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화 혼돈 속의 경매장
"여보게, 그 소문 들었나?"
"소문이라니?"
"마도왕이 죽었잖는가. 그 잔당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임을 개시하는 모양이야."
"하지만 퍼시발 렌토, 그자는 이미···."
오염된 거리의 중심지.
이름에 걸맞지 않게 고급 르네상스풍으로 꾸며진 도시를 구경하며 발을 내딛었다.
매끈한 벽돌이 촘촘히 갈린 곧은 도로와 곳곳에 조각동상이 다듬어져 있는 도보, 가끔가다 옷에 물줄기를 튀기는 연못들.
마치 19세기 유럽의 번화가 한가운데 서 있는듯한 착각이 일 듯한 광경이었다.
큰손들이 주로 머무르는 장소니만큼 거리의 위생도 깔끔했다.
그에 반해 주변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흉악한 인상과 덩치를 지닌 무장경비들이 돌아다니고, 콧수염을 길게 기른 재력가들은 저마다 수행원을 하나 이상씩 대동하고 있었다.
물론 그 수행원의 주목적은 경호일 터였다.
암시장의 축제 날인 블랙데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나는 차분히 귀를 열고 이런저런 잡담을 엿들었다.
"퍼시발 렌토가 죽었는데도 마도왕의 잔당들이 움직이고 있다니."
"마음놓지 말게. 총애를 받았다고는 하나 퍼시발 그놈은 결국 A급에 불과해. 마도왕 세력의 최고 간부들이 가만히 있겠나?"
"으음, 블랙데이라 겨우 발걸음 했건만 걱정이 되는군. 경매만 마치면 빨리 떠야겠어."
'흐음, 마도왕의 잔당들이라···.'
마도왕의 추종자들과 빌런 연합의 사이는 좋지 않다.
그것은 다른 왕들의 추종자들 또한 마찬가지.
구심점이자 주인인 마도왕이 죽었으니 그 잔당들의 움직임이 정사에 비해 격해진 듯했다.
더군다나 블랙데이의 경매에는 귀중한 물건들이 대거 나타나니, 암시장 측에서는 혹시나 모를 상황을 대비해 경계를 높인 것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나는 짧게 혀를 찼다.
'자칫하다간 위험하겠는데.'
만약 공격이 온다 하더라도 핵을 쓰면 막아낼 수야 있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내 정체는 100% 발각된다.
만물상인을 만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래, 설마 딱 오늘 오겠냐."
걱정을 떨쳐내며 경매장 입구에 들어섰다.
검은 정장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관리자들이 내 앞을 막아섰다.
"경매장 입장자이십니까?"
대답 대신 고개를 한차례 주억였다.
그러자 그들은 절제된 동작으로 볼펜 한 자루와 해골과 나침반이 그려져 있는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제시해 드린 카드에 비밀 코드를 적어주십시오."
나는 망설임 없는 손놀림으로 펜데를 잡았다.
뭉특한 촉에서 흘러나오는 잉크는 내 손끝을 따라 올해의 비밀 코드를 적어 나갔다.
짧은 시간에 작성을 마치고 맨 앞의 남자에게 건네주고선 흘러내린 가면을 고쳐썼다.
"확인되셨습니다. 이제 입장하셔도 됩니다."
절차가 끝나자 관리자들은 한층 더 공손해진 태도를 보이며 번호가 새겨진 막대기 하나를 건네주었다.
128번.
오늘 경매장에서 내 이름 대신 사용할 번호표였다.
나는 계속해서 걸어들어갔다.
숲을 주제로 한 각종 그림들이 걸려있는 복도를 지나니 넓게 펴진 홀이 한눈에 들어왔다.
화면으로만 줄곧 봐왔던 임사장의 경매장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크고, 고급지네.'
수십 개에 이르는 좌석 열들 사이에는 난간이 세워져 있었고, 모조리 황금으로 만들어졌는지 샛노란 광택을 발했다.
1층 뿐만 아니라 2층과 3층도 마저 존재했는데, 나 같은 일반 입장자들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설정상 VIP들 중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자들이거나 총괄부의 고위 간부 정도는 되야 이용할 수 있는 자리였다.
나는 두리번거리며 적절한 좌석을 탐색했다.
찔리는 부분이 많으니 지나치게 눈에 띄면 곤란했으니까.
그러나 반대로 너무 묻히는 자리에 않을 생각도 없었다.
적어도 사회자 눈에 비춰질 수 있는 곳.
중앙 뒷부분에 위치한 좌석에 엉덩이를 내렸다.
이윽고 황금빛을 내뿜던 조명이 꺼지며 은은한 조명만이 홀을 밝혔다.
커다란 무대 위로 성큼성큼 올라온 사회자가 마이크를 붙잡고 말문을 열었다.
"신사숙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블랙데이를 기념하여 경매장에 찾아와 주신 귀한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토끼 가면에 어울리는 활달한 목소리.
사회자의 등장은 경매장에 무겁게 가라앉은 적막을 단번에 깨트렸다.
그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뒤숭숭한 분위기가 멤돔에도 이렇게 귀한 발걸음을 해주신 분들을 위해! 저희 측에서 더욱 값어치 있는 보물들을 선정해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음, 역시 3대 조직에 터를 둔 총괄부답군. 마땅한 대우를 할 줄 알잖나."
"동감이야. 주최 측에서 자신있어하는 물건들은 큰 돈을 들일 가치가 있지."
만족스러운 반응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사회자는 토끼 가면 너머로도 보여질 듯한 짙은 웃음을 지었다.
"VIP들께서 마음에 들어하시니 더없이 만족스럽군요. 좋습니다! 질질 끌 것 없이 곧바로 오늘의 경매를 개시해겠습니다! 나와주세요, 미스터 라이엇―!"
홀 구석구석에 울려퍼지는 외침이 끝나자마자 사자 가면을 쓴 남자가 커튼 뒤에서 걸어나왔다.
옆에 여우 가면을 쓴 여성들을 대동한 채였다.
사자 가면의 남자가 손짓을 하자, 여우 가면들이 분주한 움직임으로 보석으로 치장된 상자를 올려놓았다.
심상치 않은 겉모습에 회장 내로 웅성거림이 번져나갔다.
"첫 물건부터 대단한데? 겉에 박혀 있는 보석들만 해도 얼마야?"
"진짜는 그 안에 든 거겠지. 사회자가 자신만만해할 만하군."
만족스러운 몸짓으로 사회자가 손뼉을 쳤다.
상자가 열리고, 그 안에서 호리병 모양의 술병 5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술병? 저 보석 상자안에 들어있는 게 고작 술병이라고?"
"그런데··· 저 로고 어디선 본 것 같지 않나?"
"무슨 소리하는 건가. 저 로고는 본 적이 없··· 잠깐, 저거 설마?!"
'와우. 첫 판부터 쎈 게 나오는데.'
과거, 세계적으로 손꼽혔던 주류 브랜드 '레인하트'.
해당 회사가 해체된 이후 모습을 감춰 다이아몬드조차 비할 수 없다는 술이었다.
그 희귀성은 가히 전설 등급 아티팩트 이상.
만물상인은 열렬한 애주가라는 설정이었으니 탐내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그 생각이 들자, 나는 비릿한 웃음과 함께 손을 들어 금액을 불렀다.
"천만 원."
예상을 초과하는 액수였는지 주변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최종 경매가야 당연히 천만 원을 훌쩍 넘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만 원이라는 시작가는 정상이 아니었다.
"첫판부터 천만 원이라니, 대체 가격이 얼마나 올라가는 거야?"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지. 보좌관! 동원 가능한 현금은 전부 알아봐."
가열되는 경쟁심.
이것이 내가 노렸던 반응이었다.
'처음부터 구매할 생각 따윈 없었어.'
현재 내 수중에 있는 돈으로 레인하트의 술은 절대 구할 수 없다.
설령 경매가가 아닌 일반 판매 가격이라 하더라도.
단지 내 목적은 하나.
만물상인의 이목을 끄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뒤통수에 직통으로 틀어박히는 강렬한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시선을 철저히 무시한 채 계속해서 경쟁자들을 재치고 천문학적인 가격을 연달아 외쳤다.
"5천만 원!"
"8천만 원!"
"1억 4천만 원!"
"2억 원!"
순식간에 술 한 병의 가격이 2억원으로까지 치솟았다.
허나 암시장의 VIP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손을 들었다.
"다름 아닌 레인하트의 술이야. 일평생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돈이 문제겠나!"
"동감이네. 내 수중의 비자금까지 동원할 거라고!"
아무리 만물상인의 자금이 넘쳐난다 해도, 이곳의 큰손들 또한 만만찮은 재력가들이다.
하지만, 과연 술에 죽고 술에 사는 만물상인이 포기할 수 있을까?
나는 기대를 품은 채 군중들 속에 숨어있는 그가 반응을 보이길 기다렸다.
"···14억원."
"뭐라고?!"
"단번에 10억원을 올렸어??"
난데없이 경매가가 10억원을 넘어 뻥튀기되었다.
목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후드를 쓴 작은 체구의 인물이 고요히 손을 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직감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사람이다.'
찾았다, 만물상인.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새로운 제목, '핵 쓰는 고인물이 너무 강함'으로 문피아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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