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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쓰는 밸런스 파괴범이 되었다-22화 (23/36)

제 22화 숨겨진 진실

이시아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수행원을 보낼 테니 다시 만나자'라는 말을 남기며.

잠시 뒤, 진하게 염색한 갈색 머릿칼을 휘날리는 정장 차림의 여성 하나가 내게 뛰어왔다.

"안녕하십니까, 그레이 생도님. 청천 길드 소속 제니퍼라고 합니다. 길드장님께 모시겠습니다."

"네. 그런데 혹시 현장 뒷처리는 어떻게 되었죠?"

"우려하실 부분은 없으실 거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한 치의 막힘도 없는 기계적인 어조.

첫인상에서부터 프로의 향기가 늘씬 풍기는 인재였다.

"지근거리에 차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이쪽으로."

등을 돌린 그녀가 입가에 마이크를 가져다 대고 기사를 호출했다.

'이시아 길드장이 작정하고 개입했나 보군.'

내가 가진 패 중 하나를 과감히 꺼낼 때, 걱정이 앞섰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만큼 이지스 No.4는 초고위험 등급의 임무였으니까.

이렇게 일찍 이시아와 깊게 엮일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퍼니발 렌토라는 변수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박물관 테러가 기존보다 일찍 발생할 거라곤 알고 있었지만···.'

마도왕의 죽음에 대한 나비효과라고 생각하며 그에 대한 준비를 앞당기려 했지만, 내 예상 범위를 훌쩍 앞서는 시기였다.

설마 학기 첫 실습 훈련도 건너뛰고 유물들부터 노릴 줄이야.

'아무리 퍼시발 렌토가 강하다고 해도, 이번 테러는 A급 빌런 따위가 단독으로 벌일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어.'

원작에서야 당연히 뒤에 마도왕이 있었지만, 그는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A급 마수 3마리를 동원한 채 테러를 가했다.

즉, 한 마리 당 S급 영웅과 맞먹는다는 괴물들을 제어할 수 있었던 뒷배경을 밝혀내야 한다.

"타시죠."

약한 배기음과 함께 고급 세단이 아닌, 평범한 승용차 하나가 정차했다.

꽤나 의외였다.

제니퍼라는 여자는 낮에 만났던 주영흔 과장보다 훨씬 높은 직급으로 보였으니까.

하지만 차량 내부는 완전히 별개의 공간이었다.

첩보 영화를 방불케 하는 최신 장비들과 위치 추적기, 고성능 컴퓨터들까지.

신기해하는 내 모습을 본 제니퍼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레이 생도님께서 부탁하신 사항을 긴급히 처리하던 중이었습니다. 비단 청천 길드만 관여된 사건이 아니니까요."

오늘 모였던 각 길드의 고위급 인사들.

그리고 현장에 파견된 정부와 협회측 요원들.

그들은 내 번개가 남긴 흔적에 접근하고자 했지만, 번번히 실패하고 등을 돌렸다.

괜히 국내 최고라고 불리는 게 아니듯, 청천 길드는 어김없이 그 위용을 발휘했다.

"도착했습니다."

아까 보았던 그 지하 주차장이 아닌 다른 장소였다.

휘황찬란한 대리석이 아닌 은으놘 보랏빛 광택이 펼쳐진 비밀 사옥. 뒤를 돌아보니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위치였다.

제니퍼의 안내를 따라 깊숙히 보이는 사무실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시아가 다리를 꼰 채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또 보네요, 길드장님."

"다시 보자고는 했지만··· 이런 식의 모양을 원한 건 전혀 아니었는데."

깊은 한숨이 내쉬어짐과 함께 허공에서 두 개의 시선이 부딪혔다.

아까 보았던 그녀의 친절한 눈초리와는 정반대의, 거대한 기세.

결국 시선을 먼저 내린 것은 나였다.

오늘 쓸 수 있는 핵은 전부 써버린데다 지금은 상대를 설득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패는 결국 내 손에 있고.'

이지스 No.4를 언급한 그 순간부터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었다.

"질질 끌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아까 한 말, 더 자세히 말해보시길."

이시아의 독촉에 대답 대신 제니퍼를 흘겨봤다.

중요한 대화에 외부인이 끼어도 되냐는 무언의 눈짓이었다.

"괜찮아요. 제니퍼를 포함한 특수팀은 소수 정예의 직속팀이에요."

"이지스 상위 숫자의 보안 등급은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직접 보장하죠."

망설임 없는 확답에 이 이상 화두를 미룰 순 없었다.

다만, 본격적인 핵심은 아직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이시아 길드장님. 당신은 복수를 위해서라면 어디까지 갈 수 있으십니까?"

"···복수라니, 무슨 말이죠?"

정곡을 찔린 듯, 그녀의 말투가 급격하게 사나워졌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S급 마수 케르베로스는 여타 다른 S급의 마수들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존재입니다. 사실상 퇴치 불가 판정을 받아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 아닙니까?"

"그래서요?"

"청천 길드가 대단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길드를 위해 싸워나간다는 당신의 신념을 떠올려 본다면 이해가 가질 않죠."

이시아는 대장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어도 어색함이 없었다.

가장 높은 직책에도 불구하고 전황이 불리해진다면 언제나 물러서는 대신, 앞장서서 선봉에 섰다.

강력한 무력과 뛰어난 두뇌, 그리고 궤를 달리는 추진력.

그녀는 과거 빛을 잃고 쓰러져가던 청천 길드를 일으켜 세운 장본인이었다.

부모님의 손에 세워진 청천 길드가 다시는 그 위엄을 빼앗기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라는 세간의 인식에 다들 속아 넘어간 거지.'

"하지만 길드장님께 있어서 길드의 안위는 잘해야 두 번째 아니십니까?"

이시아의 표정에서 경악이 묻어나왔다.

철벽보다 굳건히 유지하던 이미지가 완전히 들통난 꼴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그녀는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예상치 못한 발언이기는 하나, 제가 당신의 미친 짓거리를 도와야 하는 이유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군요."

게임 후반부로 갈수록 내 뒷처리는 점점 그 스케일이 커질 것이었다.

자연스레 그 점을 알아챈 이시아는 절대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난 하는 수 없이 키워드 하나를 내뱉었다.

"부모님의 원수."

- 덜컹!

내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이시아가 마력을 일으켰고, 제니퍼 또한 품속에서 대형 권총을 꺼내들었다.

S급 영웅과 A급에 필적하는 듯 보이는 제니퍼의 기세에 오장육부가 진동하는 기분이었다.

'여기서 밀리면 안된다. 아직 본게임은 시작도 안했으니까.'

나는 자세를 다잡는데 집중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며 허리를 곧게 펴 앉았다.

쉽진 않았지만, 간신히 힘겨워하는 모양새를 숨기며 허세를 뽐냈다.

"실망입니다. 이시아 길드장님이라면 저에 대해 조금은 파악하고 계실 거라 생각했거든요."

"당신···."

"이곳을 번개밭으로 만들어 드리고 싶은 마음은 저 또한 없습니다. 그러니 앉아주시죠?"

당장이라도 목이 베일 듯한 살기에 팔이 주체하지 못하고 떨려왔다.

무겁게 내려앉은 기세가 주변 공간을 찌그러뜨릴 기세로 나를 짓눌렀다.

"당신··· 대체 뭐야. 정체가 뭐길레 이런···!"

"서로 도움을 주고, 또한 받고자 하는 관계를 맺고 싶을 뿐입니다. 저희는 서로의 결점을 채워줄 수 있을 테니."

이시아가 부모님의 죽음 이후 원해온 오직 하나, 두 분의 복수였다.

A급 영웅이었던 그들은 이시아가 아카데미에 재학하던 시절, 임무 도중의 사고에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진실은 빌런 집단의 뒤를 캐던 중 꼬리를 잡혀 살해당한 것이었다.

그들의 몸에는 깊게 새겨진 길다란 상흔은 그때부터 이시아의 분노에 장작을 지폈다.

문제는··· 그녀가 완전히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부모님의 원수로 짐작하는 인물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허. 한 번 말해봐요."

"아뇨. 범인은 '기사왕'이 아닙니다."

기사왕 아서 밴플렉.

세상에 존재하는 5개의 권좌 중 일각을 차지한 인류제일의 검사.

영웅과 빌런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철저한 중립이었지만, 무위로만 보았을 때에는 비할 자가 없었다.

최후반부 주인공조차 순수한 기술로는 기사왕의 한 수 밑이었다.

"······"

내 한마디에 그녀의 눈매가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오랫동안 노려왔던 목표를 부정하니, 무슨 헛소리냐는 반응이었다.

"납득하기 어렵군요. 제대로 대답하시죠."

"사별하신 두 분의 시체에 큰 검흔 하나가 남아있었을 겁니다."

"···어떻게 안 거야, 당신?"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지 않나요? 가령 그 상처가 오직 기사왕의 고유 무기만으로만 가능하다거나, 뭐 그런?"

A급 영웅 두 명이 임무 중 사고로 사망했다.

국가 차원에서도, 그리고 길드 차원에서도 큰 손실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청천 길드의 공동 설립자 중 하나.

당시에는 이렇게까지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어엿한 중견 길드의 모습은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죽음은 이상하게도 베일에 싸여 있었고, 그 진실을 아는 몇 안되는 극소수 중 하나가 외동딸이었던 이시아였다.

'그렇기에 나라는 존재가 무척이나 혼란스럽겠지.'

"하고 싶은 말이 뭔가요? 기사왕을 잡는데도 도움을 줄테니, 협조해라?"

"곤란하네요···. 헛물켜기에 도움을 주고 싶지는 않은데."

- 쾅!

내 빈정거림에 그녀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며 씩씩거렸다.

"무슨 말이지?! 그럼 기사왕이 범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건가?"

"네. 아닙니다."

"근거 하나 없이 지껄이는 낭설을 나보고 믿으라고?"

그럴 리가.

자칫하면 이시아와 완전한 적으로 갈라질 수 있음에도 자충수를 두는 이유는 확실한 증거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미세해서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절대 파헤치지 못할 지경이니.

지금 보이는 격양된 태도도 무리는 아니었다.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해 드리죠. 나머지 이야기는 그 후에 하는 걸로 하고요."

담담한 어조와 흔들리지 않는 내 눈동자를 본 이시아가 이내 자리에 앉았다.

고뇌 깊은 기색으로 나를 노려보긴 했으니, 이야기를 계속하라는 듯 테이블을 두드렸다.

···좋아.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이시아와의 협조 관계만 확실시된다면 앞으로의 계획도 순항로를 탈 테니까.

"부모님의 원수에 대한 원한이 클 테니, 조사는 분명 하나도 빠짐없이 하셨겠죠."

"검흔에 남아있던 입자 하나하나까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래픽 시물레이션을 통해서 그 입자를 검흔이 새겨진 경로 반대로 재배치 해보세요."

"뭐라고···?"

"그렇다면 기사왕의 흔적 따위는 보이지 않을 겁니다."

내 폭탄 발언에 이시아의 안색이 새까맣게 변했다. 휘둥그레 떠진 눈동자 또한 사시나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거의 넘어왔다.'

설득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자, 난 과감하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만한 한 마디를.

"검흔의 주인이자 증거를 조작한 진짜 범인은, '강철왕' 데자르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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