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 업무 일지 : 2일째(2)
TF 산하의 모든 시설들은 기본적으로 한 번 들어가면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는 지옥의 구덩이로 비유된다..
시설이 기본적으로 거대한데다, 지하 깊숙이 존재하기 때문에 한 번 아래에 처박힌 존재들이 다시 지상으로 빠져나올 일은 없었다.
매 층마다 체크포인트라는 소규모 방벽이 존재하며, 가드가 무기를 들고 지킬 수 있는 초소부터, 일부 시스템을 직접 조작할 수 있는 시스템 제어실도 있다.
작정하고 손쓰기 시작하면 아무리 대단한 침식 현상이라도 시설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은 불가능한데, 이는 근본적으로 시설의 구조 때문이라는 얘기도 많았다.
시설이 몇 층 안 되는 구조였다면 모를까, 기본 수 십층에 달하는 지하 시설이었으니, 힘들게 올라와도 금세 지상에서 내려온 진압 병력에 의해 다시 가로막힌다.
즉 지상에서 기동타격대가 도착하기 전, 그러니까 코드 오렌지가 발령된지 10분 안에 시설을 탈출해야만 ES에게도 비로소 자유가 허락되는 것이다.
가드의 존재란 단 10분을 벌기 위한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가드가 단 10분도 벌지 못 할 만큼 ES가 대규모로 탈출을 감행하거나, 혹은 너무나도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단일개체가 날뛸 시, 시설은 어쩔 수 없이 자폭 프로토콜을 감행한다.
10분이란 시간을 벌지 못 한다면, 3분으로 단축시킨 뒤 설치해둔 핵폭탄으로 모조리 쓸어버리는 것이다.
다만 최후의 수단은 ES가 반드시 중간거점의 게이트를 넘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다. 어찌됐건 중간 거점만 단단히 틀어막으면 진압 병력의 도움을 받아 ES들의 탈주를 저지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ES가 성실하게 게이트의 감지 센서를 지나지 않고, 다른 수단으로 게이트를 뛰어넘는다면 어떻게 될까?
고두식은 자신의 타격대원 보안 카드를 이용해 중간거점의 게이트를 열었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참담한 광경에 말을 잇지 못 했다.
중간거점의 게이트는 오래 전에 생긴 흠집이나 말라붙은 핏자국 따위를 제외하면 별 다른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그 너머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할 감마 부대의 대원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이게 무슨......!"
현장 지휘관의 명령은 상층부에서 내려오는 높으신 분들의 명령보다 우선시 되는 경우가 많다.
ES와 관련된 일은 대원 모두의 목숨을 비롯해, 인근의 민간인들까지도 위험에 처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현장 지휘관의 권한이 일시적으로 상향 조정되는 것이다.
정식 보안 등급은 2급이지만, 작전 수행중일 때는 우스갯소리로 1.5급이라는 말이 대원들 사이에서 나돌 정도였다.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기동타격대 대원들이 존 소령의 대기 명령을 무시하고 현장에서 이탈했을리가 없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다.
때문에 고두식은 지면 곳곳에 뚫려있는 커다란 구멍 수 십개를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위에서 굴착기를 이용해 판 구멍이 아니었다. 그런 구멍이었다면 구멍의 외곽이 좀 더 크고, 먼지로 더러웠겠지.
마치 아래에서 무언가가 위로 치고 올라온 것 처럼, 거칠게 파괴되어 있는 구멍들 투성이였다.
"안돼!!"
고두식이 침음을 흘리며 구멍을 조사하고 있을 때, 그에게 이끌려 온 가드-079가 자지러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깜짝 놀란 그가 돌아보니, 가드-079는 무수한 구멍들을 앞에 두고 절망하고 있었다.
"이렇게 어질러져 있으면 내가 다 치워야 하잖아!"
"......"
확실히 시설 내부의 기본적인 청결 및 시스템 점검은 가드의 업무였다. 특히 몇몇 시설에서 보관중인 ES들은 이상한 체액이나 오물을 내뿜는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그걸 치워줘야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 참사는 어딜 어떻게 봐도 누가 일부러 어지른 수준이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테러에 가까웠다.
'아무리 시설 전체에 방음 처리가 잘 되어 있다고 하지만, 소음은 커녕 진동조차 느끼지 못 했다. 대체 이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만한 규모의 구멍이 뚫릴 정도라면 작은 진동 정도는 느껴야 정상이다. 그런데 이 곳에 도착할 때 까지 진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문득 소름이 돋은 고두식은 아직 아래에 있을 부대원들에게 무전을 쳤다.
"...젠장!"
몇 번이고 자신의 관등성명을 밝히며 무전을 날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오히려 지직거리는 노이즈만이 귀를 거슬리게 했다.
자신들이 놓친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에 고두식의 움직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만약 아래에서 ES 6-01이 탈출한 것이라면?
제 6 처리시설에 반 영구적으로 가둬두고, 모든 인류가 전뇌세계로 무사히 이주했을 때 일시에 핵을 터뜨려서 땅 속에 묻어버리겠다던 그 괴물놈.
놈이 날뛰었다면 존 소령을 비롯해서 최정예 대원들이 침묵하고 있는 것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대원들을 모두 처리했다면 어째서 자신들을 쫓아 중간거점으로 올라오지 않는 것일까? 이 시간이라면 벌써 인간 수 십명 따윈 모조리 도륙내버리고 뒤쫓아 오고도 남았다.
'놈은 굉장히 굶주려 있었으니 느긋하게 식사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 이 틈에 나라도 먼저 나가야 해!'
졸지에 존경스러운 현장 지휘관과 소중한 동료들을 잃어버렸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TF에 소속된 자들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그르쳐선 안 된다고 교육 받았다.
당장이라도 총을 들고 내려가 놈에게 한 방 먹이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았다.
애당초 자신들에겐 가드-079를 생포해서 데려오라는 중요한 임무를 맡지 않았나.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항상 이런식으로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는 법이다.
"가드-079, 현재 이 시설은 매우 위험한 상태다. 우선 우리부터 먼저 탈출할테니 잘 따라와라."
고두식의 말에 가드-079는 초소 안에 설치되어 있는 디지털 시계를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야간 근무 시간인데요."
"...쯧! 네 직위는 이미 박탈된거나 다름 없어! 아니면 이런 상황에서도 말장난을 하고 싶은 거냐? 혼구멍이 나봐야 정신을 차리겠어?!"
고두식이 총구 끝으로 그의 가슴팍을 쿡쿡 찔러대며 반 협박조로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군인이 이런식으로 나오면 금세 자세를 낮추고 최대한 협조한다. 상대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어도, 무의식적으로 폭력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드-079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근무시간외라면 모를까, 근무중일 때 근무지를 이탈하면 안 되죠. 메뉴얼에도 쓰여 있었는데요."
"이 개새끼가 진짜!"
참다 못한 고두식이 펄스 라이플의 개머리판을 휘두르려는 찰나, 아래에서 치고 올라온 무언가가 그의 팔을 잡아 끌었다.
그건 매우 질기고 굵은 덩쿨이었다.
"어......?"
착! 착! 착!
주변의 구멍들 속에서 차례대로 튀어나온 크고 작은 덩굴들이 채찍처럼 날아들어 고두식의 몸을 붙잡았다.
그가 무어라 외치려던 순간, 절묘한 타이밍에 또 하나의 덩쿨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도, 도와줘!'
눈 앞의 청년에게 도와달라고 외치려 했으나, 덩쿨은 악독하게도 그의 몸을 가장 큰 구멍 속으로 이끌었다.
결국 그는 외마디 비명도 내지르지 못 한 채, 어두컴컴한 구멍 속으로 빠르게 끌려들어갔다.
순식간에 눈 앞에서 사라져버린 고두식의 모습에 호국은 깜짝 놀랐다.
누가 가드인 자신에게 엿 먹어보라며 일부러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난장판이 아니었던 것이다.
"천연 미끄럼틀이라고......?"
누군가 떨어뜨린 손전등을 주워들어 구멍 아래를 비춰보니, 매끄럽게 파여있는 구멍은 콘크리트와 강철 합판 등으로 구성된 워터 슬라이드와 매우 흡사한 형태를 띄고 있었다.
어렸을 적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방문했던 옛 시대의 유적 중 하나인 워터 파크. 그 곳에서 질리도록 탔던 워터 슬라이드가 지금 이 곳에, 수 십개나 생성되어 있었다.
물만 흐르지 않았다 싶을 뿐이지, 거적데기 같은 것으로 몸을 잘 감싼다면 꽤 안정적으로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전 고두식 하사를 안전장치 처럼 감싸고 아래로 내려갔던 그 덩쿨들처럼.
"내 차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맞겠지?"
고두식 하사가 신나게 타고 내려갔으니 머지않아 덩쿨이 다시 올라올 터. 이번에는 자신이 타겠노라 마음먹으며 호국은 얌전히 초소 앞에서 기다렸다.
그러다 체내에서 들려오는 천둥번개 소리에 무심코 배를 움켜쥐었다.
'생각해보니 라면 먹다가 끌려왔어!'
그것도 아직 한 젓가락 밖에 먹지 못 했다. 이미 시간이 꽤 흘렀으니 국물은 죄다 마르고, 면은 퉁퉁 불어서 먹지도 못할 것이다.
아쉬운대로 주변을 살핀 호국은 대체 누가 갖다놨는지도 모를 커다란 보급 박스가 한 쪽에 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보급박스의 중앙에 큼지막한 TF 로고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태스크 포스 측에서 준비해준 것이 분명했다.
"캬, 역시 굶어 죽으란 법은 없다니까."
자신에게 일감을 몰아주던 행보관도 곧잘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열심히만 하면 어디 가서 굶어죽을 일은 없겠다고.
게다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장비도 죄다 빼앗겼던 호국은 조금 전 부터 쌀쌀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 시설은 생활 구역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선선한 기온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팔티에 반바지 차림은 조금 으슬으슬했다. 춥고 배고픈 것 만큼이나 서러운 것도 없다.
"입을 거, 먹을 거, 입을 거, 먹을 거."
의식주에서 의식만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는 인간.
다행히 호국은 생존 본능에 매우 충실했고, 보급 상자에서 찾아낸 기동타격대 대원 전용 장비들을 꺼내 입었다.
척봐도 무겁고 커다란 슈트는 입는 것 만으로도 귀찮아서 적당히 군복에 방탄복만 걸쳤다.
가드 전용의 구닥다리 장비에 비하면 조금 더 세련된 느낌이 들었는데, 특히 가슴팍에 스마트 패드와 무전기를 꽂아둘 수 있는 주머니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학창시절, 잘 사는 집의 범생이들이 곧잘 필기용 스마트 패드와 터치 펜을 가지고 다니던 모습이 떠올랐다.
방탄판처럼 스마트 패드를 끼우고, 터치 펜은 손목의 밴드에 꽂아두자 자신도 공부 깨나 할 것 같은 범생이처럼 느껴졌다.
보급상자에는 그밖에도 여러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가령 끈만 당기면 알아서 조리가 되는 즉석 전투 식량부터, 물을 넣고 흔들면 더럽게 달달한 음료수가 되는 캡슐, 어떤 장소에서도 제 집처럼 아늑함을 느끼게 해주는 압축 포장 침낭까지.
호국이 미처 준비하지 못 했던 온갖 생활용품과 보조 식량들이 한가득 있었다. 이정도라면 혼자서 몇 개월은 버틸 수 있을 양이었다.
"쩝, 쩝. 빨리 내 차례 안 오나......?"
열량 가득, 당분 가득, 하지만 양은 쥐꼬리만한 초코바를 까먹으며 호국은 묵묵히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어서 덩쿨이 올라와 자신도 미끄럼틀을 타게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야간 근무가 끝날 때 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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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