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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쓰는 밸런스 파괴범이 되었다-21화 (22/36)

제 21화 설계

손끝에서부터 느껴지는 뇌전의 기운이 드높은 하늘까지 뻗어 나갔다.

거대한 기세로 꿈틀거리는 번개가 내 의지에 반응하고 있었다.

"내리쳐라."

【'제우스의 철퇴'를 발동합니다.】

수백 갈래의 전류가 새하얀 구름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치 생명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듯한 번개의 창이 생성의 여파만으로 박물관의 천장을 분쇄시켰다.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초자연적인 모습에 퍼시발 렌토는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 어어···?"

혼신의 힘을 쥐어짜네서 겨우 밖으로 내뱉은 한마디.

그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 꽈르르르릉!

문자 그대로 하늘을 찢어 버리는 어마어마한 굉음.

구름에서부터 강림한 황금의 거창이 압도적인 스파크를 내뿜으며 쏘아졌다.

건물 외벽에서 고전하던 영웅들과 A급 마수들마저 그 일격에 휘말렸다.

"뭐, 뭐야? 대체 무슨 일이야?"

"2팀장님! A급 마수들이 급격히 약화되었습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다행히도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것은 외벽에 바짝 붙어 영웅들의 접근을 견제하던 마수들 뿐이었다.

'제우스의 철퇴'로부터 비롯된 전류가 가시자 난 박물관의 상태를 살폈다.

하지만 이미 이곳은 박물관이 아닌, '박물관이 있었던 곳'으로 변모해버린 상태였다.

형태도 없이 날아가 버린 건물 중앙에는 깊은 공터 하나만이 자리 잡고 있었을 뿐.

살포시 흩날리는 흙먼지들이 남아 있는 전부였다.

퍼시발 렌토의 사체는 뼛가루 한 줌조차 찾을 수 없었다.

'만독불침의 지속시간이 다 끝나가서 급하게 죽이긴 했는데···.'

폐허가 되어 버린 주변을 둘러보자 그제서야 무슨 짓을 벌였는지 깨달았다.

일개 생도의 신분으로 왕급에 필적하는, 아니 어쩌면 넘어설 수도 있는 무력을 행사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때 멋 모르고 마도왕을 죽인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필요 이상으로 주목을 받는다면 오히려 스토리 진행이 꼬여 버릴 테니까.

지금까지 받은 것만으로 해도 이미 충분히 차고 넘쳤다.

마도왕 살해에, 입학 시험에서는 비록 가상이라 해도 S급 마수를 쓰러뜨렸다.

절대 일개 생도가 보일 만한 행보는 아니었다.

대형 길드나 기업의 고위 인사들의 정보 라인에는 몰라도 더 이상 언론에 내 이야기가 퍼지는 건 사양이다.

나는 급히 휴대폰을 들어 이시아의 번호를 찾았다.

기록된 연락처가 몇 없어 최신 순으로 정렬한 스크롤을 최하단으로 쭉 내리자,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예상보다 길게 울리는 신호음.

설마 A급 마수들의 토벌이 아직인가 싶었지만, 한순간 울리는 연결음에 졸였던 마음을 풀었다.

"여보세요? 이시아 길드장님, 저 그레이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급히 도움을···"

"이런 미친! 그레이 당신!"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S급 영웅의 고성에 눈이 질끈 감겼다.

하지만 그녀의 잔뜩 상기된 목소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방금 그 번개! 확인차로 물어보는 건데, 당신이 한 거예요?"

"그··· 렇죠?"

"급한 마음은 이해하지만 너무 무턱대고 일을 벌린 거 아니에요? 지금 완전 난리가 났어요!!"

그야 그렇겠지.

열심히 싸우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재앙이 내리꽂힌 셈이니까.

"최악의 상황은 아니에요. 그 번개로 인한 인명 피해는 하나도 없으니까. 문제는 장비나 차량들이겠지만요."

'뭐라고···?'

인명 피해가 없는 건 나 또한 분명 확인했다.

그러나 긴급 출동한 기타 지원들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특히나 고압성 전류에 취약한 장비들 같은 경우에는 수리 가능 여부마저 불분명할지 몰랐다.

"대량 피해 금액이 어느 정도죠?"

"네? 갑자기 피해 금액을 물어보다뇨··· 음, 아마 100억 원 가까이 되지 않겠어요?"

100억이라니, 그 정도 액수는 현재로서는 마련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쯧, 의외의 복병이네···"

"그레이 군? 지금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피해 금액을 왜 그레이 군이 걱정해요?"

"네?"

나는 이시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당체 이해할 수 없었다.

난리가 났다면서 100억 원치 자원이 내 번개 때문에 증발했다면서 왜 돈걱정을 하냐니?

"잘 들으세요, 그레인 군. 방금 그 하늘에서 떨어진 일격 때문에 사방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고요!"

"그거야··· 그렇겠죠?"

"하아··· 아직 이해가 안되었나 보네요. 상황이 끝나자마자 저한테 전화를 건 이유가 뭐죠?"

"뒤처리를 좀 해주실 수 있나 해서요. 아무래도 매스컴을 타는 건 부담스러워서요."

"그게 문제라고요! 당신은 방금 전세계가 지켜보는 앞에서 개인의 힘으로 자연재해를 보인 거라고요!"

그런 의미였나.

드디어 이시아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나와 계약을 맺은 그녀에겐 큰 골칫거리로 작용할 수 있겠지만 내게는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지금은' 아니다.

이미 그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을 생각해 두었으니까.

* * *

특별 입학 시험이 끝난 당일날.

엘게나 학장과의 면담을 마치고 박태호 협회장과 마주 앉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제는 그레이 생도님이라고 불러야겠군요."

협회장이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띄우며 차를 권했다.

"헌데··· 이번에 보여주셨던 그 번개 말입니다. 파장이 너무 큽니다. 대형 길드 쪽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요."

"협회에서 어떻게 통제할 수 없겠습니까?"

"단순히 하나라면 모를까,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인원이 보통이 아닌 이들이라···."

흐음.

난 침음을 흘리며 협회장이 건낸 차를 홀짝였다.

'하필이면 빙의되자마자 재수 없게 마도왕을 만나서 이 꼴이 났네. 뒷생각은 일절 없이 너무 저질러 버렸어.'

초반부는 시작도 채 하지 않은 현 상황에서 쓸데없는 세력이나 정치 싸움에 휘말려들 생각은 없었다.

난이도를 상승시키는 또 다른 요소였으니.

나중에는 결국 발을 담가야 하겠지만, 그것도 메인 캐릭터들의 성장치를 일정 이상으로 끌어올린 후였다.

게다가 게임에서 등장하는 거대 빌런 집단이나 흑막 세력에게 찍힌다면 절대 살아남지 못한다.

난 게임에서 플레이했던 주인공과는 전혀 다르다.

마력도 쓰지 못하고 특출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물며 주인공으로 플레이할 때도 단순 컨트롤로는 클리어가 불가능해 핵을 쓰다가 걸려서 영구 정지를 당했었는데.

'정황상, 핵에 걸린 저주의 해주는 일단 내 능력 밖이라고 봐야 해. 그 대신 아티팩트나 장비를 끌어모은다.'

그러기 위해선 시간을 벌어야 했다.

전면에 나서도 밀리지 않을 정도의 무력을 보유해야 했으니까.

적어도 그때까지는, 난 그레이가 아닌 다른 신분으로 활동할 것이다.

"협회장님."

"네, 말씀하시죠."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부탁은 '이지스 넘버'에 준하는 보안 등급을 유지해 주십시오."

이니셜 넘버의 언급에 협회장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들썩, 거리며 위아래로 흔들리는 움직임에서 그의 당황감이 읽혀졌다.

"이지스 넘버라니,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시려는 겁니까?"

이지스 넘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의 핵심 정보부들에서 지정한 세계 최고 수준의 공개 임무들.

임무의 개수는 총 13개로 No.1 부터 No.13까지 있었으나, 다만 그중 상위 숫자 5개는 철저한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즉, 이지스 넘버에 준하는 보안 등급이라는 의미는 국가 단위의 비밀과 맞먹는다는 뜻이었다.

박태호 협회장이 협력자로서 동조하지 않는다면 꿈도 못 꿀 계획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능은 하겠지만, 저 혼자 힘으로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군요. 적어도 비슷한 수준의 지원군이 한 명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말끝을 흐림과 동시에 '그 지원군이 청천의 이시아 길드장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는데···' 라며 조용히 중얼거리는 박태호 협회장.

난 고심에 잠신 그를 내버려 두고 즉석에서 계획의 틀을 그려 냈다.

바로 아카데미 밖에서 활동할 때 쓰일 새로운 신분을 전면으로 내세우는 것.

'언노운'.

그레이에 이은, 이 세계에서의 내 두 번째 이름이었다.

* * *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차분함을 잃지 않고 이시아에게 계획에 대해 읊어 주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군요. 내가 먼저 접근한 모양새지만, 결국 난 당신들의 미끼에 걸려 버린 거네요?"

흠잡을 데 없는 정확한 비유였다.

내가 특별 입학 시험에서 지나칠 정도로 핵의 위력을 과시한 이유는 2가지.

첫 번째는 협회장 빽에 기대서 특별 전형으로 입학하고자 하는 정도의 실력을 보인다면 엘게나 학장이 내 입학을 반려할 것이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내게 접근해 올 거물을 낚아올리기 위해서였다.

설마 그 인물이 한국 최고의 길드의 수장 이시아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하지만 되려 어이가 없네요. 분명 그레이 군은 놓치기 싫은 매력적인 인재이긴 하나, 방금 말한 건은 잘못한다면 길드의 존재 자체가 위태로울 수 있어요. 모르진 않을 텐데요?"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지녔다면 당연히 나올 법한 소리였다.

내가 대적하고자 하는 상대는 비단 빌런이나 마수들 뿐만이 아니었다.

부패하고 썩어 버린 높으신 분들, 그리고 중요 세력에 심심찮게 잠입해 있는 흑막의 졸개들까지.

법을 넘나드는 다크히어로 쯤은 되어야 했으니까.

그러나 난 이시아를 무조건적으로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주연급 비중을 가진 그녀가 품고 있는 비밀.

"글쎄요, 제 제안을 들어 보신다면 또 다르실 텐데요."

"재미있네요. 어디 한 번 들어나 보죠."

"당신이 S급 마수 케르베로스를 토벌하려는 이유."

"네? 갑자기 무슨···?"

"이지스 No.4."

우뚝.

바삐 움직이며 전화를 받던 이시아의 숨소리가 거칠게 끊겼다.

통화음의 불량 따위가 아니었다.

순간적인 당혹감에 의해 뇌라도 정지된 듯, 휴대폰 너머로 작은 잡음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 반응에 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제대로 걸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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