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피해피 고문재단-44화 (44/209)

경비 업무 일지 : 야간근무(6) (수정완료)

이상하다.

이미 감찰본부측에서 허위로 파견 연구원을 보내겠다는 연락을 보내두었다. 처음부터 XX 시설에서 연구원을 보냈다고 하면 반드시 확인을 하기 때문에, 아예 감찰본부 산하에 있는 바지 연구 시설의 이름을 빌리는 경우가 많았다.

TF내에서 불모지라 불리우는 처리 시설에 고맙게도(?) 연구 인력을 보내준 것인데, 정작 마중을 나온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보통 이런 경우는 4급 보안등급에 해당하는 신입 연구원들만 줄줄이 딸려보낸다고 해도 버선발로 뛰쳐나와 반겨준다.

처리 시설에서 근무하는 연구원들은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항상 개인 연구에 신경쓰는 한편, 언제 ES가 탈출을 시도할지 몰라 조마조마한 나날들을 보낸다고 들었다.

즉 아랫 것들이 들어와준다면 어부바를 해서라도 자신의 휘하로 모셔가려고 애를 써야 정상이다.

"좀 이상하다. 그치?"

임지영이 고개만 반쯤 돌려 두서없는 질문을 던지자 팀원들도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위장 잠입을 한 두번 해본 것도 아니라 그들은 어느 시설이나 부서든 항상 새로운 인력을 갈구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특히 최전선에서 목숨을 내던지는 기동타격대는 규율이 엄하기로 유명한데, 그들조차도 신입이 들어오면 처음에는 병아리를 대하는 것 처럼 섬세하게 다뤄준다.

그런데 불모지에 처박혀 있는 놈들이 파견 인력을 환영해주기는커녕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본부에 연락해서 제 6 처리시설 내부 CCTV망 확인해보라고 해봐. 무슨 일이 생겼을 수도 있어."

"이미 시도 해봤는데 수십 분 전부터 시설과 모든 통신이 두절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서버를 통해 자동적으로 갱신되고 있는 로그를 확인해본 결과, 일부 ES가 탈주를 감행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합니다."

"통신이 두절되기 전엔 어땠다는데?"

"시설 내부가 엉망진창이었답니다. 한 명뿐인 경비는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겠고, 시설 관리자인 3급 연구팀장인 이홍선은 체내에 심어둔 전자칩의 신호가 소멸한 것을 확인했다는 모양입니다."

ES가 탈주했으며 시설 관리자가 사망했다면 이미 코드 블랙이다. 자신들이 제주도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벌써 시설에 설치된 핵폭탄이 터져야 정상이건만, 시설 주변은 너무나도 멀쩡했다.

"말이 안 되잖아. 시설 내부와 통신도 두절됐고, 최고 책임자에 해당하는 연구팀장도 사망해버렸는데 코드 블랙이 아니라고?"

임지영이 눈썹을 치켜뜨며 날이 선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하지만 본부에서 제공해주는 정보 외에 달리 알고 있는 것이 없는 팀원들은 난처할 따름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모르는 걸 안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어쩌면...단순 해프닝인 것 아닐까요?"

육감적인 몸매와 20대임에도 10대에 뒤지지 않는 동안을 자랑하는 임지영과는 달리, 흰 가운 속에 다부진 체격을 자랑하는 여성 감찰관이 선뜻 입을 열었다.

본래 기동타격대에서 활동하던 그녀는 감찰 본부에서 스카웃을 받아 감찰관이 된 케이스였다. 남성 못지 않은 튼튼한 체격에 다소 거친 인상이 느껴지는 외관에선 그녀가 현장의 프로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과거의 이름을 버리고, 감찰관으로써 새롭게 부여받은 이름은 나탈리 수.

그녀가 그럴싸한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임지영은 단칼에 쳐냈다.

"말도 안돼. 단순 해프닝으로 코드 블랙에 해당하는 일이 터졌을리가 없어. 차라리 관리봇이 하필 이 타이밍에 접속 차단을 당했고, 그 사이에 모든 연구원들이 사망해버렸다고 보는 게 훨씬 더 합리적이야."

말도 안 되는 억측이었지만, 그 말대로라면 가장 합리적인 추측이긴 했다.

"일단 들어가서 확인해보자. 내부가 엉망이 됐다면 우리가 직접 코드 블랙을 설정하고 시설의 완전 폐쇄 작업을 진행해야 해."

"발포 허가 해주시는 겁니까?"

부드러운 인상의 민머리 남성인 긱스가 흰 가운 안 쪽에 숨겨둔 흰색의 권총을 슬쩍 내보이며 말했다.

"시설 관계자와 마주쳤을 때는 발포하면 안 돼. 그 외라면 상관없어."

감찰관이 ES를 상대할 일 따위는 없지만, 다들 엘리트 코스를 밟는 과정에서, 혹은 현장에서 맞딱뜨리게 되는 급작스러운 사태를 통해 ES에 대한 대처법을 터득했다.

인간의 힘으로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ES인지, 그렇지 않은 ES인지 구분할 수 있는 정보력과 안목도 가지고 있다. 여차하면 모든 임무를 중지하고 즉시 본부에 기동타격대와 외부 폭파 부대를 호출할 작정이었다.

임지영을 필두로 6명의 팀원들이 제 6 처리시설 내부로 향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통해 연구원들이 거주하는 지하 5층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눈 앞에 벌어진 참담한 광경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 했다.

"이거 혹시......?"

대형 할인마트 정육 코너에서나 볼 수 있는 붉은 빛깔의 분쇄육이 모니터룸의 중심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중간중간에 섞여있는 섬유질이나 플라스틱 조각들을 보건대, 이곳에서 근무하던 연구원들의 '잔해'였다.

"으음......!"

다들 이런 광경에는 익숙한지라 아마추어처럼 고개를 돌리거나, 헛구역질을 하진 않았다.

다만 기동타격대로 활동한 경험이 있는 나탈리 수는 무거운 침음을 흘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는 이 인간 분쇄육이 어떻게 생성되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ES 6-340. 그 놈의 짓이예요."

"맞아. 이렇게 깔끔하게 인간을 갈아버리는 건 걔 밖에 없긴 해."

임지영이 분쇄육의 산더미에 다가가 손으로 슬쩍 건드려보았다. 당장 손으로 뭉쳐서 구우면 햄버그를 만들 수 있을 만큼 톱밥 수준으로 사람을 갈아놨다.

대부분의 ES가 인간을 현대 미술처럼 잔인하게 살인해서 장식물처럼 만들거나, 먹어치우는 것에 비해 ES 6-340은 그저 철저하게 분쇄해버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놈은 조명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은폐실에서 탈출하자마자 곧장 이 곳으로 올라와 연구원들을 살해한 뒤, 이미 도주했을 겁니다."

어느새 흰 권총을 뽑아든 긱스가 천장의 깜빡이는 조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멀쩡한 전등이 갑자기 꺼진다는 건 놈이 왔다는 신호이며, 살인이 끝난 후 조명이 깜빡거리고 있다면 놈은 이미 떠났다는 증거였다.

만약 이곳의 조명이 온전하게 밝은 상태였다면 팀원들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않고 즉시 지상으로 도망쳤을 것이다. 살인 현장에서 조명이 켜져있다는 건 놈이 아직도 그곳에 존재한다는 것이었으니까.

"시설 꼬라지가 말이 아니네? 이 멍청한 새끼들은 대체 뭘 했던 거야?"

임지영이 스마트 패드를 몇번 두들기다가 관리봇이 접속 차단 상태라는 것을 알고 크게 혀를 찼다.

자신이 말하고도 내심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했던 것이 설마 진짜였을 줄이야.

그녀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홍채 인식을 통해 관리봇의 접속 차단 상태를 해제했다.

기록상 5시간 하고도 50분만에 깨어난 관리봇은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더니, 마치 인간처럼 전자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나같아도 그랬을 거야.'

커다란 모니터에 모습을 드러낸 안전모를 쓴 요정 마스코트가 눈에 띄게 피곤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딱 봐도 자신의 의사로 접속이 차단 된게 아니었다.

임지영은 제 6 처리시설의 관리봇을 정식명칭으로 호출했다.

"6-FM(facility master). 네가 접속 차단이 되기 전까지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보고해봐."

AI 답지 않게 푸념 섞인 짜증과 불만, 그리고 피로감이 묻어나오는 보고를 약 3분에 걸쳐 들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지금 여기 갈아만든 배 신세가 된 놈들이 평소에 안 하던 실험을 갑자기 진행하는 척 하면서 경비를 엿 먹이려 했고, 그 과정에서 넌 방해가 되니까 접속 차단 당했다는 거네?"

-그렇습니다.

"일단 시설의 시스템부터 제어하도록 해. 그리고 ES 6-340이 탈주했으니 즉시 상층부에 보고를 올리고, 현 상황을 코드 블랙으로 설정해. 이건 TF 특수 규정에 따라 가장 높은 보안등급을 지닌 내 권한으로 명령하는 거야."

-즉시 실행하겠습니다.

거대한 모니터 위에 정확히 3분짜리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코드 블랙이 선포될 경우 시설 곳곳에서 비상 경보음이 울려퍼지며, 엘리베이터와 지상 출입구를 제외한 시설내의 모든 시스템에 락이 걸린다.

이는 1급 수석 연구원이나 시설의 최고 책임자인 연구소장, 처리시설 관리자도 해제할 수 없는 시설 종말 프로그램. 즉 완전 폐쇄 절차였다.

3분의 제한 시간내에 연구원들은 모두 탈출해야 하며, 카운트다운이 끝나면 B80과 B50에 각각 존재하는 2개의 핵폭탄이 차례차례 폭발한다.

B49부터 B1까지의 공간이 핵폭발의 여파를 일부 막아줄 것이기 때문에 탈출한 인원은 어마어마한 지진과 후폭풍 속에서 살아남기만 한다면 미래는 보장되어 있었다.

"데이터 챙겼습니다."

"연구 일지 챙겼어요."

"좋아, 나가자."

2분 30초가 막 지났을 즈음, 이미 임지영보다 먼저 움직이고 있던 팀원들이 작은 성과를 거두자 즉시 탈출을 명령했다.

하지만 그들이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기 직전, 갑자기 경보음이 꺼지며 카운트다운이 취소되었다.

"...뭐야?"

당황한 임지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작스럽게 시스템이 오류를 일으켰을리는 없고, 한낱 관리봇이 자신의 명령을 무시하면서 시설 종말 프로그램을 중지할 수도 없었다.

"6-FM! 대체 뭐야?! 갑자기 왜......!"

-FCD에 준하는 최고 권한에 의해 시설 종말 프로그램 발동이 취소되었습니다.

"뭐?! 설마 상층부에서......!"

-외부에서 들어온 명령에 의한 중지가 아닙니다. 내부에서 들어온 명령입니다.

"내부라니. 여기에 나말고 더 높은 보안 등급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다고......"

당황한 임지영은 스마트 패드를 꺼내 제 6 처리시설 내부의 CCTV망을 살폈다.

그 높으신 FCD 나으리들께서 이곳에 자신보다 먼저 행차하셨을리는 없었다.

그런데 딱 한 명. 인간이라고 부를 만한 존재가 있긴 했다.

"...가드-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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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참 정신사납네."

B44의 저위험군 편의점에 신입을 두고 올라온 호국은 ES 6-15, 랜덤 믹스 마스터 앞에 서있었다.

자신이 복도에 두고왔던 카트를 수거할 겸, 가볍게 믹스 음료나 한잔 하고 올라가서 쉴 예정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백열등으로 밝혀진 흰 복도가 붉은 비상등 불빛으로 메워지더니, 시끄러운 경보음을 울리기 시작했다.

"얼른 음료수 한 잔만 만들고 올라가서 쉬어야지."

호국은 빨간 버튼부터 보라색 버튼까지 순서대로 눌러 다크다크 레인보우를 만들었다.

이게 더럽게 맛이 없긴 해도 묘하게 사람을 끌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한 모금 마시면 역시나 입 안에서 역겨움과 청량감의 혼종 축제가 벌어졌지만, 돈 쓸 필요 없이 목을 축이기엔 딱이었다.

"이건 언제 먹어도 맛이 없단 말이야."

-시설 종말 프로그램이 발동되었습니다. 시설내에 존재하는 모든 TF 관계자들은 가능한 빨리 시설 밖으로 대피하여 주십시오.

쩝쩝대며 입맛을 다신 호국은 다시 한 번 안내 방송이 울려퍼지자 살짝 짜증이 치솟았다.

누구는 하루종일 굶고 늦게 돌아와서 건강에 안 좋은 야식을 먹고 야근까지 했는데, 사람을 쉬게 해주진 못할 망정 한바탕 소란을 벌이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리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시설 종말 프로그램' 이라는 말에 지금껏 꺼낼 일이 별로 없었던 메뉴얼의 뒷내용이 곧바로 수면 위에 떠올랐다.

일전에 벌어졌던 외적 침입 사태 당시에도 비상 사태가 선포됨에 따라 호국은 경비로서 해야 할 일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외적 침입이 아닌 다른 종류의 비상 사태였다.

'시설 종말 프로그램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3분 안에 나가지 못 하면 굉장히 위험하다는 건 알겠어.'

시설 종말 프로그램에 대한 내용은 코드 블랙 설명칸에 아주 짧게 쓰여있을 뿐이었는데, 3분이 지나면 핵폭탄에 의해 시설이 폭파된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왜 시설을 폭파시키는지, 어째서 꼭 3분이라는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는지, 이럴 경우 경비는 대체 뭘 해야 하는지는 일절 쓰여있지 않았다. 그래서 호국이 완전히 이해하기엔 조금 어려운 감이 있었다.

애초에 TF에선 일회용으로 쓰고 버리는 경비와, 두고두고 써먹어야 하는 연구원 및 기동타격대에게 제공하는 정보의 양과 질부터 어마어마한 차이가 존재한다.

곧 죽을 경비들에게 TF는 물론이고 시설에 대한 자세한 내막따윌 알려줄 친절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으며, 한술 더 떠 호국은 기본적인 경비 교육도 받지 못 했다.

결국 멍하니 음료를 든 채 잘 돌아가지도 않는 구닥다리 뇌를 열심히 굴려본 결과, 호국은 가장 믿을 만한 존재를 호출했다.

"관리봇!!"

-부르셨습니까?

"시설 종말 프로그램이란 게 발동했을 때 가드는 뭘 해야 하는데요?!"

-블랙 코드 발령시 가드가 해야 할 일을 검색해본 결과, 검색된 정보는 0건입니다. 공식적으로 TF내에서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그럴수밖에.

코드 레드만 터져도 가드는 전원 몰살 확정인데, 코드 블랙이 터지면 가드가 뭘 해야 하냐고? 오히려 내부 규정에 '가드는 그냥 기다리다가 죽어라' 라고 쓰여있지 않은 것이 다행인 상황이다.

"일을 그렇게 대충 하면 어떡해요?! 없으면 만들어야지!!"

-상층부에 건의사항을 제출하겠습니다.

"그걸로 끝이라고요? 내가 뭘 해야 할지도 알려줘야지!"

-메뉴얼에 기재된 내용은 아닙니다만, 가드-079의 생명을 우선시하고자 한다면 서둘러 시설에서 탈출하거나, 시설 종말 프로그램 발동을 취소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이게 취소가 돼요?"

분명 예전에 관리봇으로부터 '나는 빡빡이다'를 세 번 외치면 시설을 완전히 폐쇄해버릴 수 있다고 들었는데, 호국은 태생부터 멍청한 머리와 야근으로 인한 피로감 때문에 그 반대를 쉽게 떠올리지 못 했다.

-취소 코드는 '자라나라 머리머리' 입니다. 취소하시겠습니까?

"당연하지! 자라나라 머리머리!"

-시설 종말 프로그램 발동이 취소되었습니다.

머리가 울릴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비상 경보음이 뚝 끊어지고, 붉은 비상등 불빛으로 가득했던 복도도 원 상태로 돌아왔다. 이제야 한시름 놓였다.

이 시설을 다루는 일이야 똑똑하고 높으신 분들께서 하는 일이지만, 호국은 이제 막 야근을 끝마친 자신을 내버려두고 갑자기 이런 사태를 일으켰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최소한 언질이라도 줘야 정상 아닌가.

하지만 호국의 스마트 패드에는 누군가로부터 연락이 들어온 흔적따윈 없었다. 헬멧 내부에 부착된 무전기는 예나 지금이나 조용했다.

호국에게 실험한답시고 일을 떠맡긴 이홍선 팀장과 휘하의 연구원들이 호국만 따돌리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이 틀림없었다.

'따져야 하나? 아니, 그래도 직장 상사한테 대들면 사회 생활 하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도움도 안 되는 군 선임들이 매일 같이 늘어놓은 잡다한 인생 교훈 중 하나가 바로 '나대지 말자' 였다.

군대는 군법으로 철저하게 통제받고 있는 곳이지만, 사회에선 다들 알게 모르게 관례니 뭐니 하면서 숨 쉬듯이 부조리를 유발한다고 배웠다.

거기에 대항하면 혼자 미친놈, 나쁜놈 취급 당하는 건 당연지사. 운이 나쁘면 내부 분위기를 생각해서 해고 당하거나, 승진에 제동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런 불편한 얘기를 선임들이 매일같이 돌아가며 호국의 머릿속에 처박았다.

'따지고들면 네까짓게 뭘 아느냐며 화내겠지? 그럼 나에 대한 안 좋은 얘기가 퍼질거고, 진급도 힘들어질거고, 직장 생활도 꼬이겠네.'

어린 시절부터 품었던 남들에 대한 열등감과 그로 인한 자격지심으로 호국은 콤플렉스가 있었다.

자신보다 잘난 사람을 상대로 괜히 주눅드는 소극적인 태도였다. 군을 전역하면서 자신감이 꽤 붙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현실로 닥치니 또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지. 언제까지고 당해주기만 하면 내가 뭐가 돼?"

근무를 시작한지는 이제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호국 아래로 신입도 한 명 들어왔다.

그런데 대놓고 부조리를 당하면서도 모른척 넘어간다? 허세를 부리면서까지 가르쳤던 신입에게 못 볼 꼴 보여주는 셈이다.

혼자서 처리해야 하는 산더미 같은 업무도 사람 한 명이 늘면 얼마나 편해지는데! 선임을 우러러 보는 후임의 존경심을 이대로 박살낼 수는 없었다.

"따지러 가자."

가드 메뉴얼에 제대로 기재되어 있지도 않은 일을 갑작스럽게 터뜨린 일, 자신에게 언질조차 주지 않은 일을 근거로 따지면 아무리 호국이 멍청해도 말싸움에서 질 것 같진 않았다.

'내 평생 직장을 이대로 허무하게 날려버릴 순 없지.'

이왕 핵폭탄으로 싸그리 날려버릴 거라면 자신이 늙어서 명예 퇴직을 할 즈음에 기념으로 터뜨려줬으면 싶었다.

호국은 다크다크레인보우를 단숨에 들이키곤 엘리베이터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근무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똑똑이들의 공간에 발을 들이려는 만큼, 힘이 잔뜩 들어간 두 다리에는 언뜻 비장함마저 서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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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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