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 업무 일지 : 1일째(5)
'아, 저게 저기서 나오네. 그럼 이제 5연콤보가 완성되는 건가?'
호국은 미리 외워두었던 카드의 조합들을 떠올리면서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다.
이 집중 게임이 시작된지 벌써 몇 시간이나 흘렀다.
호국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음료수 구멍에서 자동으로 튀어나온 레모네이드를 쪽쪽 빨면서 게임을 이어나갔다.
첫 게임은 깔끔하게 호국의 패배로 끝났다. 52장의 플레잉 카드에서 나올 수 있는 조합은 26개. 그런데 호국의 운이 없었던 탓인지 상대방이 연이어 과반수의 조합을 획득하면서 승리를 거머쥔 것이다.
하지만 진짜 게임은 그 다음부터였다. 갑자기 52장의 플레잉 카드가 갑자기 88장으로 바뀐 것이다.
의문을 표하는 호국에게 미리 확인시켜줄 요량인지, 테이블은 카드를 섞기 전에 미리 뒤집어서 어떤 카드가 추가되었는지 확인시켜주었다.
일반적인 플레잉 카드에는 존재하지 않는 12부터 20의 숫자가 적힌 카드들이 4개의 문양을 가지고 추가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해서 12라는 숫자가 쓰인 스페이드 카드와 하트 카드도 함께 뽑을 수 있게 된 셈. 삽시간에 경우의 수가 증가했다.
이런 집중 게임이 있다고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호국은 무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서 고작 52장의 플레잉 카드로 일 대 일 대결을 펼치는 건 너무 시시했던 것이다.
기억해야 할 카드의 수가 적은 탓에, 만약 자신이 조합 맞추기에 실패하면 그 카드는 다음 턴에서 상대에게 뺏길 확률이 꽤 높았다. 게다가 운이 따라준다면 몇 번이고 계속 점수를 얻을 수 있지만, 반대로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상대에게 점수를 헌납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카드의 수가 늘어나, 외워야 할 카드의 조합들이 많아질수록 호국은 기뻤다. 이런 게 바로 진짜 게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몇 번의 게임 끝에 서로 승리와 패배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어느덧 서로의 승패 기록이 동점에 달했을 무렵.
터치 패널식 테이블은 카드의 배열을 임의로 바꾼 뒤 40장씩 맞춰서 노출시켰다. 그리고 페이지 넘김 방식을 도입해, 게이머가 1페이지부터 20페이지까지 확인할 수 있게 했다.
랜덤으로 배열된 플레잉 카드의 총 숫자는 어느덧 772장을 기록하고 있었다. 최초에 52장으로 시작했던 게임이 21판째에 도달하면서 720장이 추가되었고, 이는 40장 기준 20페이지를 만들어내는 결과에 다다랐다.
무려 800장 가까이 되는 플레잉 카드. 여기에 신중하게 카드를 고르지 못 하도록 턴당 30초의 제한 시간이 주어졌다. 30초가 넘도록 카드를 고르지 못 하면 턴을 포기한 것으로 간주한다.
반대로 30초 이내에 제대로 된 조합을 찾아낼 경우, 다시 30초의 제한 시간이 복구되는 방식이었다.
피 말리는 기억력 싸움에서 어마어마한 수의 카드와 턴당 30초라는 제한 시간은 게이머들에게 적지 않은 심적 압박감을 준다.
하지만 상대방이 행운의 여신이 아닌 이상, 턴이 이어질수록 결국 게임은 호국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경우의 수가 폭증했다는 것은 그만큼 서로 맞지 않는 조합의 카드가 나올 확률도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페이드 10을 뽑았는데 심혈을 기울여 뽑은 게 하트 36이라면 급격하게 우울해질 것이다. 수 백장의 카드 중에서 같은 조합을 찾는다는 건 정말이지 힘들다.
그러나 김호국이 누구인가? 자랑할 거라곤 별로 많지 않은 20대 건장한 청년이지만 기억력 하나만큼은 칭찬 받으면서 자랐다.
콤보, 콤보, 콤보!
자신의 턴이 돌아오면 일체의 고민도 없이 카드를 뒤집는다. 조합이 맞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렇게 계속 카드를 뒤집다가 어느 순간 조합들을 기억해내고, 자신의 턴이 되면 연속으로 몰아붙였다.
반면 중년 신사도 지금껏 잘 따라왔으나, 슬슬 머리에 부하가 왔는지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도 연속으로 카드의 조합을 만든 적은 있었으나, 호국만큼은 아니었다.
"와! 이겼다!!"
결국 호국이 772장의 카드에서 1인이 최대한 뽑아낼 수 있는 194점을 획득하면서 승리를 가져갔다.
집중 게임의 편리한 점은 카드의 숫자가 많아져도 어느 한 쪽이 절반보다 딱 1점만 높은 점수를 먹는 순간 게임이 자동으로 끝난다는 것이었다. 더 찾을 필요도 없이 깔끔하게.
스포츠처럼 역전을 노리면서 시간을 질질 끌 필요가 없어서 이것만큼은 편리했다.
"후우! 오랜만에 실컷 즐겼네."
컴퓨터를 상대로 벌이는 도박 게임에선 모든 패턴을 외워버려서 지루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스마트북으로 그런 게임을 하는 건 호국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인간을 상대로 도박을 벌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호국은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래 업무는 시설 경비로써 이 곳의 안전성을 검사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휴식(게임)을 취하면서 알아본 결과 모두 안전했다.
"재미있었어요."
호국에게 어마어마한 점수를 한 번에 빼앗기며 패배한 중년 신사는 씁쓸하게 웃어주었다.
사실 호국이 10패를 한 것도 순전히 운 때문이었는데, 중년 신사는 처음 뒤집는 카드에서 몇 번이고 맞는 조합들을 꺼냈었다.
이런 현상은 곧 카드의 숫자들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는데, 더이상 운이 따라주지 않자 기억력 싸움에서 중년 신사가 완전히 밀린 것이다.
11승 10패. 결코 깔끔한 전적은 아니었지만 순수한 실력(기억력)으로만 놓고 본다면 호국이 21승 0패를 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게임이었다.
슬슬 6-10의 방을 나서기 위해 채비를 하던 호국은 문득 바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한 명의 여성을 발견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딜러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딜러 복장이 착 달라붙을 만큼 잘 빠진 몸매에, 풀어놓으면 허리까지 내려올 것 같은 금발 올림머리, 서양인 특유의 오똑하고 눈에 띄는 이목구비로 보건대 틀림없는 미인이었다.
일반적인 남성이라면 패션모델처럼 걸어오는 미녀를 보고 푹 빠졌겠지만, 호국의 신경은 이미 밖에 가있었다. 몇 시간이나 놀았으니 다시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딜러는 어디서 꺼냈는지도 모를 커다란 007 가방을 내밀었다. 잠깐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호국이었으나, 이윽고 자신이 즐긴 건 도박이었음을 기억해냈다.
'판돈으로 초콜릿을 걸었으니까 엄청 많은 초콜릿을 주는 건가?'
상했을지도 모르는 초콜릿 몇 개를 판돈으로 걸었을 뿐인데, 마지막 게임에 이겼다고 해서 이만한 양을 되돌려 받을 줄은 몰랐다.
싱글벙글 웃으며 007 가방을 연 순간, 호국은 안 쪽에서 흘러나오는 눈부신 황금빛 광채에 인상을 찡그렸다.
"으극, 으그으으윽!"
혹시 몰라 황금빛의 직육면체를 하나 집어들어 깨물어보았다. 꽤 열심히 깨물어봤지만 황금색 포장지에 감싸인 초콜릿은 아니었다.
"이건 초콜릿이 아닌데요."
자신은 판돈으로 초콜릿을 걸었는데 왜 초콜릿이 아니라 먹지도 못 하는 걸 준단 말인가? 이게 혹시 도박판에서 호구를 등쳐먹는다는 경우인가?
호국이 대놓고 인상을 찡그리자 딜러는 적잖이 당황스러워하더니 다른 007 가방으로 즉시 교체해주었다. 이제야 호국이 호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 했다.
"진작 이럴 것이지...음?"
교체된 007 가방에서 나온 것은 빳빳한 5만원권 지폐 다발이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가방 안을 꽉 채울 만큼 많았다.
아마 전부 해서 수 억원은 되지 않을까 싶었다. 범죄 영화에서 주인공이 접하는 이만한 규모의 돈다발은 대부분 억 단위라고 나왔으니까.
물론 호국은 돈의 액수가 많고 적음을 따지지 않았다. 초콜릿이 아니었다는 것을 따졌을 뿐.
게다가 이건 '재물'이 아닌가? 시설 경비인 자신에게 카지노의 딜러가 대놓고 재물을 준다? 이건 즉 뇌물이었다.
-속보입니다. 제주도에 위치한 TF 산하의 모 시설에서 근무중인 김 모씨가 카지노에서 억대의 뇌물을 받아 챙긴 것이 알려져 큰 논란을 빚고 있습니다. TF 측에선 김 모씨를 해고 조치 하였으며, 명예를 훼손시킨 것에 대한 법적 절차를......
벌써부터 아침 뉴스에서 흘러나올 자신의 불행한 미래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집에서 가상현실에 접속해 있을 가족들도 혀를 차며 호국과의 연을 끊으려 할 것이다.
허황된 재물을 탐하지 말라. 하지만 초콜릿이라면 괜찮다. 그건 재물이 아니니까.
그런데도 굳이 뇌물을 주었다는 것은, 호국을 호구로 보고 엿을 먹일 심산인 게 분명했다. 분명 경비직에서 잘리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리라.
'그렇겐 안 되지!'
호국은 즉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뽑아, 손잡이로 딜러의 안면을 후려쳤다.
돈다발이 들어있던 007 가방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지폐가 비처럼 쏟아지는 절경 아래에서 호국은 비장한 얼굴로 외쳤다.
"다들 엎드려어어어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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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처리시설의 시설 관리 시스템, 통칭 관리봇(bot)은 지하 42층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괴한 현상을 파악하기 위해 모든 전산 능력을 동원했다.
하지만 12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시설 전체를 관리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관리봇은 현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한다는 표현은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이나 쓰는 말이지만, 어마어마한 데이터가 축적된 관리봇도 비슷한 행동이 가능했다.
그래, 어마어마하게 축적된 12년분의 데이터와 TF의 메인 서버에서 실시간으로 공유받는 추가 데이터들을 포함하면, 관리봇은 사실상 침식(ES, erosion)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지금, 지하 41층에서 한바탕 난리를 벌였던 신입 가드 김호국이 지하 42층의 '신체포기 도박판'에 들어서면서 엄청난 오류를 일으키고 있었다.
CCTV를 통해 지속적으로 지켜본 결과, 그는 ES 6-10의 은폐실이 어떤 장소인지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냅다 들어가버렸다.
ES 6-10의 은폐실은 과거 미국의 라스베가스에서 한 때 악마의 카지노라고 불렸던 장소의 인테리어와 기재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옮겨 놓은 보관고였다.
도박붐이 한창 불고 있을 무렵, 신원미상의 사업가에 의해 건설된 'all or nothing' 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의 카지노.
하지만 그 곳에서 들어선 모든 인간들은 아무리 많은 돈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한들, 카지노에서 절대로 돈을 소비할 수 없었다.
최초의 판돈을 거는 것을 제외하면 게이머가 패배해도 절대로 돈을 받지 않았다. 그 대신, 패배한 상대가 지게 된 빚 만큼 그에 해당하는 신체 기관 일부를 '누구도 모르게' 가져갔다.
이는 게이머가 실제로 얼마를 벌여들였는지를 따지지 않았다. 따지는 것은 무조건 패배의 수. 패배가 승리보다 많을 시, 게이머가 카지노를 떠나려 하는 순간 모든 액수를 합산하여 제멋대로 계산해버린다.
그렇게 어떤 자는 게임 한 판을 지고 카지노를 떠나려다 안구를 빼앗겨야 했으며, 또 다른 자는 간이나 심장을 빼앗겼다. 돈을 받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열심히 게임을 즐기던 자는 어마어마한 패배를 쌓고, 이윽고 행방불명 되었다.
TF 측에서 이 사실을 포착하고 즉시 all or nothing 에 존재하는 모든 테이블과 기재들을 압류해 처리시설로 보냈다.
이것이 신체포기 도박판 사건의 전말인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패배보다 승리가 많은 상태로 카지노를 나서려 하면 어떻게 되냐는 것이었다.
TF 측에선 꽤 많은 목격자들을 실험대상으로 써서 확인해보았는데, 패배보다 승리가 많다면 전적을 상관하지 않고 한국 돈으로 최소 1억, 최대 10억에 달하는 금액을 랜덤으로 지급해 주었다.
하지만 신체포기 도박판의 기묘한 힘 때문인지, 일단 한 번 들어서는 게이머들은 10패를 달성하기 전까지 절대로 연이어서 승리를 할 수 없었다.
즉 1패를 한 뒤, 1승을 하면, 그 다음은 무조건 1패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꼭 승리를 하지 않더라도 연이어 10패가 쌓이면, 그때부터 게이머의 진짜 실력과 운으로 승부할 수 있게 된다.
대부분은 10패를 승리로 청산하지 못해 행방불명되었고, 게임 천재라고 불렸던 한 목격자만이 아슬아슬하게 10패 11승을 달성해서 온전히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카지노 측의 존재들과 집중 게임만은 하지 않았다. 판을 거듭할 수록 어마어마하게 늘어나는 카드들 때문이었다.
-와! 이겼다!!
진짜 실력으로 붙게되는 10패 이후의 게임에서 완벽하게 승리한 호국은 어느덧 막대한 보상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CCTV 영상의 한 구석에서 노이즈를 일으키며 자연스럽게 등장한 미녀 딜러. 그녀는 호국에게 100g 골드바가 가득 들어있는 가방을 내밀었다. 분명 최대치의 보상에 가까웠다.
'가드-079는 좋은 대우를 약속받아 이 곳에 취직한 인간입니다. 즉 재물에 대한 탐욕도 어느정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위험천만한 곳에 좋은 대우를 해준다는 것 만으로도 취직했을 정도의 인간이니, 분명 눈 앞에 순금 덩어리를 갖다바친다면 좋아라 하며 챙길 것이다.
그 경우, 공식 허가 없이 6-10에서 부당 이득을 취했다는 이유로 기동타격대에 의해 처리될 것이다.
메뉴얼에 따로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일반적으로는 저 보상을 받아챙긴 뒤 즉시 상층부에 반납해야 했다.
하지만 영상 속의 호국은 뭔가 이상한 듯, 풀페이스 헬멧을 살짝 벗어 순금을 깨물었다.
'인간은 금괴의 진품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깨물어보는 원시적인 방법을 사용한다는 데이터가 있습니다.'
호국 또한 당연히 그런 목적으로 골드바를 깨물어본 것이리라 생각했으나, 관리봇의 에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이건 초콜릿이 아닌데요.
'오류, 오류. 가드-079가 어째서 금괴를 눈 앞에 두고 초콜릿을 찾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음'
뒤이어 카지노 측의 존재인 딜러는 당황스러워하더니, 곧 케이스의 내용물을 바꿔주었다. 이번엔 누가봐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다발이었다.
'가드-079가 골드바에 대해 몰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화폐라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김호국의 프로필 특이사항에 IQ 84 가 기재되어 있었다는 데이터를 확인한 관리봇은 '골드바도 모르는 빡대가리가 있다' 라는 사실을 어렵사리 받아들였다.
이번에야말로 김호국이 돈다발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한 관리봇은 갑자기 그가 허리춤의 권총을 뽑아드는 것을 보고 또 다시 오류를 일으켰다.
'오류! 오류!'
카지노는 그 어떠한 강제적인 행위도 불허한다. 즉 게임을 방해한다거나, 카지노측 인물에게 이유없는 물리력을 행사하려 들 경우, 즉시 대상의 신체 일부를 무작위로 빼앗아버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호국은 딜러의 안면을 후려치곤,
-다들 엎드려어어어어어!!
'......'
관리봇은 재부팅을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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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