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 업무 일지 : 야간근무(2)
"할 수 있어, 이홍선!"
B40 구역의 중심을 정확히 반절로 나눈 거대한 성벽같은 게이트. 통칭 중간거점 앞에 선 이홍선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발을 애써 옮기며 주위를 배회했다.
"카드만 가지고 나오면 돼, 카드만. 저 깊숙한 곳에서 빠져나온 놈들이 벌써 위로 치고 올라왔을리가 없잖아? 카드만 슬쩍 가지고 나오면 아무런 문제 없을 거야!"
자기암시를 넘어서 가히 세뇌에 다다른 이홍선의 외침은 중간거점의 벽을 때렸다.
이윽고 각오가 선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자신의 보안 카드로 중간거점의 게이트를 열었다.
아무리 특별한 상황이라도 일반적으로 연구원은 TF 산하의 시설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
물론 연구 시설의 경우 특정 연구를 위해 연구원과 ES가 직접 접촉해야 하는 일이 종종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도 접촉 시간은 최대한 줄이고, 안전을 위해서 경비가 아닌 기동타격대 대원과 함께 한다.
일전에 가드-079가 했던 일을 그대로 재현해보겠답시고 상층부에서 투입한 연구원도 기동타격대 대원이 셋이나 함께 하지 않았던가.
TF도 알고 있다. 이 세상에 퍼져있는 ES를 연구하고 처리하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일회용품으로 쓰이고 버려질 고기방패들이 아니라, 명석한 두뇌로 연구를 해야 하는 전문가들이라는 것을.
'후우, 내 인생에 이렇게 좆같은 일이 일어날 줄이야.'
TF에 입사한 후부터 자신의 인생은 탄탄대로라고 생각했건만, 현실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연수기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4급 연구원 신분으로 배정받은 곳은 제 6 처리시설. 그곳에서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개인 연구를 진행해서 몇 개의 성과를 냈다.
어떻게든 연구팀장급으로 승진하기 위해, 지난 몇 년간 스트레스로 불면증에 걸릴 만큼 죽어라 노력했다. 지금은 '처리된' 연구원들 중 한 명의 연구를 몰래 훔쳐내서 자신의 성과로 위장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연구팀장으로 승진한 뒤에도 이홍선에게 부서이동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끊임없이 목격자와 경비들이 죽어나가는 이 지긋지긋한 처리시설에 처박힌 채,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시설 관리자 대우를 받으며 또 다시 몇 년을 썩었다.
상층부에서 가드-079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FCD에서 내려온 행정명령이나, 다른 시설에서 이곳에 관심을 가지는 것만 봐도 그에게 이목이 집중되어 있다는 걸 어찌 모르겠나.
그러니까 죽이고 싶었다.
'그 놈은 여기가 무슨 놀이동산인 줄 알아. 빌어먹을......'
사실 B38, B39가 경비 전용 생활 구역이지만, 그에겐 일부러 알려주지 않았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생활 구역에 대한 의문을 가질 법도 한데, 가드-079는 너무 멍청한 탓에 '생활구역이 따로 없는 직장인가보다' 하고 이렇게 너저분하게 생활하는 것이다.
이홍선에 눈에는 그저 역겨운 가식으로만 보였다. 멍청하다는 이유 하나면 그의 태도를 설명할 수 있지만, 왠지 그게 전부가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이 모르는 일면 속에 감춰진 진짜 가드-079는 사실 철저하게 계산하여 주변인들을 우롱하고, 사이코패스마냥 저 혼자서 즐기는 이상성욕자인 것 같았다.
어디에도 그런 확증은 없지만, 그런 놈이라고 생각했다.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B42로 내려온 이홍선은 조심스럽게 복도를 살폈다.
저위험군에서 내리자마자 계단을 타고 고위험군으로 내려가 체크 포인트의 문을 열었다. 체크 포인트 너머로 이어진 긴 복도의 중앙에는 자신이 찾고자 했던 물건이 있었다.
흰 백열등이 켜져 있는 단조로운 공간 속에서 홀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고 있는 보안 카드. 재빨리 뛰어간다면 10초만에 집어들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들이 은폐된 구역인 만큼 조심성이 극대화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6-10이야 실험 용도로만 사용한다면 크게 위험하지 않다.'
목격자를 투입해서 게임을 즐기게 하거나, 경비를 투입해서 6-10의 카지노 직원들을 공격하게 만드는 실험따위 이미 수백 번도 넘게 해봤다. 즉 들어가지만 않는다면 안전하다.
'카지노의 직원이나 정체불명의 손님들이 갑자기 카지노를 탈출해서 인간을 공격했다는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지. 너무 긴장할 필요 없어.'
그래도 혹시 자신의 발소리가 안쪽에서 들릴까봐, 발소리가 ES를 자극할까봐 고양이걸음으로 살금살금 움직였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긴 했지만 어찌어찌 6-11의 은폐실도 지나쳤다.
사육장 안에 갇혀있는 24마리의 식인닭들 역시 탈출 사례는 아직 보고된 적이 없었다.
6-11의 닭들은 먹이만 제대로 공급된다면 사육장 신세에 딱히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다만 며칠간 먹이를 주지 않은 뒤에 목격자를 실험체로 투입했을 땐 24마리의 닭이 케이스를 부수고 나와 인간을 덮치는 모습을 봤다.
마치 피라냐가 닭으로 환생한 것 마냥, 인간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든 놈들은 순식간에 뼈만 남기고 모두 쪼아먹어버렸다. 역시 은폐실 안에 들어가지만 않는다면 안전하다.
'6-15는 기계니까 그렇다 치고, 6-13도 지금은 상당히 안정되어 있을 거다.'
본래 6-13에게 캣닙을 주면 극도로 흥분해서 캣닙 주변에 뭐가 있든 죄다 밀어버리고, 캣닙만 냉큼 가져간다.
6-13은 자신의 신체에 가해지는 모든 충격을 2배로 되돌려주기 때문에, 6-13이 직접 움직여서 들이박은 인간들 중 멀쩡하게 살아남은 인간은 없었다. 오늘까지는.
'그 놈은 그만한 충격을 받고도 어떻게 살아남은건지 모르군. 하지만 잘됐어. 덕분에 이렇게 카드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됐으니까.'
복도 중앙에 떡하니 놓여있는 경비용 보안 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그리 멀지 않았다.
일개 경비에게 주어지는 보안 등급은 4급에 불과하기 때문에 평소라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지만, 특이하게도 가드-079는 현재 1급 보안 등급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보안 카드 역시 TF의 서버에 임시로 수석 연구원과 같은 보안 등급이 등록되어 있을 터. 보안 카드와 ID 카드는 별개로 취급하기 때문에 타인이 슬쩍 사용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서버에 남는 로그는 보안 카드의 소유자 이름이지, 사용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니까.
'저것만 가지고 나가면 모두 해결할 수 있다.'
어디로 내뺸건지 모를 가드-079는 다음에 좀 더 차분히 괴롭혀주기로 하고, 우선은 보안 카드를 들고 재빨리 내빼는 게 중요했다.
분명 주변은 백열등 전등 때문에 눈이 부실 만큼 밝았지만 음침하기로는 공동묘지 못지 않았다. 특히 서늘한 기온이 유지되는 이곳 특성상, 얇은 복장을 한 이홍선은 괜히 소름이 돋았다.
냉큼 보안 카드를 집어든 그는 누가 볼세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위험군의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렸다.
이 기분나쁜 곳에서 빠져나가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일부러 B40의 중간 거점 게이트도 그냥 열어두고 왔다.
혹시 모를 오염 위험 때문에 시간을 단축하고자 규정 몇 개를 어겼을 뿐이다. 그마저도 연구원 본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아래의 상황을 확인하고자 내려갔다고 둘러대면 어찌어찌 넘어가줄 것이다.
하지만 이홍선은 모르고 있었다.
관리봇이 접속 차단을 당한 탓에 시설 내부의 CCTV 영상이 실시간으로 여과없이 타 시설에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을.
본래 관리봇이 온라인 상태였다면 타 시설에 들어온 영상 공유 요청을 먼저 확인하고, 시설 관리자에게 결재를 올려 허가를 받는다. 일전에 교육용으로 현장을 구경하고자 했던 미국 지부의 사관학교도 그런 식으로 영상을 공유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관리봇은 접속 차단을 당했고, 몇 되지도 않는 연구원들은 다른 시스템을 손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제 6 처리시설의 CCTV망은 이미 프리패스로 공개되어 타 시설의 유흥거리로 전락한 참이었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보안 카드를 손에 넣었다는 생각에 크게 기뻐한 이홍선은 열심히 엘리베이터로 달렸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까지의 거리를 불과 3m 남짓 남겨두고, 그의 앞에서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혀버렸다.
이 시설에는 단 두 개의 엘리베이터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상에서부터 B40까지 이어지는 화물용 엘리베이터, 그리고 B41에서 B80까지 이어지는 관리용 엘리베이터.
관리 효율이 떨어지는 탓에 79기 이전의 경비팀들이 엘리베이터 증설을 몇 번이나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홍선은 그들의 요청을 단칼에 잘라냈다.
왜냐하면 시설 관리자 입장에선 시설 관리에 들어가는 예산을 적게 써야 인사고과에 후한 점수가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때 경비팀의 요청을 수락해서 상층부에 보고서를 올리고, 엘리베이터를 증설했다면? 그랬다면 B42의 저위험군에 설치된 백열등이 갑자기 깜빡이며 꺼지기 시작하더라도 자신은 탈출할 수 있지 않았을까?
"설마......!"
깜빡이는 백열등 불빛 속에서 이홍선은 엘리베이터의 층수 표시기가 B44로 변하는 것을 확인했다.
트릭없는 마술사가 은폐실에서 탈출해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을 수도 있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가드-079 이 개새끼가!!"
버튼을 미친듯이 연타했지만 엘리베이터는 B44에서 좀처럼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이홍선의 눈은 불안과 공포로 물들어갔다. 보안 카드도 손에 넣었는데! 이제 탈출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자신의 등 뒤에서 벌어지고 있는 '침식 현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아......"
엘리베이터의 전력이 나가버렸다.
동시에, 자신이 서있는 위치를 포함해서 B42의 저위험군의 모든 전등이 꺼져버렸다. 공기 순환 시스템마저 작동하지 않는 것이 느껴졌다.
이홍선은 목뼈에서 끼긱끼긱 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등 뒤로 쭉 이어진 저위험군의 복도는 검은 물감으로 칠한 것처럼 어두컴컴하기 짝이 없었다.
ES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정전을 겪을 때 가장 먼저 '정전미로'를 떠올린다.
하지만 정전 미로는 절대로 이 시설에 발을 들일 수 없다.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내려앉은 어둠과 적막으로 이홍선은 숨조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엉금엉금 기어 낡은 책상 안에 기어들어갔다.
지금의 정전은 어쩌면 단순히 관리봇의 부재로 시설의 전력 관리에 이상에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 멈춰버린 고문 시스템을 재작동시키기 위해 연구원들이 이것저것 건드렸고, 그 과정에서 과한 전력을 사용했다면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테이블 너머로 고개만 빼꼼 내민 이홍선은 제발 자신의 예상이 맞길 바라며, 곧 비상 전력이 가동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그의 애원도 무색하게, 저위험군의 복도 가장 끝에 위치한 전등이 홀로 켜졌다.
어둠 속에서 홀로 켜진 전등은 곧이어 다시 깜빡거리더니 꺼졌다. 그리고 그 앞의 전등이 2초 만에 켜졌다.
"말도 안 돼......"
마치 인간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것처럼 백열등의 불빛도 하나씩 켜지며 이홍선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홍선은 경악 속에서 자세를 한껏 낮췄다.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불빛이 들어오지 않았고, 자신의 스마트 패드도 먹통이었다.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이홍선은 상황을 분석하려는 것 보다 현실부정을 먼저 했다.
'그 놈이 벌써 은폐실을 탈출 했다고?!'
그의 기억 속에서 떠오른 한 ES는 분명 B75의 깊숙한 곳에 처박혀 있었을 터인 놈이었다.
긴 복도와 혼자 남은 인간 한 명이라는 조건이 맞춰진다면 무작위로 등장하는 ES.
놈이 처음 발견된 건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약 80년만에 발견된 나치의 지하 보급 창고였다.
그곳은 본래 히틀러가 전쟁에서 패배할 것에 대비해 그가 숨어들어 후일을 도모하고자 만든 지하 방공호를 겸했는데, 당시 탐사대가 히틀러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대량의 금괴와 과거의 유산들을 발견했을 때 놈이 튀어나왔다.
길게 이어진 복도에서, 이미 고장나서 불이 들어오지도 않는 전등이 하나씩 켜지며 '무언가'가 탐사대를 향해 접근했다고 한다.
당시 탐사대가 촬영 중이었던 탓에 영상 기록이 남아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돌아온 게 영상 기록 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놈에게 닿으면 예외없이 죽는다!'
죽는 것도 그냥 평범하게 죽는 게 아니었다. 불빛이 존재하는 공간은 ES의 공간으로 취급되었기에, 그곳에 인간이 존재한다면 손가락과 발가락 끝부터 믹서기에 갈아버리는 것처럼 분해되기 시작한다.
살아있는 인간이 작열통과 맞먹는 고통을 느끼면서, 전신이 톱밥마냥 분해될 때 까지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간다.
영상 속에 남겨진 탐사대의 죽음은 무려 15분 간 이어졌다.
'놈이 절대로 탈출하지 못 하게 은폐실의 백열등이 절대 꺼지지 않게끔 유지되고 있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탈출한 거지?!'
이어지는 길(복도)이 있다면 놈은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다.
때문에 인간을 미끼 삼아 유혹한 다음 절대로 불이 꺼지지 않는 공간에 밀어넣어 철저하게 가둬뒀다.
그런 놈이 이 짧은 시간에 B42까지 치고 올라왔을 것이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나.
'하지만 대처법은 있다......!'
2초. 전등 하나가 꺼지고, 다음 전등이 켜지기까지 정확히 2초가 걸린다. 불빛이 켜져 있던 공간이 어둠으로 물든 순간 뛰어든다면 놈의 허점을 찌를 수 있었다.
놈은 반드시 전등 하나를 한 번씩 껐다 켜면서 이동할 수 밖에 없으니까.
놈에게서 벗어난다면 즉시 신체포기 카지노로 뛰어들 것이다. 최악의 경우 적당히 시간을 끌면서 버티다가 신체 부위 일부를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빠져나오면 그만이다.
'그래, 살 수 있어. 2급 ES를 상대로도 대처법만 숙지하고 있다면 살 수 있다고!!'
이제 그걸 실행할 용기와 뇌의 명령을 잘 따라주는 몸만 있으면 된다.
이홍선은 쉼호흡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전등은 20m 거리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좋아. 와라, 얼른 오라고!"
이홍선은 놈이 자신의 코앞까지 온 순간, 2초라는 시간을 이용해 재빨리 뛸 생각이었다.
이윽고 20m 너머의 전등이 꺼지고 2초가 흘렀다.
이홍선의 머리 위에서 전등이 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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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