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 업무 일지 : 3일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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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이 오전부터 치킨을 시킨 이유는 단순했다. 오늘이 주말이기 때문이다.
"주말에는 비상 대기만 하면 된다니. 참 좋은 직장이야."
달콤한 간장소스와 매콤한 조미료가 가미된 핫간장후라이드 치킨의 날개를 한 입 베어먹으며 호국은 실실 웃었다.
매콤한 것을 좋아하는 6-01 할아버지에겐 핫양념치킨 한 마리를 가져다 드렸고, 평일이든 주말이든 매일 도박에 푹 빠져 있는 카지노의 사람들에겐 파채가 올라간 카레치킨을 한 마리 넘겨주었다.
다들 치킨에 푹 빠져서 행복해했는지라, 큰 마음 먹고 2만 원이나 쓴 보람이 있었다.
과거에는 치킨 한 마리에 2만 원을 넘겼다고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선 자동화 공장 및 산업용 안드로이드의 등장으로 식재료 값이 대폭 하락해, 자연스럽게 외식 가격도 떨어졌다. 족발 대자가 3만 원이었으니 정말 많이 떨어진 것이다.
'부모님이 한창 때일 시절에는 족발 대 자 하나에 기본 5만 원은 했다던데. 그 시대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배달음식을 시켜먹었는지 모르겠다니까.'
분명 다들 돈이 남아도는 금수저였거나, 아니면 블랙말랑카우였을 가능성이 높다.
한 손에 치킨 박스를 든 채, 자신의 일터이자 잠자리 겸 휴식처인 중간거점으로 돌아온 호국은 경비용 책상 앞에 편히 앉았다.
중간거점 바깥에 뚫려있던 구멍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말끔하게 막아버렸다. 덕분에 6-04의 방으로 직행할 수 있는 미끄럼틀을 더이상 탈 수 없게 되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좀 아쉬웠다.
"그건 그렇고, 주말이라 그런지 엄청 한가하네."
너무 한가하다. 점심이 되기 전 부터 치킨이나 뜯고 있을 만큼 한가한 나머지, 호국은 굳이 할 필요도 없는 경비 업무를 해야 하나 진심으로 고민했다.
물론 어리석은 생각은 빠르게 접어버렸다. 주말에 비상 대기를 하고 있는 것 만으로도 이미 어엿한 경비로써 일을 하고 있는 것인데, 힘들게 몸을 움직여가며 또 지하로 내려가서 순찰을 돈다?
아무리 군대의 빡빡한 근무와 훈련에 익숙해져 있던 호국이라고 해도 자진해서 고생하고 싶진 않았다.
고생이란 건 합당한 이유와 정당한 보상이 뒤따를 때에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저 힘들기만할 뿐인 헛고생은 스트레스성 탈모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치킨 무를 몇 조각 집어 와작와작 씹어먹으며, 호국은 지루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스마트 패드를 꺼내들었다.
남들처럼 가상현실에 접속할 수 없는 호국은 항상 스마트 패드로 여가를 보내고, 정보를 찾았다.
남들은 그저 쥐죽은듯이 누워 있기만 해도 뇌를 통해 직빵으로 들어오는 정보의 바다에서 헤엄치는데, 자신은 일일이 손과 눈을 움직여야 했다.
호국은 유명 스트리머들의 가상현실 게임 방송 시청과 웹소설 독서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마침내 '우리 동네 혈마대장' 이라는 유명한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대충 요약하자면 짱쎈 주인공이 악당을 물리친 뒤, 주인공에 의해 목숨을 건진 사람들에게 목숨값인 '혈세(血稅)'를 뜯어내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윽고 수많은 사람들이 주인공에게 구원을 받아, 그의 계산적인 행동과 더불어 피같은 돈을 뜯어내는 영웅이라고 해서 '혈세! 혈세! 혈혈세!' 라고 찬양하는 것이 작품의 컨셉이었다.
오늘 업로드된 최신편에선 가소롭게도 악당들이 혈마가 세운 전통시장에 난입해서 떡볶이 무전취식을 하는 내용으로 시작되었다.
혈마는 전통시장에서 1떡볶이+1튀김 = 2어묵국물을 원칙으로 세워두었기에 과하게 어묵국물을 탐하는 자와 무전취식을 하는 자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때마침 붕어빵 가게 앞에서 부하들에게 갖다줄 붕어빵을 사려던 혈마가 악당들의 행패를 발견하고 놈들을 응징하기 시작했다.
"혈마님 오늘도 일하시네."
혈마라는 이름답게 악당들에게서 떡볶이 국물 만큼이나 진한 핏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특히 한 악당이 예의없게 간장통에 담궜던 어묵 꼬치로 악당의 목젖을 찌를 때는 어마어마한 사이다를 쭉 들이킨 것 같았다. 암, 어묵꼬치를 간장통에 담그는 것 만큼이나 싸가지 없는 것도 없지.
-이제 너에게서 혈세(血稅)를 걷겠다.
-고작 떡볶이좀 먹었을 뿐인데 목숨값을 내라고?!
-그렇다면 그 몸뚱아리에 흐르는 혈(血)로 세(稅)를 대신하겠나?
-조, 좋아! 내지! 낸다고! 얼마나 내면 되는 거냐?!
-5억.
혈마는 포장마차에서 무전취식한 악당들에게 기어이 5억을 뜯었고, 전통시장의 상인들이 모두 발벗고 달려나와 혈세 혈세 혈혈세를 외치는 것으로 끝났다.
참으로 감동적인 이야기다.
다음엔 혈마가 혈마군림보를 쓰면서 세계 맛집 탐방 여행을 나설 것이라는 작가의 예고에 호국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혈마군림보를 사용하며 당당하게 맛집을 찾아가 주문하는 혈마의 모습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대되었다.
우리동네 혈마대장을 제외하고도 호국이 찜해둔 명작들은 많고 많았다. 가상현실에 편히 눌러앉아 글만 쓰는 작가들이 넘쳐났기 때문에, 현실에 홀로 남아있는 호국일지라도 독자가 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러다 나중에 작품 속에 빨려들어가 독자가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은밀한 양반들에게 관음 당하며 후원을 받는 판타지적 상상을 떠올리자 절로 입가가 씰룩였다.
완벽한 가상현실도 존재하는 세상인데, 그런 판타지 같은 상황을 기대하는 것도 그리 허황된 꿈은 아니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주말 특수를 누리며 완전히 풀어진 호국은 이미 뼈만 가득한 치킨 박스를 끌어안은 채 곤히 잠들어버렸다.
밀려있던 웹소설도 잔뜩 읽고,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도 관람하고, 아직 박스 안에 남아있는 치킨 냄새까지 맡고 있으려니 밀려오는 수마를 견디지 못 한 것이다.
아직 군대 물이 덜 빠진 호국은 요령껏 쉴 수 있을 때 쉬어둬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높으신 분들은 아랫것들이 편하게 쉬는 걸 좀 처럼 두고보지만 않으셨고, 각박한 병영 사회에서 황금같은 오침을 받기란 너무나도 힘들었다.
병사가 낮에 몇 시간 자는 게 그리도 아니꼬우신지, 오죽하면 호국은 PX보다 오침을 더 좋아할 정도였다.
시설 경비라는 무거운(?) 책임감을 짊어진 호국이 주말을 이용해 잠깐이나마 의무에서 벗어나, 세상 떠나가는 줄도 모르고 깊이 잠들었다.
관리봇이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그의 트라우마를 자극하기 전까지는.
"겨, 경보 발령! 시발! 환복!!"
반사적으로 튕기듯 일어난 호국은 벽 한 쪽에 걸어두었던 방탄복과 파츠 아머를 후다닥 챙겨입었다. 마지막으로 풀페이스 헬멧을 착용하고 펄스라이플을 손에 쥐었을 때, 이 곳이 군대가 아니란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경보가 가짜인 것은 아니었다.
-코드 오렌지! 코드 오렌지! 현재 시설을 향해 접근중인 신원불명의 인간 다수와 전투용으로 추측되는 미등록 불법 개조 안드로이드 수 대를 포착했습니다. 가드-079는 즉시 메뉴얼에 따라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주십시오.
본래 경보는 B40층 아래에서 울리지 않는다. 이는 어차피 사고가 터지면 죽을 운명인 경비에게 경보를 울려서 시설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부의 문제가 아닌 외부의 문제라면 얘기가 달랐다. 시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시설 경비는 기본적으로 내부에서 사고가 터지지 않게끔 억제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외부에서의 침입으로 인해 시설이 파괴되는 것 역시 방어해야 했다.
차라리 시설을 순수하게 파괴하려는 목적을 지닌 외적이라면 낫다. 그보다 좀 더 끔찍하고 까다로운 외적은 지하 40층 아래에 은폐된 ES들을 노리고 침투하려는 세력이었다.
머리를 아프게 할 정도로 시끄럽게 울리는 경보음과 관리봇의 경고, 그리고 메뉴얼.
3개의 조건이 딱딱 맞아떨어지면서 호국의 머릿속에선 눈부신 스파크가 튀어올랐다.
'적 침입, 시설 방어, 의무!'
가드 메뉴얼엔 ES를 상대로 라면을 먹는다던가, 테이블에 안면을 내려치는 등의 뻘짓을 하지 말라는 경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외적이 침입할 경우에 대비해서 상당한 분량의 행동 강령이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호국은 즉시 보급 상자를 열어 열압력수류탄과 섬광탄을 챙겼다. 교전에 필요한 충분한 수의 탄약을 비롯해서 방탄복 안에 끼워넣는 세라믹 방탄판도 여럿 챙겼다.
세라믹 방탄판은 일단 큰 충격이 가해지면 산산히 부서지기 때문에 즉시 새로운 것으로 교체해야 했다. 파츠 아머로 방호력을 한층 더 높이긴 했지만, 인간의 몸은 여전히 약했다.
"현재 상황을 알려주세요."
헬멧에 부착된 통신기를 통해 관리봇에게 상황 설명을 요구하면서도, 무장을 점검하는 그의 손놀림은 거침이 없었다.
-신원불명의 적대 세력이 처음 포착된 것은 약 20분 전, 신도리 앞바다였습니다. 배를 타고 중간 해역까지 접근한 다음 고속정을 타고 상륙한 것으로 추정되며, 빅 브라더 시스템을 통해 그들은 신원이 인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지 않았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들은 수준 높은 무장을 갖췄으며, 불법 개조한 전투용 안드로이드를 비롯해 적지 않은 양의 짐을 운반하면서 시설을 향해 빠르게 접근 중입니다.
"메뉴얼에 따르면 연구원들의 대피가 끝나는 즉시 시설의 폐쇄에 들어간다고 나와있는데요. 대피 상황은 어떤가요?"
-연구원들은 약 5분 전에 신원불명의 적대세력이 접근하는 방향의 반대편 길목으로 내려보냈습니다. 이런 시대에도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불법체류자나 신용불량자는 존재하기 때문에 저들의 무장이 확인되기 전 까진 TF에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약 10분 전쯤에 무장이 확인되었으므로 즉시 CCTV 영상과 함께 보고를 넣었기에, TF측에서 곧바로 기동타격대를 파견해줄 것입니다.
"예상 시간은요?"
-빨라도 1시간입니다.
끄응, 호국은 옅은 신음성을 흘렸다.
군대에 있었기 때문에 호국은 아군의 지원이란 게 생각보다 빠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선 보고가 들어가면, 상부에선 사실관계 확인을 한다. 그 다음 명령권자의 결재(지휘)를 받아 지원이 확정되고, 지원에 투입되는 병력과 탈 것이 편제된다.
산이 많은 한국에선 보통 수송용 헬기를 많이 쓰지만, 가끔 방호차량이나 장갑차에 병력을 태워 보내기도 한다.
차량 지원은 파견 지역과 병력의 출발 지역간의 거리 및 도로 사정에 따라 도착 시간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반면 수송 헬기를 이용한 지원은 도로 사정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기체 점검으로 자잘하게 시간을 잡아먹는다.
그래도 헬기 지원이 가장 빠르다는 사실에 변함은 없었다.
문제는 제 6 처리시설 가드 메뉴얼에 기재된 '가장 가까운' 기동타격대 기지는 제주도와 제법 거리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관리봇이 보고를 넣자마자 비상사태를 파악한 명령권자가 즉시 명령을 하달하고, 편제된 병력들이 헬기에 올라타서 날아오고 있다고 해도 1시간이나 걸리는 거리.
저 쪽에서 미리 알고 지원을 보내주는 것과, 이 쪽에서 뒤늦게 알아차리고 지원 요청을 하는 것엔 그만한 차이가 있었다.
다행히 연구원들은 모두 대피했고, 시설은 이미 폐쇄 상태에 돌입했다. 호국이 나는 빡빡이다, 를 세 번 외치면 완전 폐쇄에 돌입하곘지만 그건 지금 신경쓸 일이 아니었다.
-제게 일임된 감시 권한은 제주도 지역 일대에 존재하는 CCTV망까지 확대되어 있습니다만, 적대 세력의 교묘한 침투 경로와 고의적으로 무장을 감추는 행위로 인해 파악이 늦었던 것은 명백한 실수였습니다.
"실수는 누구나 해요."
호국 본인도 수많은 실수들을 범했었다.
부모님에게 따끔하게 혼이 나고, 여동생에게 부끄럽다느니, 왜 그런 것도 못 하냐는 구박을 들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지금은 실수를 덜 하게 된 것 뿐.
완벽한 신이 아닌 이상 실수는 만물에게 통용되는 유일한 공통점일 것이다.
모든 무장을 점검한 호국은 자신의 짐을 한데 모았다. 그러자 관리봇이 다루는 기계 팔이 벽에서 튀어나와 짐들을 가져갔다.
준비는 끝났다. 풀페이스 헬멧의 바이저 내부에서 생성된 홀로그램 영상을 확인한 호국은 산 아래에서 빠르게 치고 올라오는 적들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차량 진입 방지턱을 전투용 안드로이드로 박살내버린 그들은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무거운 짐차를 끌고 올라왔다. 허가받지 않은 드론이나 안드로이드의 접근을 저지하기 위해 시설 외부에 설치된 재밍 시스템이 있었지만,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적들이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시스템을 파괴해버렸다.
연구시설과 달리 처리시설은 방어 목적보단 은폐 목적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시설 외부에 별도의 방위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다.
수많은 연구 자료와 귀중한 인재들이 가득한 연구시설은 당연히 기동타격대가 상시 주둔하는 한 편, 방위 시스템도 빵빵했다. 처리시설은 여차하면 핵으로 파괴시켜버릴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이리라.
'내 직장을 박살내게 놔둘 순 없지.'
소설 속 주인공인 혈마도 자신이 세운 전통시장을 어지럽히는 악당들을 응징하며 혈세를 뜯지 않았던가?
호국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호국은 자신의 보안카드를 이용해 중간거점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굳게 닫히는 격벽 너머에서 한껏 폼을 잡았다.
"와바랏!"
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