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화 질척한 감정
매일 저녁 7시.
언젠가부터 내 일상이 되어 버린 특별 훈련 시간이었다.
그레이는 언제나 5분 정도 일찍 나타났지만, 나는 그 훨씬 이전부터 도착해 스스로 훈련을 자행했다.
- '검으로 그림자를 휘두르려 하지 마.'
아직까지도 뇌리에 남은 강렬한 한 마디.
내색하진 않았었지만,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당혹감을 숨길 수 없었다.
본가에서의 가르침에서는 단 한 번도 언급된 적 없었으니까.
솔직한 심정으로는, 첫인사로 어설픈 위로나 건네는 녀석이라 칼부터 들이밀면 알아서 꺼질 거라 생각했다.
남의 불행을 그저 장작 삼아 접근하는 부류들이 노리는 것은 하나같이 뻔했으니.
말은 청산유수로 늘어놓지만 결국 목적은 내 몸이나 혹은 히메노 가문이라는 뒷배경.
'하지만 전혀 달랐어.'
비스듬히 가져다 댄 칼날이 목에 닿여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레이의 표정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잠을 자도 잊혀지지 않았던 인상적인 모습에 저도 모르게 기대감을 품었던 걸까.
당주 자리를 몰수당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생각나는 건 오로지 그 밖에 없었다.
다만 정작 그와 마주하고서도 습관으로 굳어진 날선 반응이 튀어나왔다. 순간 아차 했지만,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
그러나 그레이는 되려 차분하고 친절하게 받아들여 주었다.
울분이 가득한 눈물을 쏟으며 도움을 부르짖었던 인생에서, 그 남자만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던 내 손을 잡아주었다.
···직접 표현한 적은 없지만.
너무나도 고마워서 전신이 떨릴 정도였다.
그레이는 본인의 수련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성심성의껏 정성을 다했으니까.
허나, 안타깝게도 그의 방식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미츠키. 이 특수 훈련에서 규칙을 하나 정하는 걸로 하자."
"규칙이라니?"
"간단해. 적어도 나와 같이 있을 때는 검을 내려놓는 거야."
'또 검 타령이네···?'
결정에 불만을 토로한 적은 없었지만, 여전히 이해는 할 수 없었다.
10년이 넘게 검을 잡아온 각성자에게 이제 와서 검을 소홀히 대하라니.
마치 운동선수에게 있어 체력 훈련을 하지 말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네 진짜 힘은 그림자 마스터리야. 그게 먼저라고."
가문에서 받았던 가르침과는 철저히 반대되는 방향성.
여태껏 쳐다본 적도 없는 길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내면에 잠들어 있던 두려움을 깨웠다.
"불안해하지 마. 그리고 초조해할 필요도 없어. 내가 괜히 널 도와준다 말한 게 아니거든."
"뭐? 그게 무슨···"
확신에 찬 그의 어조는 실패는 안중에도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믿고 있길레 저 정도의 자신감인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만약 그 출처가 내 재능이라 믿고 있다면 진실을 알려줘야 하겠지만.
'난 천재가 아니라, 모자란 둔재라고.'
히메노 가의 핏줄을 이었음에도 그 두각을 드러내지 못 하는.
심지어 각성 능력 부분은 더욱 암담했다.
그림자 능력을 다루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대강 알고 있었다. 현역 영웅들도 기가 질려 혀를 찰 정도였으니까.
그랬기에 단순한 칼날 투척 말고는 활용이 없었다.
혼자서 골머리를 싸매며 그림자 마스터리의 완전 통제를 여러 번 시도했지만, 도저히 진척이 되질 않았다.
게다가 정작 검술 수련에 할애할 시간도 부족했다.
"잘 들어, 미츠키. 이미 검술의 단련으로 강하질 수 있는 한계치는 넘어섰어.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검에 재능이 부족하다는 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 하지만 난 포기 못 해."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야. 단지 순서가 잘못되었다는 거지."
순서?
순서가 잘못되었다니, 무슨 소리인지 가닥조차 잡을 수 없었다.
설마 검이 각성 능력보다 뒷전으로 밀려나기라도 해야 한다는 건가.
그렇게 의심만 가득 키워가는 순간이었다.
"치켜떠라."
영문 모를 한 마디에, 그레이의 눈동자에서 푸른 이채가 흘러나왔다.
아름답게 빛나는 두 눈동자가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바닥에 깔린 내 그림자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무슨 생각이지?'
오렌만에 느껴보는 신기함에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는 중, 남자 같지 않은 곱상한 손이 어깨 위로 올라왔다.
돌발 행동에 당황할 틈도 없었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기이한 감각에 정신이 팔려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파도처럼 이리저리 헤엄치는 그림자들로부터 일어난 파동.
평소에는 눈치조차 챌 수 없었던 흐름이 육안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게 어떻게 된―"
"이제 네 그림자의 움직임 하나하나 정확하게 느껴지지?"
정확한 말이었다.
넓고 깊게 가라앉은 그림자가 원래부터 내 몸의 일부였던 듯 자연스레 움직여졌다.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과 똑같이, 순전히 내 의지로다가.
"이제부터 이 감각을 수련하고 응용하는 게 주된 목표야."
나는 처음으로 진심이 담긴 감탄을 자아냈다.
'벽을 뚫어내는 이 느낌, 대체 얼마 만이지?'
이 세상 모든 배움에는 상승 곡선이 존재한다.
수련생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귀신 같이 그 성장 속도가 감소하는 현상.
천재라는 종족들은 그 법칙에 구여받지 않겠지만, 이미 스스로 둔재라는 사실을 인정한지 오래다.
검에서는 클라디스, 초능력이라면 올리비아 정도 되는 인재들만이 배움의 상승곡선에 구애받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유유히 웃으며 유린할 테지. 그러고도 남아.'
그러니 더욱 감동이 벅차올랐다.
어린 시절, 행복과 긍정적인 기운만이 가득할 때나 가졌던 감정들.
나 자신을 채찍질하는 기로에 들어서기 전, 성장이라는 축복과 함께 얻는 성취감과 정복감이라는 달콤한 과실들.
그것들을 그레이에 의해 다시금 되찾을 수 있었다.
* * *
단 둘이서의 특별 수련을 시작한지 한 달이 지났다.
기하급수적인 성장을 이룬 것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지만, 정확한 수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자, 그럼 팀 명단을 공개하겠다."
[1팀]
김호락
엘리자베스
제임스
이서연
[2팀]
클라디스
안나
김현석
제이크
[3팀]
미츠키
그레이
프레드릭
최준혁
[4팀]
―
···그레이와 같은 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안도감이 맴돌았다.
한 달 간의 동행으로 인해 마음속에 이상야릇한 감정이 싹튼 것만 같았다.
무서우리만큼 생소한 감정이었지만, 반강제적으로 나를 지탱해주던 공허함은 사라진 듯했다.
그걸로도 이미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다만 그것도 잠시.
실전 훈련 도중 나는 또다시 나락으로 곤두박질쳐졌다.
'어째서···! 도대체 왜 난 안 되는 거야···!!'
검 없이 C급 마수 2마리를 단신으로 상대하보라는 그레이의 제안.
자신은 있었다.
그림자의 영역까지 터득했으니 적어도 한 마리는 처리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만한 착각이었다.
초반엔 선방했지만, 접전을 이어갈 수록 그림자의 힘이 허공으로 분해되는 듯했다.
내 것이라고 방심했던 그림자의 영역은 어느새 통제를 벗어나 그 색깔이 옅어지고 있었다.
자기혐오의 물살이 또다시 들이쳤다.
대체 언제쯤 성공하는 걸까.
실패와 패배는 너무나도 지겹고 증오스러웠다.
- 모자란 년!
- 네까짓 게 대 히메노 가의 차기 당주라고? 웃기지 마라!
- 얼굴만 반반해서는··· 지 그릇도 모르고 주제넘는 걸 탐하는구나.
- 널 내 자식이라 생각하지 않겠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혐오와 경멸의 시선들.
단 한 순간도 잊혀지지 않는 그 목소리들이 다시금 내면을 갉아 먹었다.
너무 힘들었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이쯤 되면··· 모든 걸 포기하고 삶의 끈을 놓아도 괜찮지 않을까?
기나긴 괴로움이 끝나고, 자포자기를 넘어선 체념의 단계였다.
축축한 물기로 흐릿해진 시야 속에서 한 인영이 눈동자에 비춰졌다.
내 인생의 유일한 이해자, 그레이.
그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도 말이야.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
두 어금니에 사이에서 짓씹혀 선혈이 낭자하는 입술 사이로,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이제는 신경 써줄 필요 없어. 너도 나 같은 년한테 시간 낭비 그만하―"
그러나 내가 간과한 한 가지는···
그레이, 너만은 마지막의 마지막에서도 내 손을 꼬옥 붙들어 주었다는 것.
"조용히 하고, 집중해. 반드시 끝까지 도와줄 테니까 절대 포기하지 마."
남들에게는 어쩌면 오글거리게 들렸을 덤덤한 어투가.
그 순간의 내게 있어선, 드높은 천상의 하모니보다도 아름답게 들렸다.
설명으로는 불가능한 무언의 감정이 넘쳐흐르며 미친 듯한 기세로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었다.
반드시, 그리고 끝까지 도와줄 거라는 응원이 나를 지탱하며 끌어올렸다.
이제야 눈앞의 진정한 벽이 보인다.
어떻게 해야 저것을 깨부술지 알 것만 같다.
머리에서 먼저 판단을 내리기도 전, 이미 깨우쳤다는 듯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인다.
애들 장난식으로 펼치는 그림자 놀이 따위가 아닌, 나만의 '영역'.
오로지 어둠으로만 가득 찬 그 공간에서는 나만이 절대적인 법칙이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허공에 가시 달린 아리따운 꽃 한 송이를 그린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암흑이 정열적인 빨강을 대신하여 치명적인 색상을 뿌려 입힌다.
줄기에 달린 잎새 하나하나가 그림자의 칼날로 변모되어 마수들을 잡아찢는다.
아름답게 분열되는 역겨운 고깃덩어리들이 나의 두 번째 생일을 축복해주니, 더없이 감사했다.
조금이라도 더 이 충만한 감정을 즐기고 싶었다.
그러나 그림자의 영역을 해제해야만 그레이의 얼굴을 볼 수 있었으니, 별수 없었다.
후회되는 선택은 결단코 아니었다.
···어울리지 않게 몸을 떨어대는 그 모습은 꽤나 귀여웠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