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 업무 일지 : 공백(空白)
'말도 안 돼.'
정말 말도 안 되는 일 투성이다.
긱스가 어째서 갑자기 공포에 미쳐 폭주해버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열길 물 속은 알아도 인간의 마음 속은 알 수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어쩌면 이곳에 오기 훨씬 전 부터 불안감에 떨었을 수도 있다. 매우 위험한 ES가 탈주한 시점에서, 시설을 폐쇄시킨 다음 빨리 탈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과정이 자꾸 늘어지고 있었으니 극심한 불안감으로 결국 감정이 폭발해버렸을 수도 있지.
정작 중요한 건 긱스 개인의 심리적 문제가 아니었다. 갑자기 폭주를 일으키길래 서둘러 권총을 쏴 일격에 사살했건만, 놈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일어났다.
미간의 정중앙을 관통당했음에도 긱스는 기어이 나탈리를 죽이고, 민형주에게 달려들었다.
'최소한 몇 분 정도는 버텨주겠지.'
그래도 같은 팀원이라 살짝 미안한 감은 있었지만, 민형주를 돕지 않고 홀로 모니터룸의 안쪽으로 도망쳐 들어온 것에 후회는 없었다.
민형주가 저 미쳐버린 괴물을 상대로 최대한 시간을 벌어주길 바라면서, 자신은 메기와 함께 비상용 탈출 로프를 타고 지상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러다 문득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잠깐 발걸음을 멈췄다.
'한 명은 어디 있는 거지?'
이미 헬기를 타고 복귀해버린 로니 웨슬러를 제외하면 자신을 포함해서 이곳에 내려온 인원은 총 6명.
나탈리 수, 긱스, 민주형, 메기, 그리고?
"메이슨이 없어."
분명 시설 폐쇄 절차를 밟으면서 정보를 수집할 때 까지만 해도 있었다.
긱스나 민형주와는 달리 산만한 덩치를 지녔으면서도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있는 팀원. 실제로 그 외형 때문에 팀 내에서도 메이슨의 역할은 항상 '좋은 사람' 이었다.
감찰 임무를 수행할 때면 항상 그는 주변인들에게 곰 같은 인상을 주면서 빠르게 친해지곤 했다. 알게모르게 들려오는 뒷소문이나 가까운 사람들끼리만 한다는 비밀 이야기 같은 자잘한 정보를 수집하는 게 메이슨이 맡는 부분이었다.
실제로 사람이 좋은 편이기도 해서 자신과는 달리 절대로 매정하게 팀원을 버리거나 하진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희생했겠지. 그런데 이 덩치는 대체 어딜 간거야?'
총성이 울려퍼진 시점에서 후다닥 달려나왔어야 정상인데, 정작 B5의 내부 생활 구역에서 그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훈련받은대로 최대한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 살금살금 움직인 그녀는 터치 패드가 부착된 음료수 자판기를 지나쳐, 연구원들의 휴게 공간으로 향했다.
연구원들의 생활 구역에는 개인 룸과 휴게실, 그리고 식당과 발전실이 존재했다.
휴게실은 마치 넓은 거실처럼 뻥 뚫려있는 공간이었으므로, 보통 소화기나 비상용 탈출 로프는 이곳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바닥의 카펫이 질질 쓸려있는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금 전에 자신이 보낸 메기가 먼저 온 것이 분명했다.
"메기?"
평소의 귀여운 목소리에서 살짝 음량을 낮춰 동료의 이름을 불렀으나, 돌아오는 것이라곤 벽에 부딪쳐 되돌아오는 자신의 목소리가 전부였다.
어쩌면 지레 겁을 먹은 메기가 어쩌다 메이슨과 마주쳐, 함께 구석진 곳에 숨었을지도 모른다.
메이슨도 메기 못지 않게 무서운 것은 꺼려하는 편이었으니까. 실제로 내부 조사 명령을 내렸을때 가장 먼저 생활 구역으로 달려간 것도 메이슨이었다.
"메이슨?"
덩칫값 못하는 사내자식과 같은 겁만 많은 후배가 서로 부둥켜안고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웃음이 비어져 나올 법 했지만, 임지영은 이 상황이 조금도 웃기지 않았다.
서둘러 탈출 로프를 엘리베이터에 설치해서 빠져나가야 하는데, 이 느려터진 것들은 아까운 시간만 축내며 그녀의 화를 돋구고 있었다.
휴게실을 먼저 살펴봤지만 탈출 로프는 보이지 않았다. 소화전에 함께 있어야 할 소화기도 사라진 것으로 보아, 잔뜩 겁을 먹은 메기가 둘다 가지고 숨은 것이 뻔했다.
'걔들도 그냥 미끼로 던져버리고 나 혼자 나갈까?'
연구원 생활 구역은 프라이버시 존중을 위해 CCTV가 설치되어 있지 않다. 여차하면 두 사람의 다리에 총알을 한 발씩 박아넣은다음, 유유히 자신만 탈출하는 방법도 있었다.
'우선은 탈출 로프부터 확보해야 해. 언제 그 괴물이 쫓아올지 몰라.'
나탈리에게 그랬던 것 처럼, 지금쯤 민주형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있을 '긱스'를 떠올리며, 임지영은 식당에 발을 들였다.
발전실은 너무 좁으니 분명 숨을 곳이 많은 식당에 숨어있겠지. 예를 들어 냉장고의 옆이라던가.
"...없잖아."
딱봐도 커다란 냉장고의 옆에 숨어있을 줄 알았더니 놀랍게도 메기는 임지영의 예상을 완전히 깨뜨렸다.
설마 자신이라면 절대로 숨지 않을 발전실에 숨은건가 싶어 뒤로 돌아선 순간, 포크가 임지영의 어깨를 힘차게 파고들었다.
"아, 아으윽?!"
나탈리와는 달리 여성이 지닌 무기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근력보다는 유연성과 민첩성을 연마한 것이 임지영의 일생일대 최고의 실수가 되고 말았다.
소리가 들렸다면 반응이라도 했을텐데. 자신의 민감한 귀로도 파악하지 못 했던 상대는 너무나도 쉽게 그녀의 지척까지 접근했다.
탕! 탕!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 총부터 쏘고봤지만, 정작 그곳에 있어야 할 상대는 거짓말처럼 사라진 뒤였다.
어깨에 깊숙이 틀어박힌 포크를 빼낼 엄두조차 들지 않았다. 홧김에 열이 뻗쳐 연신 주위를 살피면서 소리쳤다.
"누구야? 어서 나와!!"
적이 근처에 있을 때 소리를 지르는 건 자살행위나 다를 바 없지만, 통증으로 잠시 사고가 정지된 임지영은 짧은 패닉을 일으켰다.
서둘러 마음을 다잡아 진정하긴 했지만, 이미 입밖으로 나온 의미없는 외침을 주워담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게 어두운 것도 아니었는데 대체 왜 보이지 않는 거지?'
식당에는 비상등만 켜져 있었기 때문에 아주 어두운 것도, 그렇다고 충분히 밝은 것도 아니었다.
단지 이런 환경 속에서 인간이 철저하게 모습을 감출 수 있다는 사실에 당황스럽기만 했다.
민형주와 '긱스'를 제외하면 이곳에 있는 건 메기와 메이슨 밖에 없을 터.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민첩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물며 리더인 자신에게 갑작스럽게 덤벼들 만큼 겁대가리를 상실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른 팀원들과 다르게 두 사람은 임지영을 훈련생 시절 교관처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몇 번이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잡스럽게 널부러진 식기들 뿐이었다.
주위에선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포크는 난데없이 어깨를 내려찍었다.
'...아!'
저도 모르게 천장을 올려보았을 때, 임지영은 권총을 들어올리기도 전에 몸을 굴려야 했다.
탈출 로프를 몸에 칭칭 감고 있는 메이슨이 거미처럼 천장에 매달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미친 새끼!!"
덤블링을 하는 것과 동시에 무차별적인 난사를 퍼부었다. 양 손 가득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 있던 메이슨에겐 머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머리가 없었으니 처음부터 희미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던 것.
그럼에도 임지영이 움직인 곳을 향해 정확히 포크와 나이프를 던지는 솜씨는 감찰관의 실력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마치 실시간으로 누군가에게 조종받는 것 처럼.
연이은 탄환 세례가 메이슨을 덮치자, 그를 단단히 묶고 있던 탈출 로프가 끊어졌다.
메이슨 같은 남자도 허공에 매달 수 있을 만큼 안전한 탈출 장비였는데,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쓸모가 없어졌다.
"하아, 하아...이 도움 안 되는 새끼!!"
대체 뭘 하다 이 지경이 됐는지는 역시나 중요하지 않았다.
하필 지금 이 순간에, 이 장소에서,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는 점이 임지영의 분노를 키웠다.
바닥에 떨어진 후부터 더이상 움직이지 않게 된 메이슨의 몸뚱이에 몇발의 탄환을 더 박아준 임지영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머리가 꿰뚫리고도 멀쩡히 살아나는 놈이나, 머리가 없어도 움직이는 놈이나, 이젠 지긋지긋했다.
'어쩔 수 없지. 5층 높이이긴 하지만 클라이밍(climbing)을 하면 어떻게든 올라갈 수는 있어.'
몇 명 남지 않은 팀원들이라도 살려보겠답시고 메기에게 탈출 로프를 구하라고 시켰던 건데, 설마 그녀도 일이 이렇게까지 틀어질 것은 예상치 못 했다.
수직으로 이어진 엘리베이터 통로를 기어올라가는 건 굉장히 힘들지만, 작업자들을 위해 중간중간 마련된 사다리를 이용한다면 가능할 것 같았다.
서둘러 이 지옥같은 시설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그녀는 식당 안쪽에 비치되어 있는 거울과 무심코 눈을 마주쳤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은 낡은 밧줄에 목이 매여 있었다.
또한 이마의 정중앙에 찍혀있는 검은 점은 처음엔 콩알만큼 작았다가, 눈깜짝할 사이에 눈알 크기만큼 커졌다.
아니, 눈알 크기의 구멍이 아니라 눈알 그 자체였다.
"?!"
소스라차게 놀라 권총도 떨어뜨리고 양 손으로 이마를 만져보았지만, 눈알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질척거리는 감촉이 어느샌가 그녀의 목을 타고 흐르고 있었을 뿐.
"안 된다고 하세요."
뜨끈한 열기와 함께 바싹 마른 여성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들려왔다.
밧줄도, 끈 같은 것도 아닌 질척거리는 무언가로 임지영의 목을 단숨에 졸라 맨 메기였다.
"어, 떻...게?!"
분명 이 식당엔 자신과 메이슨 밖에 없었을 텐데! 냉장고와 창고 문도 굳게 닫혀있었으니 그녀가 안쪽에서 기어나왔을리는......!
"아."
곁눈질로 바라본 메이슨의 커다란 시체는 좌우로 활짝 펼쳐져 있었다.
자신의 목을 옥죄고 있는 질척거리는 가죽끈 같은 물건. 열탕에 잠겨 있다가 막 빠져나온 것 같은 인간에게서 느껴지는 열기.
그녀가 어디에 숨어있었는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왜소한 체구의 그녀라면 분명......
"이거, 놓지 못해?! 이 쓸모없는 년......!"
"아직, 값을, 치르지, 않으셨대요."
"커흑! 악...!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근력 단련에 크게 공을 들이지 않은 임지영이라도 메기 정도라면 쉽게 뿌리칠 수 있었을 터.
하지만 임지영은 마치 자신이 세 살 배기 꼬마가 된 것 처럼 목을 옥죄는 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질척거리는 창자에 간신히 손가락을 밀어넣어 호흡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여력을 확보한 게 고작이었다.
물론 여력이 생긴다는 건 반격을 기회를 마련할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
빠른 호흡을 통해 힘을 확보한 임지영은 있는 힘껏 발뒤꿈치를 내질러 메기의 연약한 정강이를 걷어찼다.
파견 연구원을 연기하느라 하이힐을 신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 이상으로 공격은 잘 먹혔다. 몇 번 더 후려치면 이대로 메기의 정강이를 부수고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런 생각은 필요 없다고 합니다."
으득.
무언가가 임지영의 매끄러운 허벅지를 힘차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씹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악!!"
양 손목이 사라지고, 발목까지 끊어진 민형주가 눈구멍이 파인 얼굴로 임지영의 허벅지에 매달려있었다. 그녀의 생살을 잘근잘근 씹어대면서.
"생각이란 걸 할 만큼 대단하냐고 물어보시는데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들고 비척비척 걸어들어온 '긱스'가 그녀의 머리채를 붙들고 칼날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두개골이 파이지 않을 정도로만 절묘하게 힘을 조절해서 두피를 긁어내기 시작했다.
때마침 한층 더 강하게 조여진 창자 때문에 그녀는 비명을 내지를 권리마저 상실해버렸다.
자랑스러웠던 찰랑거리고 예쁜 머리카락이 두피와 함께 통째로 뜯겨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면 어떤 심정일까?
벌써 숨이 쉬어지지 않은지 수십 초가 넘게 흘렀다. 일반인이라면 기절하고도 남았을 텐데, 임지영의 정신은 너무나도 멀쩡했다.
신체는 여전히 위험을 인지하지 못 했는지 아드레날린의 분비를 완전히 멈춰버린 상태였다.
그녀는 살아있으면서 죽음이라는 고문을 받고 있었다.
"대체...이유가, 뭐야? 왜 우릴......!"
대체 자신들이 뭘 했길래? 탈주한 ES도 없었고, 문제될 행동 같은 건 일으키지도 않았다. 이곳에선 '아무 일'도 없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그녀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윽고 거울 속에서 밧줄에 목이 매달린 채 발버둥치고 있던 임지영이 축 늘어졌다. 현실의 그녀는 여전히 살아있음에도, 거울 속의 임지영이 먼저 생을 달리하고 만 것이다.
어쩌면 자신도 곧 죽음으로써 편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도하던 찰나, 그녀의 전신에 점이 찍히기 시작했다.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점이 개미떼처럼 늘어났다.
순간, 그녀를 괴롭히고 있던 모든 압박과 고통, 공포와 불안감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살아남을 수 없다면 차라리 이런 식으로라도 끝내는 게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한 것은 실수였다.
발 아래의 멀쩡한 공간이 파리지옥의 입처럼 쩌억 갈라졌다.
징그러운 벌레들이 득시글 거리는 지옥도 속에, 자신과 같은 인간들이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자신과 똑같이 전신에 무수한 점이 찍힌 자들이.
"아, 아아...안 돼."
그들 모두 이 지옥에 떨어지기 전에 같은 말을 내뱉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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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있기에 제가 있습니다.