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핵 쓰는 밸런스 파괴범이 되었다-24화 (25/36)

제 24화 실기주간(2)

실기주간.

다른 말로는 실전 대비 훈련 기간.

갖가지 가상 마수를 상대하며 경험치를 쌓아올리고, 마지막 날에는 자력으로 하급 게이트까지 공략해야 한다.

팀으로 활동해야 하는 경우가 많지만, 채점은 개인별로 매겨지기 때문에 한 명에게 의존하다가는 큰 코 다치기 십상이었다.

기껏해야 대형 마수 정도를 처리해야 단체 점수가 지급되는 정도.

'지금부터가 중요해.'

미츠키는 검집에 넣어진 생도용 카타나를 매만지며 마력을 가다듬었다.

차기 당주로서 하사받은 일본도와는 비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기본은 갖춰진 검이었다.

'···입학 시험 성적과 대련 성적때문에 순위가 너무 떨어졌어. 어떻게든 만회를 해야하는 상황이야.'

초조함이 밀려들자 미츠키는 자연스레 쌍심지가 돋힌 눈으로 클라디스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스스로 만들어낸 열등감에 침식되기 전 가까스로 시야를 돌릴 수 있었다.

예전의 자신과는 현저히 다른 변화였다.

그 변화가 긍정적인지 아닌지는 아직 확신이 들지 않았다. 다만, 이 모든 게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레이.

얼핏 들어도 가명 같은 이름과 짙은 회색빛 머릿칼의 소유자.

굳이 미사여구를 덧붙이자면 창백한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가 강조되는 미남이라는 점이었다.

'저 남자, ···자꾸만 눈에 밟혀.'

이유는 알지 못했다.

의식하지 않으려 고개를 돌려도 결국 그에게로 시선이 고정될 뿐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를 쳐다보는 자신의 눈길에 적의가 아닌, 의문이 담기기 시작했을 때는.

클라디스에게 처참히 패배한 자신에게 처음으로 진심이 담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순간?

그것도 아니면 무례한 태도로 한차례 거절하고도 다시 찾아갔던 자신을 받아주었으니까?

미츠키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들을 무시하려 지긋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레이에게로 향하는 눈길은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굳게 다물렸던 그레이의 입술에서 가느다란 푸념이 새어나왔다.

"실기주간이라니··· 이건 또 어떻게 버티냐 진짜."

"음? 전체 수석이 실기주간을 걱정하는 거야? 너는 태산호 교관님한테도 밀리지 않았잔냐, 그레이!"

"그 말이 맞다. 쓸데없는 엄살을 받아줄 만큼 본 교관은 무르지 않아."

엄격한 태도를 고수하는 척, 툭 내던져진 교관의 농담에 경직되었던 반 분위기가 풀어졌다.

A반의 모두가 괴물같은 수석이 어울리지 않게 엄살을 피운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반면, 미츠키의 눈에는 전혀 엄살로 보이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강하지만 되려 그 누구보다 약하다.

미츠키가 판단지은 그레이에 대한 평가였다.

지난 한 달간 하루도 빠짐없이 저녁 훈련을 같이했다.

훈련실 천장에 달린 시계의 시침이 7시를 가리킬 때마다, 그는 피곤한 얼굴을 한 채 힘없이 걸어왔다.

연기라고 하기에는 진심으로 피곤해 보였다.

본인 말로는 체력이 없는 편이라며 변명했지만, 신체 능력 또한 미각성자라 착각할 정도로 허약했다.

그는 순수하게 각성 능력 하나로만 승부하는 타입이었다.

'처음 훈련을 시작했을··· 때는 정말 놀랐지.'

태산호 교관과의 대련에서 2개의 초능력을 사용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최고의 방어계 능력과 강력한 공격계 능력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단지 일부에 불과했다.

미츠키의 지배하에 있는 그림자의 세밀하 움직임을 투시하는 것도 모자라 그 감각을 공유하기까지.

그녀에게 있어 최선의 훈련 방법을 제공했다.

마치 오랜 시간 준비해왔던 사람처럼.

미츠키는 창밖을 향해 가라앉은 시선을 내던졌다.

이전과 같이 클라디스에 대한 열등감이 내면을 좀먹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더한 걱정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 '입학 시험 4위에, 배치고사 대련에서는 처참한 패배를 금치 못하다니···. 하물며 현재 학년 성적은 10위권에 겨우 머문다고 들었다.

네년이 그러고도 대 히메노 가의 당주 자리를 이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 시간부로 차기 당주 지위는 박탈되었으니, 그리 알거라!'

차기 당주 자리의 박탈.

클라디스에 대한 패배감과는 비할 수도 없는 절망이었다.

미츠키의 인생은 오직 아버지의 뒤를 이어 히메노 가의 당주 자리를 물려받기 위해 존재했다.

엄격하고 차가운 친부 아래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차기 당주 자리를 시기하는 장로들에게 견제당하는 와중에도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자신의 재능은 분명 믿어 의심치 않았다.

히메노 가 소속의 무사들과 영웅들도 어린 시절 그녀의 검에 눈길을 빼앗겨 감탄을 연발했다.

···진짜 검의 천재를 만나기 전까지는.

중등부에서 가졌던 클라디스와의 첫 만남 이후, 미츠키는 거대한 벽을 느꼈다.

그 벽이 얼마나 높고 견고한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피나는 노력을 불태웠다.

그럼에도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고, 되려 벌어졌다.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무식한 노력의 반복.

두 손에 머금어진 핏물이 바닥에 고일 때까지 빈틈 없는 자세를 유지한 채 검을 휘둘렀다.

노력으로만 승부한다면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고 자신했지만, 결과는 역효과.

국제 영웅 아카데미에 입학 후 순위는 더욱 떨어졌다.

급기야 차기 당주 자리마저 방계에게 빼앗기기 직전, 미츠키의 뇌리에 스쳐지나가는 사람은 단 한 명 뿐이었다.

패배감, 열등감, 두려움, 좌절감···.

온갖 부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에 눈물을 터트리며 그레이에게 도와달라 말을 건넸을 때는, 솔직히 말해 그 어떤 모멸감과 비웃음도 감당할 생각이었다.

혼자서는 도저히 방법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지금 당장 욕을 먹더라도 클라디스를 제치고 태산호 교관과 동수를 이뤘던 수석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어떠한 대가라도 감수하려 했다.

하지만 독기어린 각오가 무색하게,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원하냐는 따짐에 '추후에 성장한 힘으로 자신을 도와달라'는 대답을 내뱉으며.

- '나는 네 생각보다 강하지 않거든.'

첫인상과는 다른, 피곤과 두려움에 잔뜩 찌든 그의 약한 모습을 본 순간.

마음속을 둘러쌌던 성벽에 처음으로 미세한 균열이 생겨났다.

* * *

"1학년 첫 실기주간에서 너희에게 주어진 훈련은 C급 마수 사냥이다."

원작의 흐름과 같다.

훈련 정보를 숙지시켜주는 이가 태산호 교관이라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적어도 아카데미 내부에서의 스토리 진행은 내가 아는 바와 다를 바 없을 터.

1학년 생도들에게 있어 C급 마수 사냥은 버거우니, 팀 단위로 진행할 것이다.

"교, 교관님! C급 마수라니요? 현역 팀들이나 상대하는 수준 아닙니까?"

짝!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생도들의 우려에 태산호 교관이 손뼉을 쳤다.

"A반이라는 놈들이 겁부터 먹는 모습은 심히 불편하군. 너희의 상대는 진짜가 아닌 가상 마수일 뿐더러, 당연히 개인별이 아닌 팀을 이룬 협동 시험이다."

팀과 협동이라는 말에 생도들의 눈빛이 오묘하게 달라졌다.

개별 채점이 들어가긴 하지만, 팀원에 따라 희비가 엇갈릴 수밖에 없었다.

'이거··· 좀 부담스러운데.'

은근슬쩍 나를 곁눈질하는 수십 쌍의 눈동자들.

태산호 교관 또한 예상했던 눈치였는지,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팀원에 있어서 공정성은 맞춰야겠지. 현재 학년 순위 1위부터 3위까지가 그레이, 클라디스, 그리고 올리비아였나?"

"네, 맞습니다!"

"이 세 사람이 포함된 팀들은 개체 수를 3마리로 늘린다."

그 말에 기대에 가득 차 반짝거리던 눈빛들이 그림자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아무리 저 셋이 강하다 해도 3마리라면 자신들도 위험할 수 있을 테니.

"자, 그럼 팀 명단을 공개하겠다."

태산호 교관의 손짓에 따라 켜지는 화면에 생도들의 목 울대가 꿀꺽 넘어갔다.

[1팀]

김호락

엘리자베스

제임스

이서연

[2팀]

클라디스

안나

김현석

제이크

[3팀]

미츠키

그레이

프레드릭

최준혁

[4팀]

····

"오, 클라디스랑 같은 팀이야! 점수 걱정은 없겠네, 이거."

"그러면 뭐하냐. 너넨 마수 3마리 당첨인데."

"아··· 깜빡했네."

"야야, 차라리 마수 3마리가 쉽지. 우리팀은 개 망했어."

4명씩 이뤄진 5개의 팀이 스크린에 공개되었다.

반응은 제각기 다양했다.

절규하는 이들과 실룩거리는 입매를 감추지 못하는 질투유발자들.

반면, 내 팀에 소속된 이들은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프레드릭과 최준혁은 나와 미츠키 눈치만을 살피며 입을 다물고 있었고, 미츠키는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나름대로 같이 훈련하면서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인가?'

하긴, 게임에서도 워낙에 폐쇄적인 성격이었으니.

"전원 따라오도록."

태산호 교관의 안내에 따라 실기장으로 이동했다.

평상시 오가던 훈련장이나 대련장보다도 더욱 깊숙한 위치.

아카데미 본관 중심부 지근거리에 다다르자, 커다란 돔 형태 구조물의 정문이 열렸다.

- 크르르르르···.

그곳에는 뜨거운 콧김을 내뿜는 마수들이 흉측한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