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화 첫 번째 에피소드(1)
"···마도왕께서 사망하셨다니."
건조한 기계음의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은 적막을 깨고서 울려퍼졌다.
전신을 새까만 로브로 도배하고 있는 남자는 천천히 의자를 뒤로 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마찰음에 양옆에 시립해있던 두 명은 잘게 몸을 떨었다.
몇 년 동안이나 모셨던 자신들이 보스가 드물게도 몹시 분노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로브의 남자가 허공을 응시하는 틈을 타 바닥에 종이 뭉치로 슬그머니 시선을 던졌다.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사건이 기록된 신문은 갈갈이 찢어져 있었다.
- 마도왕 사망하다! 그 대망의 주인공은 정체 모를 소년?
'제발 보스께서 화를 가라앉히시길······.'
하지만 그들의 우려는 안중에도 없는 듯, 남자의 전화기 넘어 들려오는 말소리는 그의 성질을 자극했다.
"꺄하하! 마도왕이 왕들 중에서 제일 약하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설마 족보도 없는 놈의 손에 죽을 줄이야."
"···이 개자식이. 한 번만 더 지껄여봐라."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는가 보네. 니네 그 잘나신 주인님은 이미 저 세상으로 가셨다니까? 이제 그 싸가지 밥 말아쳐먹은 성격은 고쳐야하지 않을까?"
- 쾅!
간신히 진정시키던 남자의 마력이 한순간의 노기로 인해 강렬하게 분출되었다.
책상 위에서 떨리는 두 주먹은 고성능 모터를 연상케할 정도로 덜덜거리고 있었다.
"감히··· 마도왕님을 욕보여···?"
그의 부하들은 이미 마력에 짓눌려 입가에서 침을 흘려대고 있었지만, 전화기의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디.
"이미 죽은 자한테 왕은 개뿔. 아니면 설마 네 기분까지 고려해서 말을 내뱉어야 한다는 거니?"
"일전에는 그분께 찍소리도 못하던 년이 감히···!"
"그러게. 내가 뭐라고 그리 쫄았었는지, 참. 혹시 마도왕이 아니라 거품왕이었던 거 아냐?"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심정으로 누런 이빨을 드러낸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마냥 붉은 선혈이 턱을 타고 내려갔다.
"후, 후우···. 아무튼 간에 약속은 지키겠지? 네년의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이미 대금을 지불했으니 말이다."
"아~ 그거?"
"그래, 설마 이제와서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말을 바꾸는 건 아니겠지?"
"푸훕!"
- 아하하하!
듣기만 해도 속을 뒤집는 웃음소리가 또다시 터져나왔다.
남자는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지금 장난할 기분이 아니-"
"야, 이 병신아."
"···뭐?"
스스로의 귀를 의심할 여지조차 주지 않고, 화면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의 인내심을 연신 후벼팠다.
"내가 마도왕 때문에 날린 돈이 얼만데 그 부탁을 들어주겠니?"
"부탁은 무슨! 대금을 지불한 이상 이건 엄연한 의뢰잖나!"
"그러게 진작 이 몸을 정중하게 대했어야지."
쿠구구, 숨길 기색도 없이 그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마력이 방 전체를 장악했다.
주인의 심기를 대변하듯 뿜어진 녹색의 마력이 사나운 기세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칼리스토 시르나, 네년이 감히···!!"
베테랑 영웅이라도 맥을 못 출 만큼 흉흉한 살기였지만, 상대방은 같잖다는 듯 빈정거렸다.
"아직도 그 싸가지가 고쳐지지 않은 모양이네. 너, 다음에 나랑 마주치면 진짜 뒤지는 거야, 알았지?"
더 이상 할 말 따윈 없었는지 수신호가 끊겼다.
남자는 터져 나올 듯한 감정을 눌러내리느라 안간힘을 썼다.
"으아아아아-!!"
오랫 동안 모셔왔던 주인의 사망과 협력자의 배신.
어두운 실내에는 평소 냉철한 상황 판단력으로 신임 받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잔뜩 열 받은 짐승 한 마리만이 도사리고 있었다.
"데이르, 그리고 클로자! 조직원들을 집결시키고 계획을 앞당겨라, 어서!!"
그의 이글거리는 눈빛은 시간이 지나더라도 식을 줄 몰랐다.
방 안을 가득 채운 녹색의 마력은 지독한 독기를 풍기고 있었다.
지독한 독으로 수많은 영웅들을 침묵시킨 맹독마.
A급 빌런, 퍼시발 렌토가 예정과는 달리 한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저는 청천 길드의 길드장, 이시아라고 한답니다."
여러 인사들이 참석한 특별 입학 시험에서 '제우스의 철퇴'를 사용했으니, 곳곳에서 미리 접촉을 해올 것임은 알고 있었다.
본래 졸업예정자들인 3학년 제외한 1, 2학년들에게는 스카우터의 접속이 허용되지 않았으나, 그녀는 이시아였다.
한국의 영웅계를 이끄는 거물에게 불만을 제기할 이들은 적어도 국내에는 없었다.
"반갑습니다, 이시아 길드장님. 국제 영웅 아카데미 1학년에 재학중인 그레이입니다."
"어머, 고작 그렇게 불러도 만족하나 봐요?"
무슨 말이지?
뜬금없는 말이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상관않고 말을 이었다.
"마도왕을 제 손으로 죽인 신성께서 예상 외로 꽤 겸손하시네요."
"···최근 뉴스들을 읽으셨나 봅니다. 다들 합성이니 뭐니 하면서 믿지는 않았지만요."
"다행히도 저는 두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있어서요. 기억 안나요? 그때 입학 시험."
'그 자리에 이시아가 있었다고?'
태양 길드의 부길드장이나 정부 측 고위 인사들은 한 눈에 알아봤지만, 이시아의 모습은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뭇 보기만 해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미인의 존재감이 그 정도로 약할 리가 없었다.
"그때는 얼굴을 숨기고 있었어요. 괜히 귀찮게 말들 걸어오면 피곤할테니까."
"아, 그러셨군요···."
잠시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그녀의 성격을 떠올려보면 자연스러웠다.
한국을 대표하는 거대 길드의 수장답지 않게 공식석상에 나서는 일을 귀찮아하는 타입이니까.
한차례 가벼운 인삿말을 주고받은 후, 그녀가 제안 하나를 내게 건넸다.
"역시 그레이 군과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얘기가 잘 통하네요. 진솔하게 나누고자 하는 안건이 있어서 그런데, 궁금하지 않나요?"
음···? 이 대사, 설마······.
엄습하는 불안감을 무시하고 침묵을 택하자, 이시아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내가 아닌, 다른 이에게 했었어야 하는 대사를.
"생각이 있으시면 이번 주말에 청천 길드 사옥에 방문해 주세요. 차편은 이쪽에서 보내드릴테니."
예기치 못한 돌발상황에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난잡하게 헤엄쳤다.
그러나 이 제안은 결코 거절할 수는 없었다.
만약 거절한다면 스토리의 진행이 이루어지지 않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제안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통화가 종료되자, 밀려드는 막막함에 괜히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이시아가 방금 내뱉은 대사는 게임의 첫 에피소드를 여는 시작점이었다.
원래는 입학 시험에서 주인공을 본 그녀가 단순한 흥미로 접근하는 걸 시작으로 스토리가 전개되는 설정.
허나 달라진 점이 한 두개가 아니었다.
'우선, 그녀의 말투부터가 달라.'
나이가 지긋한 협회장에게도 아랑곳하지 않고 반말을 쓰는 성격.
좋게 말하면 자신감 넘치고, 나쁘게 말하면 차갑거나 오만하다.
S급 영웅 중에서도 궤를 달리하는 강함을 지녔기에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지만.
문제는 왜 나한테 평소와는 다르게 존댓말을 사용하느냐, 인데.
'입학 시험에서 내려친 번개를 봤다고 했었나.'
마도왕을 죽일 때 사용한 일격이었으니, 내가 마도왕을 죽였다는 소문을 진실이라 확신한 듯했다.
설마 자신보다 윗줄의 강자라 생각하고 예우를 차린 거라면 심히 곤란했다.
그렇게 된다면 그녀가 제시할 제안의 내용 자체가 달라질 수도 있었으니까.
힘이 빠진 채 자리로 돌아오자, 앉아있던 4명이 나를 둘러싸고 질문을 퍼부어댔다.
"뭐, 뭐야. 그레이 너, 이시아 길드장님이랑 무슨 관계야?"
"조기 스카우트 제의라도 받은 거야?"
"하하! 1, 2학년은 원래 스카우트 제안 금지인 거 몰라?"
"이시아 길드장 정도라면 그런 규칙 정도는 상관쓰지 않는답니다."
저녁 시간에 통화를 건네온 상대가 이시아라는 것에 다들 벙쪄 보였지만, 채선아는 사뭇 안달이 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집안에 소속된 대한 길드와 청천 길드는 경쟁 관계이다 보니 조바심이 인 듯했다.
"별 말 없었어. 그냥 주말에 한 번 방문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시더라고."
별 거 없는 대답이었는지 의심하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채선아는 혼자서 안심한 듯 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다들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김호락이 야간 운동을 빼먹을 생각이냐며 당장 헬스장으로 달려가자고 소리치는 헤프닝이 있었지만, 올리비아가 나서자 제압당했다.
난 혼자 바깥에 남아 찬 공기를 음미했다.
이토록 생각이 복잡할 때는 술 한잔이 절실했지만, 오렌지 주스로 달랠 수 밖에 없었다.
"심란하네···."
나비 효과 정도야 당연히 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피소드 하나의 시작이 통째로 꼬여버릴 줄은 단연코 몰랐다.
만약 내가 주인공과 그 주변인들에게 갈 기회를 의도치 않게 뺏어버린다면 베드 엔딩 확정이었다.
빌어먹을 마력도 다루지 못하는데다가, 핵을 제외하면 아무런 재능도 없으니까.
고심에 빠져 머리를 감싸고 있던 중, 의외의 인물이 다가왔다.
적어도 당분간은 얼굴도 비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그레이라고 했지."
싸늘한 평소 얼굴과는 다른, 주체하지 못하고 흐르는 눈물에 의해 상기된 볼.
"날 도와준다는 생각··· 아직도 그대로야?"
미츠키 히메노가 떨리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