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16화 (16/209)

off the record : #1

FCD. 파이널 카운트 다운이라 불리우는 TF 재단 내 최고의 권력자 집단.

이 집단의 주요 구성원들은 강대국(선진국 포함)의 지도자들이거나, 글로벌 대기업의 총수, 혹은 TF에 직, 간접적인 도움을 주는 유용한 세력들의 수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밖에도 TF의 최초 설립자를 비롯해 소수의 최고위원회 인원들이 포함되어 있기에, 그 인원은 자그마치 50명에 달한다.

단 50명의 인간들이 TF를 비롯해 전 세계 위에 군림하여 하는 일은 생각만큼 단순한 것들이 아니었다.

일반인의 입장에서 보면 아래에서 올라오는 각종 보고서들을 보고 결재를 하거나, 그럴듯한 명령을 내리면 되는 게 아니냐고 비아냥 거릴 수도 있다.

실제로 높은 직위의 인간들은 철저하게 '갑'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전체를 파악하고 명령을 내리는 모습들을 자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FCD에 속한 이들은 대부분 그 자리를 원해서 얻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FCD에서 탈퇴하고 싶을 만큼, FCD의 자리는 가시방석 그 자체였다.

"솔직히 말해서 좀 무섭군."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존재가 또 하나 등장했어. 빌어먹을!"

"약물 치료로 겨우 트라우마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건만, 또 다시 내 속을 메스껍게 하는군. 이 늙은이의 위장을 생각해주는 착한 친구는 아무도 없는 건가?"

"이제 어쩔 겁니까? 지금까지 TF에서 통제하지 못한 수많은 ES들의 자료를 봐왔지만, 이번 사태는 감조차 잡히질 않습니다만."

FCD의 명찰을 달고 있는 남녀노소로 이루어진 집단이 마치 국회를 연상케 하는 넓은 강당에서 각자의 의석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필요할 때 마다 마이크의 버튼을 눌러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했지만, 정작 의견을 피력한다고 한들 이 사태를 어찌 해보려는 해결책을 마련하지는 못 했다.

애시당초 그들은 TF(고문재단)와 ES(침식 현상)를 알아야만 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무지몽매한 절대다수의 민간인들에 비해, 세계를 선도하는 그들은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에 대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래서 평생 외계인은 커녕 신조차 믿지 않았던 무신론자가 FCD의 자리에 강제로 앉혀지면서 신을 찾는 일이 일어났다.

이 세상은 인간의 것이며, 언젠가 인간이 기술의 특이점을 완전히 돌파하면 전 우주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 굳게 믿고 있던 인간우월주의자는 낙심에 빠졌다.

돈! 돈만 있으면 이 세상에선 뭐든 할 수 있을거라던 호탕한 자본주의자는 자신이 가진 숫자들 따윈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두 FCD가 되면서 ES의 존재, 그리고 ES가 이 세계에 미치는 영향들을 파악하고 난 뒤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깊은 절망을 맛보고 있었다. 단지 인류를 대표하는 높은 신분의 인간들이라는 이유 만으로.

"안 그래도 지금 터진 문제가 한 두가지가 아닌데, 그 골칫덩어리 처리시설에서 기동타격대 대원 60명과 현장 지휘관 1명을 허무하게 잃었다? 지금 우리랑 장난하자는 겁니까?!"

"그들을 훈련시키고, 세뇌 교육과 각종 지원을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데...이런 식으로 인재를 소모해버리면 우리라도 감당하기 힘듭니다."

"옳소! 단지 의무만으로 이 자리에 앉혀진 것도 억울한데, 우리가 제공하는 각종 지원들을 헛되이 쓰고 있는 건 용납하기 힘들군. 위원회 측에선 확실한 대책을 마련하든가, 아니면 그냥 저 시설 자체를 완전 폐쇄 하십시오!!"

손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으며 목이 터져라 고함을 치는 뚱뚱한 남자는 현재 안드로이드 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ROBOTIX'의 CEO인 햄 머링이었다.

로보틱스 사의 안드로이드가 아니었다면 인간들을 효율적으로 대체하는 자동화 산업 대부분은 실패로 돌아갔을 거라는 말이 있을 만큼, 로보틱스가 현대 사회에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매우 컸다.

안드로이드는 공업용, 군사용, 생활용을 제외하고도 TF 전용의 특수임무용 모델이 따로 존재했다.

아무래도 인간들의 힘만으로는 ES를 완벽하게 제압하는 것도, 처리하는 것도 힘들기 때문에 기계의 힘을 빌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FCD 내에서도 햄 머링의 발언권은 결코 작지 않았는데, 그가 들고 일어나기가 무섭게 다른 FCD 의원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다들 이 끔찍한 현실과 마주하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다.

인간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인간보다 더 대단한 존재들이 가득한 세상이라니. 그리고 그 세상은 끝없이 반복되는 무한굴레의 지옥이라니.

마치 우주의 거대한 비밀(실체)을 깨닫고 자살하는 천문학자들처럼, 그들도 이 비정한 현실에서 벗어나고픈 생각 뿐이었다.

그게 불가능하니까 하다못해 해결이라도 해보라면서 TF측을 마구 비난하는 것이지만.

"자자, 진정해주십시오. 우선 가드-079에 대해서는 우리 위원회에서도 제 1 연구시설의 수석 과학자들과 함께 면밀하게 분석하고, 토론해보았습니다."

"결과만 말하시오, 결과만!"

"좋습니다. 결과만 말하자면 가드-079는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반인이 맞습니다."

헛소리! 사기꾼들! 무능한 것들!

여기저기서 비난과 비아냥이 빗발처럼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TF의 최고위원회중 1인인 제임스 마커는 그것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손을 들어 좌중에게 침묵을 요구했다. FCD가 의무뿐인 자리라면 위원회는 의무와 권력을 함께 가지고 있는 소수 집단이었다.

"여러분의 심정도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조사 결과 가드-079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반인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특별한 집안 내력도 없으며, 기억력이 조금 좋다는 것 외엔 이렇다 할 만한 특이사항도 없습니다. 뛰어난 신체 능력?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초능력? 모두 없습니다. 그럼 인간의 탈을 쓴 ES가 아니냐는 질문이 나올 수도 있겠는데...이것 역시 아닙니다. 우리는 가드-079의 특이점을 찾기 위해 수 천 명의 직원들을 동원해서 23년 간의 CCTV 기록들을 모두 확인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병원에서 무사히 태어난 인간의 아기였으며, 부모의 손에 평범하게 자랐고, 평범하게 컸습니다. 무언가가 개입한 흔적도 없고, 스스로 변화한 징후를 보인 적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보다 더 완벽하게 인간다운 인간이 존재하는지도 의문스러울 만큼 인간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니까 더 말이 안 되는 거 아니오? 현존하는 인간들 중에 보안등급 3급 이상의 ES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살아남은 인간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우리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지금까지 없었을 뿐, 그가 첫 번째 특이 케이스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헛소리! ES에겐 그런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소!!"

제임스 마커는 그의 말에 마냥 반박할 수만은 없는 자신의 처지에 속으로 한탄했다.

자신의 말도 틀린 건 아니지만, 상대의 말도 틀린 게 아니었다. 가드-079가 인류 역사상 첫 번째 특이 케이스일 수는 있다.

하지만 동시에 ES에겐 인간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미 무수히 진행된 각종 실험과 민간인 피해 사례들을 통해 증명되어 있다.

서로서로 증명을 해버린 상황이기 때문에 맞물리 수 없는 논리.

가드-079를 단순히 첫 번째 특이 케이스로 취급하기엔 어폐가 있고, 그렇다고 특이 케이스가 아니라고 하자니 그가 특별한 존재라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다.

하다못해 그가 사실은 인간이 아니라거나, 혹은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는 게 증명이 된다면 '가드-079는 사실 일반인이 아니었습니다!' 하면서 모두 사이좋게 하하호호 웃을 수 있으리라.

'그럼 그렇지!' 하고 결론을 내린다음 다 같이 스테이크를 썰고, 골프나 치러 갔을 것이다.

그게 아니니까 더 열받고 황당한 것이다.

"혹시 가드-079는 인간으로써 가져야 할 특정 감정들이 결여되어 있는 건 아닌가요?"

한 50대 여성이 자신의 마이크를 켜서 난데없는 의혹을 던졌다.

그녀는 사회심리학을 전공했던 전직 교수이자, 현직 독일의 대통령이었다. 세간에선 심리학의 귀재라느니, 외교 천재라느니 온갖 사탕발림이 시도때도 없이 오르내리는 인물이기도 했다.

세간에서 보여주는 모습 모두 FCD 에서 짜고치는 것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그녀가 사회심리학을 전공했던 것은 틀림없었다.

"보고서와 함께 제출된 녹화 영상들을 보니 의문점이 몇 개인가 있더군요. 무장을 한 인간들이 자신을 위협해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으며, 알 수 없는 약물을 주입당해도 저항은 커녕 온순하게 받아들였어요. 심지어 눈 앞에서 ES 6-04에 의해 사람이 납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죠. 이건 아무리 사고 능력이 낮은 인간이라고 해도 좀처럼 보기 힘들어요."

예를 들어 지적장애를 심하게 앓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낯선 이들이 자신을 거칠게 다룬다거나, 위협하면 본능적으로 크게 움츠러들거나 발광한다. 특히 몸의 자유를 억압하려들면 거칠게 저항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하지만 가드-079는 비록 IQ가 84일지라도 평범하게 사회 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지식과 상식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감정이 매우 풍부했으며, 인지 능력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그런 반응을 보여준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말이 되지 않았다. 그건 머리가 나쁘고 말고와는 관계없는 문제였다.

물론 제임스 마커와 함께 한 수석 연구원들도 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결론은 '문제없다'로 나왔었다.

그가 정말로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당연한 반응이라는 결과가 나왔으니, 요컨대 가드-079의 사고 방식이 좀 뒤틀려있을지언정, 문제는 없다는 것이었다.

"가드-079가 사이코패스였다느니, 감정 조절이 안 되는 장애를 가지고 있다느니 같은 진료기록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냥...심하게 낙천적인겁니다."

"낙천적이라는 말 한 마디로 그 기행들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요?"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때묻지 않은 순수한 아이들이 맹수가 위험하다는 사실도 모르고 접근하듯, 그 역시 ES나 기동타격대 대원들을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은 겁니다."

ES에게 공격당한 적도 없고, 기동타격대에게 두들겨 맞지도 않았다. 자백제를 이용한 강압적인 심문 행위는 있었지만 그것 역시 가드-079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주진 않았었다.

그러니까 그는 모든 것을 낙천적으로 받아들이고, 일종의 놀이나 가벼운 농담쯤으로 여겼을 확률이 높았다.

"어렵군요. 내 평생 그런 인간은 정말 처음 봅니다. 시설 경비인 이상 ES에 대해 모를리도 없을 텐데......"

"어쩌면...아니, 아닙니다. 본 회의는 이만 종료하겠습니다. 기동타격대 대원들을 헛되이 희생시킨 것에 대해 최고위원회 측에선 유감을 표합니다. 또한 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게끔 만전을 기할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쯧, 그런 말도 한 두 번이어야지......"

"일단 두고봅시다. 그래도 TF에서 노력을 안 하는 건 아니니까."

"에잇, 오늘도 시간만 버렸군."

회의가 폐정되었음을 알리자 FCD 의원들은 하나둘씩 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모두 로그아웃해버린 것이다.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들 답게 너무 바빠서 가상현실에 잠깐 머무르는 것 마저도 꺼려하는군. 이 좋은 공간에 있는 것도 마다하다니......"

"어차피 뇌를 속이고 있을 뿐인 가짜 세상 아닙니까. 영혼과 기억이 함께 진짜 전뇌세계로 이동한다면 모를까, 이 가상현실은 아직도 미완성입니다."

"그래도 이 곳에선 현실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으니 편하지 않은가. 늙고 병든 인간이 가상현실에선 어디 아픈 데 하나 없이 신의 자리도 넘볼 수 있다니, 이보다 더 완벽한 세상이 어디 있겠나."

"진짜 완벽한 세상에 가기 위해 지금도 과학자들은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감탄은 그 세계가 완성되었을 때 하십시오."

제임스 마커는 자신과 같은 위원회 소속인 노인에게 작은 핀잔을 주었다.

그는 전직 미국 대통령이었으며, TF의 최초창립자를 도와 TF를 창립한 일등공신이었다. 덕분에 지금은 온갖 기계를 달고 살면서도, 자신의 진짜 영생과 인류의 안녕을 위해 TF에 봉사하고 있었다.

물론 가상현실 속에서만.

"그보다 조금 전에 무언가 말하려 했던 것 같은데. 역시 그건가?"

그가 의미심장한 어조로 되물었다. 제임스 마커가 그 정보를 알고 있듯, 그 역시 모를리가 없었다.

"예. 가드-079, 그러니까 김호국은 태어날 때 부터 특이체질 때문에 가상현실에 접속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현존하는 가상현실 체험기와 그의 뇌가 맞지 않아서라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어쩌면 그것이 그의 이상한 사고방식이나 가치관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가짜 세상에 처박혀 있는데, 혼자 진짜 세상에 남아 있었을테지. 함께 놀고, 즐겁게 대화하며, 진심으로 어울려주는 친구를 만들지도 못 했을 걸세."

"그 때문에 위험하기 짝이 없는 ES도, 자신을 위협했던 기동타격대도 단순히 함께 어울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대상으로 봤을 겁니다."

"친구가 되고 싶으니까?"

"혼자 남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 거라고 추측만 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극도의 단절화로 나아가고 있다.

여전히 인류는 현실에서 무언가를 즐기지만, 가상현실에선 더 많은 것을 더 자유롭게, 더 즐겁게 즐길 수 있었다.

그러니 다들 가상현실로 기어들어가버리고, 현실에 무언가를 남겨두는 것이다.

TF에선 의도대로 되고 있다며 좋아라 하지만, 김호국 같은 이들에겐 지옥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모두가 자신만 두고 떠나버리는 것 만큼이나 슬픈 일도 없을 테니까.

"우선 좀 더 그를 지켜볼 생각입니다. 만약 정말로 위험한 존재라면, 그땐 이 쪽에서 원격으로 제 6 처리시설을 완전 폐쇄해버리면 그만입니다."

"나같은 늙은이 보다야 젊은 자네의 감이 잘 맞겠지. 열심히 하게."

"...같은 위원회인데 좀 도와주시면 안 됩니까?"

"그건 힘들겠군. 오늘 아이어에서 혼돈의 파괴 군주를 레이드 하기로 했거든."

익살스럽게 대꾸한 노인은 다른 가상 현실로 튀어버렸다.

"후우, 저런 양반들이 과거에 아이들보고 게임 중독이 위험하다고 지껄였다니......"

아무리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세월이 흘러도 내로남불 문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

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