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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쓰는 밸런스 파괴범이 되었다-31화 (32/36)

제 31화 의문

탁!

미츠키가 축 늘어져있는 내 오른손을 낚아챘다.

당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뜸 따지려 했지만, 그녀는 싱긋 웃으며 그림자의 영역을 해제했다.

"미안해, 그레이. 장난이 심했나 보네."

"어···?"

미츠키가 두 손으로 내 오른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화난 표정을 보인 건 꿈이었다는 듯이 화사한 표정으로 날 일으켜주었다.

"피곤해서 컨디션이 안 좋은거지?"

조명에 반사되어 찬란하게 빛나는 흑색 머릿칼과 아름다운 자줏빛 눈동자.

감탄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가 울적한 기색으로 사과를 건네니 도저히 목소리를 높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림자 칼날은 왜 꺼내들었던 거지?'

분명 보았다.

주변이 그림자로 뒤덮였을 때, 미츠키의 손에서 늘어난 그림자가 날카로운 예기를 띄고 있었다.

하지만 그림자가 완전이 걷히자 오직 하얗고 가느다란 손줄기만이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들은 거지? 특별 훈련 시간, 좀 줄이자고 한거."

"······"

순간 미츠키의 얼굴에 또다시 금이 갔다.

곧바로 무표정으로 되돌아하긴 했지만.

"이제 나는 필요 없다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화를 낼 거라 예상했지만, 미츠키는 오히려 측은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녀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외면할 수 없는 시선이었다.

'미츠키가 이상한 오해를 가지는 것도 피해야 하고.'

아직까지도 얼떨결한 기분이었지만, 마음을 차분히 다듬고서 입을 열었다.

"내 말을 잘못 이해한 것 같네. 나는―"

"올리비아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건 내 각성 능력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는 거지?"

"그···렇지."

정확히 내 저의를 찌르는 한마디.

냉철하게 핵심을 지적해 들어오는 그녀의 모습에 당황했지만, 말뜻을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여전히 옅은 호선을 그리는 입가와는 달리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지만.

"네가 내 도움이 필요하다 했으니 꼭 그 기대에 보답할게.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

"무리할 필요는 없어. 넌 무슨 일이 있어도 S급 영웅에 도달할 거야."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직전 보여주었던 그림자 능력이면 내일 당장 현역 영웅으로 뛰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조만간 있을 학년 대련에서는 일전과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것이었다.

"고마워, 그레이."

- 포옥.

미츠키의 얇은 몸이 내게 안겨들었다.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에 놀랄 겨를조차 없었다.

'가, 갑자기 이렇게 안긴다고?'

"나한테 확신과 희망을 준 건, 네가 처음이야."

내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댄 미츠키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녀는 한 손으로는 어깨를, 다른 한 손으로는 뒷목을 약하게 감싼 채 나를 안고 있었다.

연애 경험은 단 한 번도 없는 내게는 부담스러운 자세였다.

"미츠키··· 이제 조금 떨어지는 건 어떨까?"

아무리 늦은 저녁 시간이라지만 국제 영웅 아카데미 생도들은 시간대를 가리지 않고 훈련장을 이용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기간에는 수십, 수백명이 훈련장에서 밤을 새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더군다나 미츠키는 일본의 대명문 히메노 가의 외동딸이다.

되도 않는 열애 추문이라도 붙는다면 입장상 곤란해질 터였다.

"알았어."

스르륵.

부드럽게 빠져나오는 미츠키.

갈 곳을 잃은 두 팔은 다시금 제자리를 찾았지만, 내 가슴팍에 남아있는 그녀의 체향은 은은하게 남아있었다.

"우리 둘이서 하는 훈련이 없더라도··· 내가 부탁하면 한 번쯤은 도와줄 수 있어?"

"줄인다는 거지, 아예 그만둔다는 건 아니야. 애당초 네 성장이 빨라서 그런 거니까."

"다행이네."

미츠키가 빙긋이 입꼬리를 올렸다.

나를 보고 웃음을 지은 미츠키는 발걸음을 돌려 기숙사로 걸음을 옮겼다.

같은 A동 건물이니만큼 평소에는 항상 같이 걸어갔지만, 그녀는 곧바로 뒤돌아 빠르게 사라졌다.

'그나저나 왜 갑자기 껴안은 거지···? 히메노 가에서 이런 식으로 감사함을 표한다는 설정이라도 있었나?'

쓸데없이 떠오르는 잡생각을 떨쳐내고자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멀어져가는 미츠키를 쳐다보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녀의 뒷모습에서 스산한 기운이 맴도는 것만 같았다.

* * *

히메노 가의 당주로서 길러지며 감정 조절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했다.

허나, 아직은 아니었다.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선 차분함과 은밀함을 기를 필요가 있었다.

'나랑 훈련을 그만둔다고? 그리고 하는 짓이 올리비아, 그년한테 간다고?'

해코지할 목적으로 그림자의 영역을 전개한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치밀어오르는 화를 주체하기란 꽤나 힘들었다.

곱게 내 곁에 눕혀 평생동안 히메노 가의 안주인으로 들여앉히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엄습했다.

그레이가 나와의 훈련을 아예 그만두지 않을 거라고 말은 했지만, 현저히 줄인다고 했으니 많아봐야 일주일에 한두 번일 터.

남은 시간은 고스란히 그 얼음 마녀한테 쏟을 것이다.

올리비아, 그년은 세간에서는 흔히 얼음 마녀라고 부르기도 했다.

본인이 인정하는 사람 외에는 철저히 냉담하게 대한다는 의미에서 붙은 별명.

좋게 말해서 얼음 마녀지, 딱 백 년 묵은 암여우나 할법한 짓거리였다.

'짜증나···. 너무 짜증나서 미칠 것만 같아.'

지난 한 달간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하던 그 깊은 눈동자가 다른 사람을 향할 거란 생각을 하니 절로 이마에 핏줄이 새겨졌다.

내 비참한 인생에 있어 처음으로 가졌던 행복한 시간을 빼앗겼다.

다른 건 전부 내줄 수 있어도··· 그레이, 그 남자 하나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넘길 수 없다.

빠르게 움직이던 발걸음을 멈추어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정신없이 걷다 보니 어느샌가 기숙사 방앞에 도착해 있었다.

방문을 열자,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샹들리에 아래로 고급지게 꾸며진 펜트하우스가 눈에 들어왔다.

본가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시설이다.

우수 입학 생도들에게만 지급되는 최고급 시실답게 보안도 철저해, 안에서 무슨 짓을 하든 타인이 눈치채기는 힘들었다.

- 일렁.

나는 시선을 내려 손에서 요동치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 내 평생의 반려로 삼을 남자가 있는 위치가 머릿속에 들어왔다.

반대편 방향에 위치한 위층 펜트하우스.

거리가 가까우니 그레이의 위치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이 선명하게 들이쳤다.

기분 좋은 고양감이었다.

한동안 그 감각을 즐기고 다시 눈을 뜨자, 유려한 곡선을 그리던 입술이 빠르게 직선을 그렸다.

영원히 잃어버릴 거라 생각했던 감정을 되찾았다.

평생을 단 하나의 이해자나 동반자도 없이 홀로 보낼 거라 각오했지만, 이제는 불가능하다.

그레이··· 네가 내 세상을 일으켜준 이후, 혼자 있을 때면 기분 나쁜 추위와 고독함이 밀려온다.

아쉬운대로 침대에 앉아 오늘 있었던 특별 훈련을 떠올렸다.

언제나대로 기분 좋은 단 둘이서의 시간.

그러나 마지막에 그가 꺼낸 한마디가 기억나자 고요히 가라앉던 마음에 불길이 일었다.

'조급해할 필요 없어.'

이제는 떨어져 있다 해도 완전한 혼자는 아니니까.

다시금 손에서 물길처럼 일렁이는 그림자를 바라보자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아까 전의 반응.

아무리 미각성자 수준의 신체 능력이라 해도 너무나 허약했다.

그림자의 영역을 높은 마력치로 시전한 이유는 그에게 들키지 않고 그림자를 심기 위해서였지, 결코 압박을 가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애초에 압박이 가해질거라 예상하지 조차 못했어.'

신체 능력이 미각성자 수준이라 해도 영웅의 강함은 각성 능력으로부터 비롯된다.

나 역시 그레이와의 훈련으로 그림자 능력을 급격하게 성장시키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해졌다.

여태까지와 달리, 클라디스에게 지는 그림이 절대로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허풍이 아닌 확신.

실전 훈련 기간 동안 천천히 그년과의 대련을 복기했다.

검로와 속도, 그리고 검기로부터 비롯되는 파괴력을 상대로 각성 능력을 배제하고 덤비는 스스로가 너무나도 멍청하게 보였다.

마치 무기를 들고 있는 사람에게 맨몸으로 달려드는 꼴이었다.

스스스.

마력을 끌어올려 검게 파동치는 그림자를 몸 주변에 휘감자, 시간이 느리게 흐려질 정도로 향상된 감각이 오감을 지배했다.

원래라면 대적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C급 마수 여러 마리도 이제는 동시에 죽일 수 있다.

여태까지 나를 좌절시켰던 굴욕적인 장면들을 뒤로하고 내 발밑에서 쓰러져있는 클라디스를 떠올렸다.

그렇다해도 그레이가 내게 패배하는 장면은 아직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러나, 가끔가다 보이는 그의 약한 모습은 걱정이 들 정도로 연악했다.

어떻게 국제 영웅 아카데미에 입학했는지 의문이 들 때도 종종 있었다.

힘 좀 쓴다는 일반인들도 가뿐히 들어올리는 쇳덩이를 들지 못해 안간힘을 쓰질 않나.

심지어 학기 초반에는 겨우 훈련장 두 바퀴 러닝에 지쳐 쓰러진 적도 다반사였다.

C급 마수 정도는 손짓 하나로 절명시키는 강자.

놀랍게도 그 이면에는 F급 마수 하나도 처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약자가 숨겨져 있었다.

연달아 꼬리를 무는 의문들을 곱씹으며, 나는 다시 한번 일렁이는 그림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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