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화 암시장의 상인(3)
암시장은 여러 범죄의 중심지 중 하나였지만, 의외로 큰 수고를 들이지 않고도 출입할 수 있었다.
영웅들이나 빌런들을 비롯한 어지간한 각성자라면 별 탈 없이 드나들었다.
성인도 채 되지 않은 아카데미 생도들도 드나들었던 곳이니만큼 보안이 철저하진 않다.
마음만 굳게 먹으면 허접한 각성자라도 발을 디디는 경우가 허다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무법지대란 뜻은 아니었다.
내부에서의 무력 충돌은 총괄부에 의해 엄격히 금지된다.
암시장에는 입장과 위치를 불문하고 다양한 사람이 모인다.
빌런이나 영웅, 용병, 일반 각성자 혹은 정부 측 인사까지.
바깥에서 만난다면 즉시 마력을 끌어올려 적대시할 관계들이라도 이곳에서 싸움을 일으킨다면 처절한 대가를 감수해야 했다.
아무리 이름 좀 날리는 양반들이라도 총괄 행정부에게 찍히면 그날부로 목숨을 보전하기 힘드니까.
'설령 A급 영웅이나 빌런이라도 자중하는 편이지.'
암시장을 관리·감독하는 총괄 행정부는 3개의 거대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이 뒷세계를 주름잡는 공룡들로, 수많은 빌런 조직으로 이루어진 '빌런 연합'의 원로 즈음 되는 위치였다.
그들은 같은 빌런들이라고 해서 동질감을 느낀다거나 하는 헛짓거리 따위는 집어치우고 본인들의 이득에 의해서만 움직인다.
본래 빌런 연합의 기원은 약소 빌런들이 살아남기 위해 서로 뭉치는 것으로 비롯되었지만, 반대로 본인들의 소속이 아닌 이들에게는 가차없이 폭력을 휘둘렀다.
그게 영웅이든 빌런이든 상관없이.
그렇기에 암시장에 들어온 이상, 그 누구도 총괄 행정부의 신경을 거스르는 멍청한 행동은 피했다.
'총괄 행정부를 구성하는 조직들이 흑수회, 크라임 신디케이트, 그리고 붉은 달이었나.'
빌런 연합의 수뇌부들은 '왕'급 조차 건드리기 껄끄러워할 정도로 뒷세계에서는 절대적인 위치를 자랑한다.
전투력이 특출나지 않더라도 잘못 건드리면 어마어마한 머릿수가 벌떼같이 쏟아져 나올 테니까.
개중에서도 흑수회와 크라임 신디케이트는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특히 크라임 신디케이트는 아시아에 주력하는 흑수회와 다르게 전 세계에 걸쳐 각 나라의 암시장에 빠짐없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세 조직 중 가장 위험한 놈은 크라임 신디케이트가 아니었다.
붉은 달.
빌런 조직들 중에서도 드물게 소수 정예를 유지하는 놈들.
멤버 개개인의 무력이 최소 B급부터 시작했고, 간부급에는 A급에 다다른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붉은 달의 수장은 S급에 필적하는 괴물이었다.
비교하자면 이시아에게도 꿀리지 않는 수준.
'절대 붉은 달과 마찰을 일으킬 수는 없다.'
오늘 그들에게 잘못 걸린다면 목숨이 날아가는 건 당연하고, 살아남는다 해도 스토리에 큰 지장이 생긴다.
후반부로 갈수록 빌런들 뿐만 아니라 부패한 일부 정부 인사들마저 죽여야 한다. 이때, 붉은 달을 통하지 않으면 스토리 진행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독보적인 루트를 선호했던 나조차 어길 수 없었던 국룰이었다.
나는 걷는 속도를 높여 빠르게 오염된 거리로 향했다.
블랙데이라 그런지 주변에 빼곡하게 들어찬 천막 상점들에서 홍보를 외치는 고성이 터져나왔다.
"싸다, 싸! 해산물 듬뿍 넣은 도마뱀 수프가 단돈 2만원!"
"고블린의 콩팥부터 오우거 뼈를 가공해서 제작한 장비들까지! 한 번 보러들 와보쇼!"
"200만원에 아뜰리에 공방제를 살 수 있는 곳은 여기밖에 없소! 한 번 고려해 보시오!
···아무리 암시장이라 해도 그렇지, 사기 매물에 바가지가 너무 심한데?
쓰레기보다 못한 맛이 나는 해산물 도마뱀 수프가 2만원인 건 둘째치더라도, 아뜰리에 공방제라니.
최소 십억 단위부터 시작하는 최상급 명품을 이런 길바닥에서 200만원에 팔 리가 없다.
저거에 속아넘어 가는 놈이 있다면 인생 살기 참 힘들 거다.
"저기··· 진짜 아뜰리에 공방 제품이 맞소??"
"아우~ 물론이요! 자 여기 품질 보증서도 있지 않소?"
"오오!"
미친, 아뜰리에는 일체 수제작인데 품질 보증서라···.
설마 했는데 대충 겉으로만 봐도 띨띨한 바보 하나가 기어코 낚시에 걸려들어 그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 광경에 기가 차 헛웃음을 내뱉던 때였다.
"아이고 나으리~ 보아하니 귀하신 분 같은데 사제 포션 하나 생각 없으십니까? 효과는 보증해 드립니다!"
주근깨 범벅에 원숭이 마냥 콧등이 불룩하게 튀어나온 사내 하나가 이쪽으로 뛰어왔다.
반딧불이마냥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이 돈 많은 도련님이라도 바라보는 듯했다.
나는 예상치 못한 호객 행위에 당황하여 사내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며 귀신이라도 보는 듯한 기색으로 몸을 떨었다.
"죄, 죄송합니다 나리. 제가 너무 신난 나머지 주제도 모르고 그만···."
뜬금없이 사과를 한다고?
별로 기분 나쁜 것도 아니었는데.
'가면과 의상때문인가?'
현재 착용하고 있는 회색 가면이야 얼굴을 가리기 위함이라 흔한 경우였지만, 의상은 달랐다.
내가 차려입고 있는 옷은 유럽의 최고급 브랜드 아르메스 세트였다. 협회에서 지원받은 금액 중 상당수를 쓰긴 했다만, 그럴 가치는 충분했다.
암시장에서는 얕보일수록 불리하니까.
마력을 사용해 힘자랑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겉모습을 철저하고 치장하고 오는 경우가 꽤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르메스 세트는 과한 편이었다. 나는 단순히 얕보이지 않기 위해 이런 치장을 하고 온 것이 아니었다.
임시장 경매.
거리 위의 천막 상점들이나 일반 상점들이야 모두가 구분 없이 이용할 수 있었지만, 경매는 오직 VIP들만이 입장 가능했다.
도난 혹은 분실을 대비해 VIP전용 명함이나 카드 같은 것은 없다.
대신, 매년 달라지는 비밀 코드를 알고 있어야 했다.
철저한 루트를 통해 오직 해당 대상들에게만 알려져 새어 나가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나야 모든 해의 비밀 코드를 알고 있지만.
내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두었던 설정집.
그곳에 향후 10년간의 비밀 코드가 모조리 적혀 있었다.
'암시장 경매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대략 1시간인가?'
어느 정도 여유는 있었다.
이왕 온 거 몇 군데 둘러라도 보고 싶으니 이 사내부터 떼어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의 손아귀에서 찰랑이는 포션을 보고 꺼지라는 말을 도로 집어넣었다.
진한 청록색.
일반적인 포션이라면 저 색이 나오지 않는다.
허나, 눈앞의 사내가 내가 예상하는 그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리진다.
여전히 눈을 아래로 내리깔은 채 몸을 떠는 사내.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과할 필요 없소. 보아하니 꽤 괜찮은 포션 같은데."
"예, 예?!"
"그쪽이 들고 있는 포션 말이오. 청록색은 잘 나오지 않는 색깔로 알고 있는데."
"마, 맞습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사내는 아직도 긴장이 채 가시지 않은 듯 말을 더듬었지만 들뜬 기색이었다.
그는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몸짓으로 포션이 담긴 유리병을 이리저리 돌려댔다.
"비록 사용된 재료의 질은 하등품일지 몰라도 제조법은 확실하다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공산품으로는 시연할 수 없는 효과도 가능합죠!"
"내 하나 묻지."
"말씀하시죠!"
"예전에 국제 영웅 아카데미 생도에게 각성제를 제조하여 판매한 적이 있나?"
예상하는 그 사람이 맞는지 확인차 던진 질문이었다.
사내는 정곡을 찔린 표정으로 다시금 말을 더듬었다.
"그, 그거야 제가 마, 맞기는 한데··· 어째서 그걸 물어보시는지요? 혹 문제라도 있습니까?"
"확인을 위해 던진 질문이었으니 신경 쓰지 말게. 그 각성제라면 실력은 확실하겠군?"
"예! 맞습니다."
"좋다. 네 이름은?"
"춘식이라고 합니다!"
빙고.
별생각 없었는데 운 좋게 암시장 히든 피스 중 하나가 걸렸다.
암시장의 하급 상인, 춘식.
그의 본명은 이철기로 전(前) 한국 연금술사 협회의 최연소 수석 연구원 출신이었다.
태생이 괴짜 성격이라 내부 암투에 휘말려 국물 하나 건지지 못하고 하류 인생으로 전락했지만, 게임 내에서도 실력은 확실했다.
포션으로 한정한다면 재료만 가져다주어도 최고의 품질을 뽑아냈다.
나는 입가에 옅은 호선을 그리며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연락처를 알 수 있겠나?
"연락처 말씀이십니까?!"
"자체 제작 포션에 개인적으로 흥미가 있어서 말이야. 척 봐도 알겠지만 값은 심심치 않게 치러줄 수 있네."
"당연! 당연합니다! 여기 제 명함입니다, 나리!"
춘식은 거듭 고개를 숙이며 황급히 명함을 건넸다.
때 묻은 명함에는 이름과 전화번호 하나만이 달랑 적혀 있었다.
"필요할 때 연락을 주도록 하지. 그럼 이만."
"살펴가십쇼!"
등을 돌려 발걸음을 옮기자, 춘식이 허리를 90도로 수그리며 배웅했다.
파랗게 질려 있던 안색은 이미 활짝 펴진 상태였다.
'시작이 좋다.'
암시장의 히든 피스는 요령 없이 노가다로만 찾아야 하는 종류가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얻어걸리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다.
나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오염된 거리의 중앙을 향했다.
10분가량 계속해서 걷자, 저 멀리 고풍스러운 성 형태의 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암시장의 경매장.
저곳이 오늘 만물상인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