질 미츠키가 저런 말을 하다니 꽤나 의외였다.

아직 스토리의 초반부다 보니 성장이 한참 멀어서 그런가.

"올리비아의 멀티 캐스팅에는 큰 약점이 있다. 그 점을 공략한다면 중요한 순간에 단 한번의 기회로 승부를 뒤집는 게 가능하겠지."

"뭐? 그게 무슨···."

"볼 것도 없이 이미 승부는 갈렸어."

어디 한 번 보자는 식으로 눈을 돌리자 그녀의 시야에 헐떡거리는 김호락이 들어왔다.

온갖 속성의 공격을 받은 듯 그의 철갑은 곳곳이 깨져있었고, 김호락의 눈은 풀리기 직전이었다.

올리비아는 그에 반해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하고 손부채로 더위를 달래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미츠키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입학 시험 순위 3위와 5위의 차이가 저렇게 클 거라곤 다른 생도들도 몰랐을 테니까.

클라디스만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까닥거리고 있었다.

- 쿵.

이윽고 김호락의 육중한 몸체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만! 김호락은 회복실로 옮기고, 올리비아는 내려오도록."

무표정으로 이쪽으로 다가오는 올리비아가 내 눈을 슬쩍 바라보더니 눈웃음 지었다.

친분이 없는 이에겐 그 어떤 관심도 주지 않는 그녀의 성격상 꽤나 의외였다.

"아까 당신이 했던 말, 슬쩍 엿들었어요. 흥미롭던데요?"

설마 대련 중에 내 설명을 들을 줄이야.

'어지간히 차이가 났나 보네.'

원래 김호락의 실력은 저 정도가 아니었다.

일단 무지성 돌격을 시전하는 골 때리는 습관 때문에 다 말아먹어 버렸지만.

차분히 전략을 세우고 체력을 아끼며 피해를 최소화하는 운영법을 사용했다면 그 결과는 전혀 달랐을 터다.

"다음 두 사람 올라오도록!"

연이어 올라와 실력을 겨루는 생도들.

다 고만고만한 녀석들이었기에 인상적인 장면들은 없았다.

대충 싸우고 있는 생도들의 능력들을 눈에 새기던 중, 내 차례가 다가왔다.

"다음은 그레이 생도! 올라오도록."

드디어 내 차례인가.

대련장으로 향하며 어떤 핵을 써야 최대한 안 죽이고 끝낼 수 있을까 고심했지만, 주변을 둘러보자 이상한 위화감이 엄습했다.

'그러고보니 교관은 왜 내 이름 하나만 불렀지?'

설마 태산호 교관이랑 붙는 건 아니겠지?

그럴 수는 없다며 일말의 희망을 품었지만, 그 믿음은 산산히 깨졌다.

내 상대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자신의 발걸음을 떼는 태산호 교관.

그는 나를 따라 대련장으로 올라선 뒤 내 눈을 마주보며 섰다.

"스스로가 특별 케이스인 건 잘 알고 있겠지, 그레이 생도. 그리하여 본 교관이 직접 너의 대련 상대가 될 생각이다."

··· 젠장할.

속 깊이 우러져나온 한숨이 절로 터져나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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