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 업무 일지 : 2일째(9)
자기가 꺼낸 폭탄에 자기가 당황하고, 그걸 남이 해결해주니 안도하는 꼴이라니. 일반인이 그랬다면 상당히 이상하게 보였겠지만, 상대가 전형적인 마술사라 과장된 움직임으로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연출했다.
얼떨결에 관객이 되었지만 이 또한 방의 안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일환으로 여긴 호국은 힘찬 박수를 보내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IQ 84의 머리로 마술사가 어떻게 자신이 본 카드를 맞췄는지, 그 카드에 그려진 그림을 실물로 만들어냈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마술은 마법이 아니라 속임수라고 배웠다. 즉 상대는 처음부터 모자 속에 폭탄을 준비해뒀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준비했는지를 모르겠다니까.'
속임수는 들키지만 않으면 기술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관객에게 반드시 마술의 트릭을 들켜선 안 된다는 얘기인데, 상대는 그 철칙을 잘 지켰다.
호국이 폭탄에 대해 관심을 끄도록, 금세 새로운 마술을 이어나가면서 신경을 돌려버린 것이다.
다음 마술은 놀랍게도 지팡이 하나로만 행하는 지팡이 마술이었다. 보통 지팡이 마술의 결과물은 뻔하디 뻔한 것이 많아, 호국도 몇 개인가 래퍼토리를 외워두고 있었다.
'보나마나 지팡이 끝에서 각양각색의 손수건들이 튀어나오거나, 아니면 지팡이를 삼켜서 감쪽같이 사라지게 만드는 마술을 하겠지.'
언뜻 난이도가 어려워보이지만, 특수 제작한 지팡이라면 얼마든지 그런 마술들을 행할 수 있었다. 프로의 빠른 손놀림과 시선 유도법은 따로 배워야겠지만, 일단 트릭만 알고 있다면 초심자라도 할 수 있는 마술이었다.
마술은 이제와선 시대에 뒤쳐진 트릭 연극에 불과하지만, 한창 유행할 때에도 누구나 알고 있는 과학 상식을 이용하거나, 첨단 기술이 들어간 도구를 이용해서 관객을 놀라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까운 문화 컨텐츠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사이, 마술사는 지팡이로 바닥을 몇 번 두들기면서 시선 유도를 하며 반대쪽 손에서 흰 손수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손수건을 아래로 축 늘어뜨린 뒤, 지팡이의 위를 덮듯이 떨어뜨렸다.
마술사가 재빨리 손을 잡아 빼고, 손수건은 중력에 몸을 맡긴 채 지팡이를 집어삼키며 아래로 떨어졌다.
어딜 어떻게 봐도 지팡이가 손수건에 먹혀 완전히 모습을 감춘 것처럼 보였다.
'바닥 아래로 꺼졌나? 하지만 그랬다면 지팡이가 먼저 떨어졌을 거야.'
손수건이 지팡이를 덮기 직전에 마술사가 손을 놨으니, 고정되지 않은 지팡이가 먼저 아래로 떨어지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손수건이 지팡이를 뒤덮은 채 속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떨어졌기에, 이는 모순되는 과정이었다.
호국이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미친듯이 회전시키는 동안 마술사는 어깨를 들썩이며 손수건 앞에 바짝 엎드렸다.
책으로 때려잡은 바퀴벌레의 잔해를 확인하는 것 처럼, 그는 장갑을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집게를 만들어 손수건을 살포시 집었다.
지팡이 하나를 통째로 삼킨 것 치고 손수건은 너무나도 쉽게 딸려올라왔다.
손수건의 앞뒤를 번갈아 뒤집어 가며 그 어떤 흔적도, 장치도 없음을 확인시켜준 마술사는 손수건을 곱게 접어 호국에게 건네주었다.
'마술사에게 받은 물건은 반드시 확인해보라는 말이 있었지.'
조금 재미없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마술사가 관객에게 건네주는 물건엔 십중팔구 트릭이 있기 때문에 미리 확인하는 것도 마술을 즐기는 자세 중 하나였다.
어떻게든 숨겨진 트릭을 찾기 위해 꼼꼼이 확인하는 관객의 반응을 보고 즐거워하는 마술사도 있기 때문이다.
몇 겹으로 포개어져 있던 손수건을 펼치자, 놀랍게도 조금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아기자기한 그림이 손수건에 그려져 있었다.
'마술사와 모자를 쓴 토끼, 그리고 '?' 마크가 새겨진 상자와 바니걸 복장을 한 여자?'
언뜻 보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메시지 같지만, 조금만 생각을 달리 해봐도 마술사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넓은 강단 위에 도우미도, 그럴싸한 시선 유도용 바람잡이도, 마술사 특유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도구도 없는 마술사. 홀로 무대 위에서 짧막한 마술을 선보이는 그는 무척이나 외로워보였다.
실제로 당사자 역시 호국의 앞에서 가면의 웃는 얼굴 부분만 손으로 가린 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필시 동료와 함께하지 못해 슬프다는 의미였다.
한낱 젓가락에도 짝이 있는데, 하물며 수많은 관객들 앞에서 최고의 트릭 쇼를 선보여야 하는 마술사에게 동료들이 없다니. 무심코 눈물이 흐를 것 같은 얘기다.
"잠깐 기다려보세요."
받은 건 받은거니까 손수건은 앞주머니에 넣고, 호국은 그 길로 6-31의 방을 나와 나머지 방들을 차례차례 들렀다.
6-31-1에서 발견한 것은 소파 위에 누워 엉덩이를 벅벅 긁으며 TV를 보고 있는 바니걸이었다.
6-31-2에선 담배를 태우고 있는 모자 쓴 토끼, 그 옆방에선 덮개가 열려있는 텅 빈 '?' 박스를 발견했다.
마치 용사가 마왕에게 맞서기 위해 성유물을 하나하나 모으는 것 처럼 마술사의 동료들을 긁어모은 호국은 죄다 6-31의 방에 밀어넣었다.
호국은 1인 마술을 해도 귀신같은 실력을 보여준 마술사가 동료들과 함께라면 얼마나 더 대단한 마술을 선보일지 기대했다. 요즘 같은 시대엔 돈주고 보고싶어도 못 보는 마술쇼가 아닌가.
불과 5m도 떨어져 있지 않은 방에 있었으면서 수십년 만에 상봉한 이산가족마냥 얼싸안고 기뻐하는 모습은 꽤 감동적이었다.
후줄근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던 바니걸은 무대 뒤로 돌아가 전용 복장으로 갈아입었으며, 토끼는 피우던 담배를 거칠게 씹어먹곤, 헝클어진 자신의 털을 세심하게 핥아서 정리했다.
'?' 박스는 어느새인가 덮개가 닫힌 채 무대 위에서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다.
지하 수백 미터 아래에서 진짜 마술쇼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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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극동지역에 위치한 제 4 연구시설은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의 지하에 자리잡고 있었다.
매일 같이 항구를 통해 들어오는 목격자와 ES를 실은 배가 들어오거나 나갔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일본과 미국 만큼이나 활발하게 ES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러시아 과학자들은 짙은 다크써클을 자랑했다.
지난 십수년 간 쌓아온 연구 데이터나 지식이 방대하다고 한들, 지하에서 끔찍한 존재들을 가지고 연구만 하다보면 사람이 피폐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런 그들도 최근에는 이 지하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여흥을 하나 발견했는데, 바로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존재하는 제 6 처리시설의 내부 실시간 중계 관람이었다.
"저건 저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렇지. 저러면 안 되는거지."
보드카나 커피를 홀짝이며 회의실에 모여앉은 연구원들은 테이블 중앙에 두 개의 박스를 두고 크레딧 카드를 잔뜩 쌓아두었다.
가드-079가 새로운 구역에 진입할 때 마다 죽는다, 죽지 않는다로 내기를 하기 위해 마련된 판돈 박스였다.
가드-079가 새로운 구역에 진입하고도 무사히 살아남아 다른 구역으로 이동한다면 죽지 않는다에 건 사람들이 승리한다. 그리고 죽는다에 건 사람들이 냈던 크레딧 카드를 이용해 지하 마트에서 술과 간식거리를 잔뜩 구입해서 소소한 축하 파티를 벌이곤 했다.
현재 스코어는 죽지 않는다 쪽이 세 번 연속 이긴 상황이었다.
"보라고. 이번엔 틀림없이 죽을 거라니까? 저 괴물놈들을 한 자리에 모았으니 이제 저 놈은 진짜 '관객'이 된 거라고!"
"그렇지. 관객이 되면 절대로 놈들의 마술쇼에서 벗어날 수 없어. 너흰 세 번이나 이겼지만, 이번엔 우리가 이기겠는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기겠구만."
킬킬대는 '죽는다' 팀의 반응에 '죽지 않는다' 팀도 이번 만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암묵적인 동의를 표했다.
가드-079는 지금까지 말도 안 되는 행운으로 어찌어찌 살아남았다지만, 2급 보안등급에 해당하는 '트릭없는 마술사' 에게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트릭없는 마술사는 과거 10년 전쯤, 마술이라는 문화 컨텐츠의 명맥이 서서히 끊어지기 시작할 때에 혜성처럼 등장한 신생 마술쇼 팀이었다.
아직 가상현실에 익숙해지지 않은 인류는 여전히 거리에서 선보이는 버스킹(Busking)이나, 춤, 마술쇼를 여전히 즐기고 있었다.
그때 여느 마술쇼 팀과 다를 바 없이 갑작스럽게 거리 한복판에서 마술쇼를 시작한 그들은, 쇼가 시작된지 불과 1시간 만에 수 만 명에 달하는 인간들을 학살해버렸다.
일단 관객으로 지정된 인간들은 모두 트릭없는 마술사 팀 앞에 모여 관객 흉내를 내게 되었으며, 가면을 쓴 마술사는 실제로 폭탄을 만들어내거나, 칼을 휘둘러서 움직이지 못 하는 관객들을 죽여버렸다.
브라질의 한 도시에서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TF가 반응하는 것이 조금 늦을 수 밖에 없었는데,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한 놈들은 유유히 비행기를 '꺼내서' 탈출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글로벌 학살범들을 잡기 위해 TF는 모든 군사적 옵션을 동원했다.
결국 수 년 간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의 결과는 TF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놈들이 세계 각지를 돌면서 마술쇼라는 이름의 학살극을 벌인 횟수만 무려 두 자릿수에 달했다.
"저것 봐. 가드-079도 꼼짝을 못 하잖아. 이미 관객이 된 거라고."
"운 좋은 멍청이도 오늘이 제삿날이군. 상층부에서도 알고 있으려나?"
"최고 위원회에서 특수 권한을 내려줬다는 얘기가 있던데, 무의미한 시도였어. 너무 멍청해서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과 아닌 걸 구분 못하는 놈에게 그딴 권한이 다 무슨 소용이야?"
영상 속에선 벌써 마술사가 지팡이를 칼로 바꾼 참이었다.
저걸로 관객에게 토막 마술을 선보이겠답시고 진짜 토막을 내버리겠지. 아니면 살을 한점 한점 저며내면서 진득하게 고문 시간을 가질 수도 있었다.
"어차피 죽는 건 확정일 것 같은데, 이참에 종목 하나 더 추가하는 게 어때? 가드-079가 얼마나 버티는지 내기해보자고. 난 1시간!"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연구원 한 명이 자신의 크레딧 카드를 꺼내 던지면서 먼저 스타트를 끊었다.
그러자 다른 연구원들도 이에 질세라 여분의 크레딧 카드를 던지면서 각자 생각해둔 시간들을 외쳐댔다.
"난 5시간! 저 곳에 몇 년이나 처박혀있던 놈들이 설마 1시간만에 끝내버리겠어?"
"그럼 난 두 배인 10시간! 어차피 자동으로 녹음되고 있으니까 나중에 확인해도 상관없겠지?"
"저 놈들은 사람 하나 잡아 족치는 것 보다 시설에서 빠져나가는 걸 우선시 할 걸? 짧게 30분."
"빠져나가겠다 싶으면 시설 폐쇄 절차를 밟겠지.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니까 나도 30분에 걸지."
대부분 가드-079가 얼마 버티지 못 하고 죽을 거라는 쪽에 힘을 실었다. 실제로 트릭없는 마술사는 짧은 시간에 수만 명을 학살한 전과가 있었기에, 사람 하나 쓱싹하는 건 일도 아닐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연구원들은 법적으로 시설 내에서 가상현실에 접속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놀 거리가 없는 그들은 이 광기로 뒤덮인 내기에 목숨을 걸다시피 달려들고 있었다.
묵묵히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한 연구원이 당혹스러워하는 목소리로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가드-079가 방에서 나가는데?"
"뭐라고?!"
고개를 홱 돌린 도박꾼들이 화면 앞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정말 그의 말대로 가드-079가 방을 빠져나가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뭐지? 분명 관객이 된 것 아니었나?!"
"관객이 된 게 맞아! 저 놈들은 벌써 마술 준비까지 다 끝냈다고."
"저 놈들도 가드-079가 어떻게 빠져나간건지 모르는 눈치인데?"
"가만, 근데 이 새끼 대체 뭘 하는.......?"
영상 속의 가드-079는 무인 편의점에 들러 인스턴트 팝콘과 콜라를 구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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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